계간평 │ 시

 

상징이 되기 위한 몸짓들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한때 시집이 삶에 대한 ‘예감’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 시절, 나는 한권의 시집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전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심지어 연애를 할 때에도 그 시집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무엇, 영혼 혹은 상징이었다. 한권의 시집은 ‘구원할 수 없는 것’들의 총량이었다. 가령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아버지의 인생 전체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한 편의 시를 사랑하게 되자 정희성의 시집은 내 몸에 각인된 영혼처럼 생각되어, 그의 시집에서 ‘구원’을 찾고자 밑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었다. 저문 강에서 삽날에 비친 노을을 씻는다는 것, 그것은 노을의 붉은빛과 삽날의 은빛이 혼융되어 아버지와 가난이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시대와의 연대의식을 꿈꾸게 하고, 그 과정에서 삶과 시대라는 이중의 억눌린 분노가 씻겨지는 카타르씨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요즈음은 쏟아져나온 시집을 읽다보면 ‘상징’과 ‘의미’라는 말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시적으로 변용되어서 내가 지금 이 시집들 속에서 찾으려는 것이 ‘상징’인가, 아니면 ‘의미’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시집을 상징으로 본다면, 나는 하나의 시집 속에 들어 있는 추상적인 것을 모두 불러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집을 의미로 인식한다면, 그 의미에 알맞은 구체적인 몇가지의 사례를 시집 속에서 찾아내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인터넷에서 본 흥미로운 기사 때문이다. 최근에 새로운 검색엔진이 하나 나왔다는 것인데, 다음 문장이 눈에 쏙 들어왔다.“기존 엔진에선 검색어를 하나의 상징(symbol)으로 인식해 그 단어가 들어 있는 모든 자료를 불러낸다. 그러나 렉시(lexxe.com)는 문장 속의 단어를 의미(meaning)로 인식해 전체 문장의 뜻을 이해한 뒤 답을 찾아”낸다(중앙일보 2005년 10월 26일자). 이 새로운 검색엔진의 특징은 검색질문이 입력되면 원하는 답만 간결하게 제공한다는 것.

한 계절에 읽어야 할 시집이 많다는 것이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특히 올해처럼 많은 시집이 쏟아져나온 것은 문단에 나온 이래 십수년 동안 처음 보는 현상인 것 같다. 새로운 검색엔진에 저 시집과 시들을 넣고 돌려버릴까. 그래서 이번 계절의 시집과 시들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고 점잖게 한말씀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푸념일 뿐, 여전히 나는 시집에서 의미보다는 상징을 얻고 싶다.“하찮은 팸플릿에서도 새로운 이미지의 빛”1을 발견했다는 바슐라르(G. Bachelard)가 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사방에서 이미지들이 대기를 침범하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가고 강대한 꿈에 혹은 귀를 혹은 눈을 부른다. 시인들이 넘쳐난다―대소시인, 유명한 시인,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 사랑받는 시인, 매혹하는 시인. 시를 위해 사는 자는 모든 걸 다 읽어야 한다.”(같은 곳) 말문이 탁 막힌다. 바슐라르는 ‘시를 위해 사는 자’는 시집의 하인이 되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수많은 시집과 문예지에서 그가 말한 ‘이미지의 무지개빛’을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말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비 갠 후 맑은 대기에 걸린 한줄기 내면의 광채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은 독자에게, 그들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도록 상징으로 통어된 ‘고뇌의 미학’을 제공해야 한다. 바슐라르가 독서의 신에게 기원한 대로 나도 “정말 매일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해 말해주는 책들이 바구니 가득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같은 책 37면) 그러나 방바닥에 쌓인 새 책들이 불편하기까지 한 것은 이 땅의 시인들이 여전히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고뇌와 새로움에 독자가 주눅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시가 어떤 시대보다 다양화된 것은 축복받을 일이지만, 그 다양성도 찬찬히 따지고 보면 자기 유파 내에서만 다양화된 것이지, 바슐라르가 말한 ‘옛 세대가 새 세대를 깨우고 새 세대가 옛 세대를 깨우는’ 통합적인 면모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밑줄까지 그으며 ‘너무 빨리 읽지 않고’ 침묵 속에서 음미하듯이 읽어야 하지만 나는 바슐라르의 충고와는 반대로 방바닥에 놓인 책들을 ‘큰 덩치를 삼키’듯 의미만을 추출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상징이라는 말을 비평적 의미보다는 어떤 추상적 아픔, 정신의 아픔으로 사용하려 한다. 시인이란 ‘나’와 세계 사이에서 빚어지는 상징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 모습은 “다른 인간들은 고뇌 속에서 침묵하지만 신은 내게 얼마나 괴로운지를 말할 힘을 주셨거늘”(괴테)의 형태일 것이다. 보들레르가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독창성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나, 두보(杜甫)가 남을 놀라게 할 만한 표현이 아니면 죽어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다짐들은, 우선 시가 표현능력임을 일러준다. 그러나 시인들이 독창성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의 괴로움에 대한 절실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지 그저 말장난이 아님은 물론이다. 간절함이 없는 시는 상징의 정수인 ‘예감’을 얻지 못하고 의미의 세계에 복속되고 만다.

하지만 빼어난 시는 빽빽한 숲에서도 자신만의 향기와 모습을 간직한 나무처럼

  1. 가스똥 바슐라르 지음, 김현 옮김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78,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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