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미경 鄭美景

1960년 경남 마산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내 아들의 연인』 『프랑스식 세탁소』, 장편 『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아프리카의 별』 등이 있음. mkjung301@hanmail.net

 

 

 

새벽까지 희미하게

 

 

“이거 나만 그런가? 눈꺼풀 안에서 정전기가 일어나.”

정이 인공눈물을 정성껏 떨어뜨리고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직업병이지. 내 피부는 뱀 껍데기 같아. 첫날밤이 걱정이야.”

그래픽 화면을 손질하며 천연덕스럽게 받는 오는 유부녀다. 직업병 맞다. 일본 출장이라도 다녀올 때면 면세점에서 안약을 한다스씩 사들고 와서 나눠주어야 했다. 누구는 눈 안에 미세한 모래알갱이가 구르는 것 같다며 이물감을 호소했다. 겨울이면 머리카락이 올올이 서 있기도 했다. 가습기도 소용없었다. 컴퓨터 때문이라는 오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지. 한사람 앞에 모니터가 서너대씩 놓여 있으니.

“그래도 입이 건조한 것보단 낫지 않을까. 침이 안 나오면 맛을 모른대.”

유석의 농담을 무시하고 정이 제 모니터를 가리켰다. 실장님 얘 패션 어때요? 새로 출시할 게임 캐릭터일 것이다. 유석은 이제 개발 쪽 실무는 손을 놨다. 그래도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강주 형이 언제 전화를 해서 무얼 질문할지 알 수 없으니까. 무기의 살상력은 매번 업그레이드되지만 여주인공은 좀체 상투적인 전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9등신 몸매에 노출 패션. 화면에 보이는 금속제 속옷 역시 대동소이.

“이거 원조는 마돈나잖아. 저작권료나 내고 있나 몰라.”

“저희가 그런 얘기 할 입장은 아니잖아요. 스토리다 캐릭터다 뭐 아웃소싱 안하는 게 없는데. 저희도 뇌즙을 짜고 있어요. 획기적인 아이디어 있으면 실장님부터 까보세요.”

“치마도 거기서 더 짧아질 데가 없고…… 녹색당 성향의 여주인공은 어떨까?”

“녹색당? 포인트를 어떻게 잡으면 되는데요?”

정이 코를 살짝 찌푸리며 묻는다.

“포인트랄 게 있겠어. 패션의 일종이지. 안구 정화용 관엽 화분이나 하나 들려주고.”

“여자들은 뭣도 모르면서 이데올로기를 액세서리로 걸친다, 그거죠?”

얘가 또 그날인가. 한달이 빠르기도 하네. 문화 쪽 일하는 것들은 윗사람 존경할 줄을 통 몰라. 자리로 돌아와 유석도 고개를 젖히고 인공눈물 몇방울을 눈에 떨어뜨렸다. 쾌감이 한기처럼 퍼지다 이내 사라진다. 큰 제목만 훑어보며 신문을 슬슬 넘기던 유석의 손이 멈추었다.

송이.

그 송이인가. 맞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꾹 감았다 떠본 건 신문 지면과 이 낯익은 얼굴이 너무 멀고 느닷없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쿡마운틴 협곡에 사는 돌고래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송이는 유독 먼 곳의 얘기, 먼 데 사는 사람 얘기를 곧잘 했었다.

 

