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인터뷰

 

새로운 한반도 공간전략을 찾아서

도시설계가 김석철에게 묻는다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경제학.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ilee@hs.ac.kr

 

 

135-261

 

 

1987년 이후 한국에서는 불완전하지만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 그에 따라 이전에 노동·농업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던 축적체제가 일정하게 문명화·선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체제의 폐쇄적·경직적 요소가 잔존하고, 여러 사회세력이 끝없이 갈등하는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사회 각 계층은 나름대로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지만 통합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의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세계화, 기술혁명과 생산방식의 변화, 사회주의권 붕괴 같은 급속한 환경변화로 복잡한 세계가 도래했지만 새롭게 발생하는 사회·경제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개혁의 기대를 안고 출범한 노무현정부는 집권 초기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국가균형발전, 행정수도 이전 등 대형 의제를 내놓았다. 그러나 국책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문가와 지식인 들은 파당적으로 분열했고 국가비전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력은 실종되었다. 현정부가 조급하게 추진한 한미FTA는 집권세력의 휘황한 말들이 모순에 찬 철학에 기초한 것임이 분명히 드러난 사례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의 전문성이라는 것도 기실 부박하기 짝이 없다는 문제점도 노출됐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닌데, 도시설계가이자 건축가인 김석철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된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새만금문제에 대해 환경도 살리고 지역도 살리자는 대안을 내놓았고(「상생의 프로젝트, 새만금-금강유역」,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지역균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쉽게 굴하지 않고 행정수도 이전을 비판했다. 『창작과비평』에서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공학적 현실성으로 한반도문제를 탐구하고 있는 그와 우리 사회의 갈 길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李日榮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경제학. 계간『창작과비평』편집위원.

李日榮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경제학.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이일영 올해 2007년은 6월항쟁 20주년, 97년 외환위기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년, 20년 전에 벌어진 두차례의 큰 사회경제적 격동으로 한국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더이상 과거의 씨스템으로는 사회가 잘 작동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새로운 체제는 어떠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텐데, 이에 대해서 최근 사람들의 의구심이나 갈망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87년체제’의 한계에 대한 논의에서는 소위 민주파정부들이 들어섰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불만이 핵심입니다. 사회과학자들도 이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축과 도시설계에서 일가를 이루셨고 국토·국가전략 분야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신 선생님께 한국사회의 현안과 전망을 여쭙고 싶습니다.

먼저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어느 자리에선가 건축은 쉰이 넘어서야 알고 도시는 예순이 넘어서야 안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 건축은 무엇이고 도시는 무엇인지, 또 어떻게 이런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金錫澈 도시설계가, 건축가. 명지대 건축대학 학장, 아키반 건축도시연구원 대표.

金錫澈
도시설계가, 건축가. 명지대 건축대학 학장, 아키반 건축도시연구원 대표.

김석철 지식인이나 전문가라고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온 역사는 잘 알 것 같지만, 자기 주변의 상황에 갇혀 제대로 모르는 경우도 많지요. 1972년 관악산에서 밤을 새우며 과천에서 봉천동입구 낙성대까지를 대학도시화하는 서울대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한다고 해서 보고하려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10월유신이 터진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도시라는 건 역사나 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건축가로서 무력감도 들었고요. 도시는 역사에 참여한다, 더 많은 가능성에 관여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시설계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말해볼까요? 도시설계란 캔버스를 만드는 거고 건축설계는 그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물론 그처럼 단순하게 구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도시설계는 역사와 사회에 좀더 깊이 참여하는 일이지요. 이런 예는 어떨까요. 삐까소(P. Picasso)가 「게르니까」를 그린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한 참여였어요. 그런데 마띠스(E. Matisse)는 1·2차대전 시기에 살면서도 전쟁이 났다는 걸 겨우 아는 정도였지요. 도시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마치 「게르니까」를 그렸던 삐까소처럼요. 그러나 분노가 아니라 이성으로, 대안으로 참여하는 것이죠. 반면 건축가는 마띠스처럼 자기를 표현해도 역사에 남을 수 있죠.

 

한국건축사의 두 거목과 맺은 인연

 

건축가로서 김석철의 출발은 김중업(金重業, 1922~88), 김수근(金壽根, 1931~86) 사무실에서 6년간 일한 경험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평양 출신의 김중업, 청진 출신의 김수근은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이 두 사람과 김석철의 관계는 한국건축사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일영 10월유신이 인생에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전에 선생님께서 건축가로 명성을 얻게 된 이력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김중업, 김수근 선생님들과 함께 일도 하시고 배우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도 좀 들려주시죠.

김석철 그게 제가 평생 헤맨 원인이었죠.(웃음) 대학교 3학년 때 학교에 도저히 못 있겠어서 외국에 나가려고 했어요. 그러다 두 선생님께 갔는데, 어느 분에게 가야 할지 한참 고민했죠. 먼저 김중업 선생한테 가서 한 3년 일하고 입대를 했다가 사정이 있어서 돌아왔어요. 그다음에 김수근 선생 사무실로 가서 또 3년 있었습니다. 두가지는 전혀 다른 체험이었어요. 그렇게 두 선생님 사무실에 다 있어본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이일영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 게 가능합니까?(웃음)

김석철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죠. 그런데 김중업 사무실에서는 건축만 했고, 김수근 사무실에서는 도시설계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했을지도 모르죠. 그러기로 하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요. 김중업 선생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해방후에는 서울대 교수를 하다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라는 20세기 최고의 건축·도시설계가 사무실에서 일하다 온 분이고, 김수근 선생은 서울대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공부는 거의 안하고 전후 일본의 부흥기에 탕게 켄조오(丹下健三)라는 또다른 세계적인 건축·도시설계가를 사숙했던 분입니다. 두분의 체험이 달랐죠.

