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한민국의 오늘, 내일의 코리아
새만금의 미래를 여는 새로운 시각
김석철 金錫澈
건축가, 도시설계가. 아키반(ARCHIBAN)건축도시연구원 대표. 명지대학교 건축대학장. 주요 작품으로 예술의 전당, 베네찌아 비엔날레 한국관, 한국예술종합학교, SBS 탄현스튜디오, 제주영화박물관, 해인사 신불교단지, 뻬이징 경제개발특구 주거단지, 쿠웨이트 자하라 주거단지, 여의도 마스터플랜 등이 있음. RTV 특집씨리즈 ‘새만금, 대안은 있다’에 주도적으로 참여. archiban@kornet.net
* 다이어그램과 도면은 12월 2일 서울에서 열릴 “새만금수상도시 국제심포지엄”(International Symposium THE SAEMANGEUM AQUAPOLIS)을 위한 자료여서 영문 표기를 사용했음을 밝힌다. -필자
머리말
새만금 사업은 군산항과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와 변산반도를 33km의 방조제(防潮堤)로 이어 바다와 갯벌을 4만ha에 달하는 농토와 담수호로 만들고자 지난 12년 동안 공사를 진행해온 사상 최대의 간척사업이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발의되고 1991년 김대중 당시 야당총재의 강력한 요구로 착공되었으나 정부 부처에서조차 회의적 시각이 많았다. 1997년 환경단체가 반대운동을 시작하고 1999년 외국의 환경단체들까지 나서자 정부가 공사를 잠시 중단한 채 일년여에 걸친 민·관 공동조사단의 검토를 바탕으로 타당성을 재검토하였으나 2001년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여 현재 공사가 진행중이다.

1992년 새만금 상황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공사는 강행되었고 방조제는 완공 직전이다. 새만금에 대한 논란은 원론적 단계를 이미 지났다. 새만금 사업의 문제는 “바다와 갯벌을 농토와 담수호로 만드는 것이 옳으냐 혹은 그르냐”가 아니라 “더 큰 가능성의 새로운 대안은 없겠느냐”에 있다. 새만금의 가능성을 33km에 이르는 방조제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이 싯점에서 논하는 것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새만금의 규모와 현재 진행중인 공정, 그리고 방조제가 완공되었을 때 예상되는 환경재앙과 경제적 손실 등으로 보아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새만금 사업의 문제는 호남평야와 거의 같은 크기인 4만ha의 규모에 있고 새만금의 가능성도 거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일년의 반은 베네찌아(베니스)와 뉴욕 맨해턴에서, 반은 서울에서 일하면서 새만금 논의를 지켜보았다. 정작 새만금 문제에서 국토계획과 도시설계를 하는 전문가들은 방관하고 자연과 환경을 걱정하는 지식인들만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자료를 모아 베네찌아건축대학과 컬럼비아건축도시대학원의 교수들과 토론을 가졌다. 마침 『아쿠아폴리스』(Aquapolis)라는 학술지의 객원편집인으로 일할 기회가 있어 새만금과 거의 같은 크기인 베네찌아의 라구나(Laguna, 안바다)와 새만금을 비교해볼 수 있었고 1999년 12월 동북아시아의 수상도시공동체에 대한 국제회의를 국제수상도시연구소와 함께 주관하면서 새만금에 대한 대안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2001년 새만금의 상황
새만금을 안에서 보면 바다와 갯벌만 보인다. 아니면 내륙 쪽의 농토나 공업단지만 생각난다. 우선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새만금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새만금을 새만금만으로 보아서는 새만금의 미래를 알 수 없다. 새만금의 미래를 여는 키워드(keyword)는 새만금 바깥 더 큰 세계에 있다. 황해안 도시공동체, 서해안 ‘어번 클러스터’(urban cluster, 都市集積)라는 새만금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세계 속에서 새만금의 역할을 찾아야 하고 새만금이 호남평야와 이루어야 할 도시연합과 4만ha의 석호(潟湖) 안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쌓은 방조제를 활용하면서 바다를 완전히 막지 않고 새로운 도시설계를 함으로써 농토와 담수호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의 세계를 새만금에서 이룰 수 있음을 이 글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새만금의 미래를 여는 다섯 키워드
(1) 황해: 해안도시공동체
바다는 천혜의 인프라다. 천혜의 인프라인 바다를 중심으로 해안도시공동체가 생긴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쎄이아』의 세계는 바다도시들의 세계였고 발틱해는 바이킹의 해안도시공동체였다. 플라톤이 말하던, 연못을 중심으로 모든 삶이 이루어지는 개구리와 연못의 관계 같은 것이 해안공동체의 모습이다.
동북아시아에서도 고대와 중세에는 내륙보다 바다를 통한 교역이 더 많았고 주된 교역로는 황해안 해안도시를 연결하는 해로였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해로를 통한 문명의 교류가 빈번했으며 해상국가로 시작한 고려시대에는 중국대륙과 바다를 통한 교역이 육로보다 더 빈번했다. 몽골제국이 중국 전역을 점령하고 뻬이징(北京)을 통일중국의 수도로 정한 이후 한반도와 중국의 교역로는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해안을 봉쇄하고 한국과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게 되면서 황해는 닫힌 바다가 되고 해안도시는 소멸하고 말았다. 중국 해안에는 오직 닝뽀(寧波)만이 유일한 국제항이었고 한반도에는 국제항이 없었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이 바다를 넘어 세계로 나간 데 비해 동양 3국은 바다를 닫고 근 500년 동안 쇄국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황해는 더욱 철저히 닫힌 바다가 되었다. 중국 해안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한반도 서해안 역시 금지구역이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1978년 개방과 개혁을 시작한 곳이 해안도시였다. 개방과 개혁 이후 중국 내륙보다 중국 해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그 물결이 황해도시공동체를 다시 살아나게 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아시아국가간 무역이 동서양간 무역보다 많아지면서 황해가 유럽공동체 못지않은 경제적 파워를 가진 동북아시아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황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한 곳이다. 3억 5천만의 인구가 이루는 경제적 파워는 해마다 10%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어 황해안의 도시간 교역을 갈수록 증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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