……북극 만년설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은 화가 나거나 슬픔에 사로잡히면 그냥 눈밭 위를 걷는대요. 무작정 계속. 걷고 또 걷다가 마음이 다시 사그라들면 그 자리에 긴 막대를 하나 꽂아놓고 돌아온대요. 다음에 가면 그 막대들이 어떤 마음의 깃발인지 기억 안 날 것 같지 않아요?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은근 화려한 속옷을 입는다데요. 무뚝뚝하게 생긴 남자들도 놀랍도록 명랑한 색깔의 속옷을 입는대요. 일년의 절반이 밤이라면 그럴 것 같긴 해요. ……더블린 거리에 있는 아파트들은 현관문 색깔이 다 다르대요. 술꾼 남편들이 밤늦게 들어올 때 헷갈리지 말라고 그렇게 칠했다는데, 더 헷갈릴 것 같지 않아요? 뉴질랜드의 협만 얘기를 한 적도 있었다. 뉴질랜드는 새로운 네덜란드라는 뜻이래요.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딴 쿡마운틴 협곡엔 일흔여섯마리의 돌고래가 살고 있대요. 그곳엔 오억년 동안 진화하지 않은 먹장어가 놀러다니고 백년에 일 센티미터 자라는 산호 가지에 물뱀이 노끈처럼 친친 감겨 있는데, 하여튼 그 돌고래 울음소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우주로 보낸 타임머신에 그걸 실어 보냈대요. 사무실에서 송이가 그런 얘길 하면 유석은 퉁이나 주었다. 『먼나라 이웃나라』야? 가서 세어봤어? 일흔여섯마린지, 열여섯마린지……

 

납기에 쫓겨 며칠째 야근을 하는 중에 G1은 사후경직 상태의 피자를 콜라 속 탄산의 힘으로 분쇄하고 있고 G2는 어떻게든 오늘은 퇴근해보겠다는 각오로 라이트박스 위에 코를 박고 있고 G3은 마우스를 움켜쥐고 천진난만한 토막잠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송이가 툭 던지는 그 시공초월 대사가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뜬금없는 얘길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엉킨 마음이 빗질이 되더라는 Q1의 말은 좀 오버라고 생각했지만 그 얘기들을 깨알같이 써먹은 건 사실이다. 다단계업체의 교육용 영상, 여름성경학교 교재, 인터넷업체들의 스팟 영상에 그 이미지들을 약간 손보아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 특별할 것 없는 얘기들은 더이상 송이의 모습을 볼 일이 없어진 후에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오르곤 했다. 시간이 한동안 흐른 후에야 글자가 하나씩 떠올라 문장을 이루는, 어떤 특수용액으로 쓴 편지와 비슷하달까.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린 팬티』. 유럽의 어느 아동도서전에서 큰 상을 받았다는 이 그림책은 송이의 책으로는 벌써 세번째란다. 송이는 그사이 그림책 작가가 되어 있었다. 몰랐다. 기사가 난 적도 없었고 유석이 아동서적 코너에 갈 일도 없었으니까.

 

봄소풍을 간 토끼가 찬 음료를 너무 먹어 배탈이 났다. 그만 팬티에 똥을 지리게 되어 당황한 나머지 몰래 산모퉁이를 돌아 팬티를 벗어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입구 미루나무 꼭대기에 제 똥 묻은 팬티가 걸려 나부끼는 걸 보게 된 토끼는 사색이 되고…… 그걸 남몰래 수거하기 위한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토끼는 팬티가 인도하는 낯선 곳으로 멀고도 눈물겨운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토끼는……

 

간략한 소개 끝에 기자는 이렇게 써놓았다.

 

줄거리만 보면 화장실 유머인데 이 책 묘하게 따뜻하고 대책 없이 웃긴다. 옆에 두고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할 때면 한번씩 펼쳐보고 싶어지는 중독성 주의. 무엇보다 토끼와 함께 그 길을 같이 가고 싶게 만드는 책. 토끼는 그 부끄러운 팬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박스기사 가운데 실린 사진은 제법 큼지막했으나 작업실 풍경 전체를 담느라 그랬는지 송이 얼굴은 엄지손톱만 했다. 가무잡잡한 피부, 쌍꺼풀이 뚜렷한 눈, 높은 이마 때문에 수줍음 타는 인도소년 같았던 얼굴은 선이 살짝 무뎌지긴 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책 작가라니. 내 밑에 있은 덕을 뒤늦게 보네. 쌍꺼풀 아래 크고 까맣던 눈동자 역시 기억났다. 맨 처음 마주쳤을 때 그 눈동자는 차오른 물기 너머로 유석을 바라봤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은 유석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뭐라 했더라.

언니. 내가 여기 사장이야. 정수기 오더 내린 적 없어. 수돗물 먹어도 안 죽어. 아리수가 시판 생수보다 깨끗하단 논문도 못 봤어?