저는 두분 다 어떤 의미에서는 식민지적이라 생각했어요. 건축이나 도시는 모두 토지와 문명에 깊이 구속되는데, 그것에 대한 이해는 해외에서 공부한다고 얻어지지 않거든요. 나의 DNA가 여기에서 만들어졌다는 토지와 문명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에요. 그런데 두분께 배울 때, 그분들은 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은연중에 유럽이나 일본의 앞섬에 대해서 얘기하시는 적이 많았지요. 그 가운데 저는 납득하기 어려운 게 더러 있었어요. 저는 한학과 한국학 공부를 했고, 대학교에 들어갈 때 한국철학사를 쓰겠다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분들도 다 알지는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6년쯤 지나자 독립을 해야겠다, 두분 밑에 계속 있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일영 저는 문외한이지만 두분의 대표작 중 아주 뛰어난 작품도 있고 논란이 될 만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프랑스대사관이나 공간사옥 같은 것은 매우 훌륭한 건축물이라고 평가받지요. 또한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나 성격을 규정한 것으로 삼일빌딩이나 세운상가 등이 꼽히고요. 선생님께서는 두분의 작품을 어떻게 보시나요?

김석철 프랑스대사관은 제가 건축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일부러 찾아가봤습니다. 그때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건축은 할 만한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공간사옥은 초기단계 스케치에 참여했고요. 둘다 건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축은 문명의 연속선상에서 봐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민족적 DNA라든지 토지가 가지고 있는 무엇, 저는 그걸 중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두 작품을 보면 좀 다른 생각도 듭니다. 건물이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을 어떻게 끌고 가는가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외래 수용으로 시작된 건축물들은, 주변을 초라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론 그런 느낌을 줍니다. 너무 잘나서 주변을 초라하게 하는, 주변이 다 내 거다 하고 멋대로 끌고 가는,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집만으로는 좋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것이 세워졌다고 주변이 더 좋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는 얘기지요.

이일영 저희 또래의 청소년기에는 종로나 광화문 일대에 얽힌 추억이 많습니다. 그때 탑골공원 앞에 우뚝 서 있는 세운상가가 어딘지 부조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석철 세운상가는 김수근 선생도 부정했던 집입니다. 건축은 다른 분야와는 달리 공동작업이니까 프로젝트가 맘에 안 들면 건축가가 중간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물론 책임은 져야 되지만 일의 과정에서는 왕왕 그럽니다.

이일영 그러면 세운상가는 김수근 선생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되겠네요?

김석철 그럴 수도 있죠. 그분이 책임져야 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김석철의 건축관은 르 꼬르뷔지에의 말처럼 ‘집은 거주를 위한 기계’라는 식은 아니다. 김석철은 자신의 책에서 콘크리트와 자동차로 가득 찬 20세기 도시를 지속불가능한 문명이라고 하면서, 대안으로 ‘디지털 철강도시’ ‘건축과 도시가 일체화된 철골의 스페이스매트릭스’를 제시한다. 또 여러 건축물에서 표현해낸 한옥풍은 소쇄원에서 보이는 조선 선비의 자연주의를 느끼게도 해준다. 이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었다. 선배 세대의 모더니즘을 추종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감동적인데, 건축가에서 도시설계가, 국토전략가로 진화할 수 있었던 동력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화제를 돌려 그를 본격적으로 세상과 대화하게 만든 국토전략의 골격을 이야기해보자.

 

이일영 제가 이 인터뷰를 맡게 된 것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모델을 탐색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국가 안에서 씨스템이 완결된다기보다는 외부의 영향이 상당히 크고 또 지리적인 위치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공간문제가 매우 중요하지요. 그런데 학계에서는 시간의 문제, 즉 경제발전이나 체제이행의 문제 등이 주로 고려되지 공간문제는 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경제학에서도 공간문제를 다룬 연구가 드물고, 대개 공간요소는 뛰어넘을 수 있으므로 배제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러다가 선생님의 저서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창비 2005)를 읽고 많은 자극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굳이 경제학자의 눈으로 잘라서 본다면, 가장 아래의 원소적인 차원에 도농복합체라는 요소가 있고, 중위에는 국토의 균형개발이라는 개념이 있고, 그보다 더 넓은 상위개념으로 황해연합이나 동북아공동체 등이 제시됩니다. 그런데 책 제목은 ‘한반도 프로젝트’인데, 국토균형발전과 황해연합 사이에 한반도 차원이라는 요소가 썩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출간 직후 이 책에 대해서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얼마간 시간이 지난 지금 선생님 본인께서는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리고 새롭게 추가된 아이디어는 없으신가요?

 

한반도 공간의 재구성을 위한 프로젝트

 

김석철 한반도라는 차원을 전제로 한 계획과 작업 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는데, 그 기록들이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살려놔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특히 한강 마스터플랜 같은 것은 중요한 제안이었고, 실제로 여의도 개발로 일부 실행됐습니다. 서울대 대학도시안은 이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