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새로운 비평적 출발을 위한 중간 기착지

김명인 평론집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 창비 2004

 

 

권성우 權晟右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인문학부 교수 nomad33@sookmyung.ac.kr

 

 

 

김명인(金明仁)의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은 『희망의 문학』(1990), 『불을 찾아서』(2000)에 이어지는 그의 세번째 평론집이다. 물론 그사이에 독일기행집 『잠들지 못하는 희망』(1997)과 학술서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2002), 『조연현, 비극적 세계관과 파시즘 사이』(2004)가 있었다. 그가 비평을 시작한 지 햇수로 20년 만에 세 권의 평론집을 출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를 두고 활발하게 활동한 비평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대의 어떤 비평가보다도 당대의 가장 첨예한 비평적 화두들과 정면대결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명인을 일러, 우리 문학의 중요한 비평적 아젠다를 끊임없이 창안해온 문제제기적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평문이 수록되는 문예지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창작과비평』 『실천문학』 『황해문화』 등), 그래서 그를 현 평단의 주류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테지만, 그의 글쓰기는 항상 문단과 평단에서 민감한 화제가 되곤 했다.

이번에 출간된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도 이러한 그의 비평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부로 이루어진 이번 평론집의 구성은 학술논문과 에쎄이적 비평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1부에는 주로 작가론과 소설에 대한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2부는 메타비평과 이론비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부는 기형도·황지우·김영현 등의 시인론이 배치되어 있다. 1988년에 발표된 「발문으로는 조금 긴 우리들의 자서전: 김영현의 시」에서부터 2003년에 발표된 「영원한 경계인의 문학적 유서: 최인훈 ‘바다의 편지’」에 이르는, 아울러 경쾌한 에쎄이에서 진중한 학술논문에 이르는 글들이 함께 묶인 이번 평론집을 관통하는 문학적 화두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The Quarterly Changbi일단 2000년 이후에 발표된 최근의 평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비평가로서 김명인의 인식을 관류하고 있는 관점 중의 하나는 90년대 문학과 상품미학에 대한 단호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소설들은 잘게 부서진 삶의 파편들이 무한히 널려 있는 무변의 광야를 그저 지향없이 떠돈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99면)는 인식이나 “작가와 출판자본의 관계 역전, 즉 출판사가 작가와 작품에 의존하는 관계에서 작가가 출판사에 종속되고 작품이 출판자본의 요구에 의해 ‘주문제작’되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241~42면) 등의 관점이 이러한 김명인의 비평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러한 김명인의 관점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인식은 좀더 내실있는 대안의 제시와 이 시대 작품에 대한 정밀한 분석적 문제제기로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근본적으로 정당하고 옳지만, 동시에 지극히 일반적인 차원의 계몽적 비평은 정작 현실 속에서는 구두선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을 김명인과 나를 포함한 비평가들이 이제 인식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이 평론집은 십수년 전, 혹은 수년 전에 김명인이 지니고 있었던 관점을 수정 없이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평론집 전체를 유기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시선의 섬세한 조율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가령, “북한의 통치권력은 분명히 30년대 이래의 반제 무장투쟁의 전통 속에서 일정한 역사적 정통성을 지니고 또 현실적으로 40년 이상 북한지역을 사회주의사회로 통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399~400면)는 1990년 당시의 생각은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묻고 싶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변혁운동에서 정신적으로 탈주해간 자신의 행로를 “내가 속한 계급이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던 비열한 기회주의적 감각의 결과”(450면)로 해석하는 1999년의 관점은 지금도 변함없는지 궁금하다. 이러한 대목들에 대한 현재적 대화–변했다면 왜 변했는지, 변하지 않았다면 그 현재적 맥락은 무엇인지–가 포함되었다면 한층 살아 있는 비평집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비평가 최원식에 대한 메타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회통(會通)의 비평」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 글은 한 비평가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선배 비평가에게 부여하는 정당한 비평적 오마주(hommage)일 것이다. 가치있는 대상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도 비평의 소중한 몫이 아니겠는가. 최원식에 대한 그의 평가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최원식의 비평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좀더 있었더라면 더 예리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

논문과 비평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것이 이즈음의 추세라고 하지만,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학술논문들을 따로 묶었더라면 논문은 논문대로, 평론은 평론대로 그 독자성이 더욱 부각되어 일관된 저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나는 항상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정확하면서도 유려한 그의 문체에 감화되었으며, 문학적 진실의 핵심에 육박하는 소신있는 비평태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울러 이 시대의 문학에 대한 그의 진단에 별다른 유보 없이 동의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넓게 본다면, 그와 나는 상당부분 동일한 비평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의 아쉬운 점들을 중심으로 얘기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에 김명인은 평생 동안 연구하고 공부할 그만의 연구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비평적 아웃싸이더였던 김명인은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비평적 갱신과 도약을 이루어야 하는 싯점이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응시가 필요할 것이다. 생활의 안정이 비평정신을 위해서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가 어떤 새로운 비평의 표정을 보여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그는 영원히 고독한 비평가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