그러고 보니 칠년쯤 전의 일이다. 흘러가버린 시간에 비해서는 기억이 꽤나 또렷했다. 어쨌든 지금보단 젊었으니까.

그렁한 눈물을 보자 문득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백 미터도 넘는 골목길을 이걸 들고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아침에 출근한 Q1 Q2 할 것 없이 다들 웅덩이에서 막 걸어나온 오리새끼들같이 머리카락이 함초롬히 들러붙어서는 아우성이었다. 구두 속까지 다 젖었어요. 머리에서 쉰내 나요. 눈오고 빙판 되면 여길 어떻게 걸어다녀요. 사무실 재계약일이 돌아오자 당장 임대료를 십 프로나 올려달라는 건물주 보란 듯 방을 빼 이쪽으로 옮길 때는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큰길에서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 임대료는 오십만원 차이가 났다. 둘러보러 왔던 날 비가 왔더라면 절대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화구처럼 팬 길을 걸어들어오느라 유석의 바지 뒷자락도 종아리에 척하니 들러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에헤이 언니, 눈물로 밀어붙이면 안되지. 세일즈 하면서 눈물이라니. 최악이다, 최악. 유석이 눙치는 순간 눈물은 범람을 시작했다. 그때 유석의 뒤에 붙어서서 무어라무어라 속삭인 게 누구였더라. 어제 이삿짐 나르느라 정신이 없는데…… 사장님은 안 나오셨잖아요. 한참 옮기다보니 이분이 저희 짐을 같이 옮기고 있더라고요. 먼지구덩이에서 짐 다 풀고 그랬는데. 말이 이층이지 백번 넘게 오르내리다보니 다리가 진짜…… 우리 맘대로 결정 못한다 했는데 그래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짐 다 올려놓고 커피라도 끓여마시려고 물을 트니까 녹물이 나와요. 건물이 너무 낡아서 그런지 아무리 틀어놔도 계속 녹물이…… 생수 사먹는 값이면 렌트할 수 있다 해서…… 오늘부터 당장 급할 것 같아 들고 오셨다고. 세상에, 이게 이십 킬로는 되는 거 같고. 우산 겸 이고 오셨다는데 참 안된다고 그러기도…… 이미 필터도 젖어버려서…… 사실 저희도 설치할 마음은 없었어요. 유석은 명색이 스토리 담당하는 애가 앞뒤 안 맞는 말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는 데 열이 솟구쳤고 필터가 이미 젖었다는 말에 더럭 역정이 났다.

언니 사정은 딱한데 도로 가져가요. 언제부터 정수기야.

렌트비 삼만사천원 못 낼 지경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늙은 여우 셋이 사장 알기를 얼마나 우습게 알면 저희들 마음대로 이런단 말인가 싶었다. 범람하는 눈물보다 더 곤란했던 건 버벅거리며 항의를 하는 젖은 목소리였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러시면 안되죠. 사무실에 재고가 없어서 본사 가서 받아오는 길인데. 이거 들고 지하철 두번 갈아타고 왔고요. 포장 뜯은 필터는 반품도 안되고…… 뺨이 다 젖어 울먹이는데 유석의 짜증지수는 급상승을 했다. 에헤이 못한다니까 그러네. Q2가 심 박힌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벼룩의 간을 내먹지. 유석도 지지 않았다. 벼룩의 간이 별미이긴 하지. 팩하는 성격이 있는 Q1이 분연히 외쳤다.

됐어요. 언니. 그냥 설치해놓고 가요. 우리 셋이 한달에 만원씩 부담할게요.

그 말에 Q2Q3이 확연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Q1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물을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하는 표정. 유석은 좀 당황했다. 그것마저 안된다 할 수도, 기다렸다는 듯 그럼 그래라 할 수도 없었다.

에헤이, 언니. 남의 사무실 이전한 날 화환은 못 보낼망정 눈물바람은 아니지. 고만 울어요. 그거 하나 팔아서 몇푼 남아. 정수기도 다 대기업들이 쥐고 있는데 인지도도 없는 그런 걸 누가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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