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새로운 신자유주의

 

 

윌리엄 데이비스 William Davies

영국 골드스미스 런던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내 번역된 저서로 『행복산업』 등이 있음. w.davies@gold.ac.vk

 

* 이 글의 원제는 “The New Neoliberalism”이며,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 2016년 9-10월호에 발표되었다. ⓒ William Davies 2016/한국어판 ⓒ 창비 2017

 

 

그리스의 전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20157월의 한 인터뷰에서 유럽연합의 재무장관 회의 중 채권국 대표들과 나눈 대화에 대한 통찰을 내놓은 바 있다. 돋보이는 것은 거의 초현실적인 수준의 불통에 대한 그의 묘사이다. “정말로 열심히 준비한 논리정연한 안을 내놓았는데 텅 빈 시선만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내 말은 그들의 말과 따로였다. 스웨덴 국가를 불렀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1 이백년 이상 자유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성적인 숙의(熟議)로 묶인 유럽 공통의 공공영역이라는 전망은 깨진 것처럼 보인다. 공동시장을 핵심으로 하는, 그 기획에 대한 전후(戰後)의 복원 노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과거 그 기획에 열광했던 많은 이들도 이제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바루파키스의 논평은 단순히 비판으로 분류될 수 없는, 새로운 정치적 반대 조류의 징후이다. 차라리 그의 말은, 지배적인 형식의 경제 규제가 명백히 증거나 평가 혹은 대안들의 장점에 구애받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는 당혹감의 표현이다. 일단 더이상 비판이 들리지 않거나 인식조차 안 된다면 비평가는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위로부터 보이는 이런 비합리성의 한 결과는 아래로부터의 몰이성(unreason)에 대한 옹호이다. ‘예술가 택시기사’로 잘 알려진 영국의 퍼포먼스 예술가 마크 맥고완(Mark McGowan)은 자신의 유튜브 영상에서 그 점을 잘 예시해준다. 맥고완은 얼굴에 딱 붙는 선글라스를 쓴 채 긴축재정 조치 및 정치 엘리트들과 탈세자들, 그리고 금융위기 이래 무분별하게 자행된 사회적 위해 사례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대시보드 위의 카메라를 향해 손짓할 때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인데, 절망했다기보다는 몹시 신이 난 모습이다. 그는 마치 ‘이런 일이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거야?’라고 묻는 듯하다. ‘예술가 택시기사’의 한 유튜브 영상은 “이것은 불황이 아니라 도둑질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또한 불법폭력에 대한 주장은, 도처에 달려 있는 #이것은쿠데타다(#thisisacoup)라는 해시태그나 그리스의 채무조건을 “재정적 물고문”(fiscal waterboarding)으로 묘사한 바루파키스의 인상적인 표현들의 경우처럼 이 새로운 저항문화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 『어니언』(The Onion)이나 『데일리 쇼』(The Daily Show) 같은 매체들은 오랫동안 풍자적인 정치 보도의 모델 역할을 해왔다. 영국의 웹사이트인 『데일리 매시』(The Daily Mash)는 「법정 화폐가 되기 위한 ‘이름 알리기’」(‘Getting your name out thereto become legal tender)나 「저렴한 추가 보유 주택을 수천채 짓는 토리들」(Tories to build thousand of affordable second homes) 같은 기사를 통해 특히 경제적인 부조리에 집중해왔다. 이런 제목의 글과 ‘진짜’ 뉴스가 나란히 배치되어 독자들에게 그중 하나를 고를 선택권을 효과적으로 제공하지만, 양쪽 다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통치권력의 비이성적 방향으로의 전환은, 2008년 이후에는 좀더 보복적인 종류의 정책결정이라는 특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한 정책결정은 자주 정책평가, 증거수집, 대중에 대한 호소와 같은 규범들 바깥에서 작동한다. 과거 신자유주의는 ‘효율성’이나 ‘경쟁력’이라는 경제적 판단을 사회 정의와 관련된 도덕적 판단보다 우위에 둔다고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적어도 공적 담론의 차원에서 각국 정부는 점점 더 아예 판단의 규범 밖에서 운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의 가장 좋은 예는 긴축정책 그 자체이다. 경기동행적인(procyclical) 긴축재정 프로그램이 거시경제의 침체를 피하는 데 성공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거의 없다.2 2008년 이후 유럽의 다수 정치 지도자들이 열광적으로 인용한, 하바드대학의 경제학자 알베르토 알레시나(Alberto Alesina)의 ‘팽창적 긴축재정’ 가설은 그저 정부지출의 축소가 반드시 경제성장의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일 뿐이었다. 그러나 긴축재정의 실패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그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저지하는 데 충분치 않아 보인다.

 

취약계층 길들이기가 목표인 사회정책들도 마찬가지로 믿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영국의 ‘복지제재’(benefit sanctions) 정권하에서 복지수당의 지급은 사소한 규정위반을 이유로 갑자기 한달이나 지체될 수도 있지만, 규정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절차적 합리성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는 면담장소로 가던 중에 심장마비가 왔지만, 그래도 제재를 받았다. 또다른 이는 형제의 장례식에 가면서 고용센터에 전화를 하려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서 복지혜택을 상실했다. 영국에서는 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재를 받았다. 수천명은 근로연계복지(workfare) 수주회사로부터 ‘노동적격’ 판정을 받고 장애복지혜택이 줄어들면서 사망했다.3 이제 노동시장 정책은 신경-언어적인 프로그램이나 셀프마케팅 구호 같은, 의심스러운 행동 활성화 기술(behavio

  1. Yanis Varoufakis, “My five-month battle to save Greece,” New Statesman 2015.7.16.
  2. 다음을 참고하라. Mark Blyth, Austerity: The History of a Dangerous Idea, New York 2013.
  3. Patrick Butler, “Thousands have died after being found fit for work, DWP figures show,” Guardian 201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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