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생명의 관측소와 새로운 노동시

 

 

김영희 金怜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온한 미(美)와 다른 현실: 정한아 김성규 서대경의 시」 「페미니즘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여성주의 언어와 감성적 혁명의 모색」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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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난 자본주의와 다른 현실

 

재난 상황에서 사회의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재난 자본주의’의 작동은 누가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인지를 보여주었다. 방역 시스템을 가동하며 우리 모두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배 안의 공간이 차별과 배제의 구조로 구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콜센터 노동자, 택배 노동자를 포함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전히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존재는 바이러스 방역과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 간의 사회적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1

노동과 위험의 조건이 비단 재난 상황에서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 공식 집계에 의하면 2019년에는 2,020명이, 2018년에는 2,142명이 산업재해로 생을 마감했다.2 산업화 이후 수십년째 지속되고 있는 이 죽음들은 한 작가가 쓴 것처럼 “한 개별적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나락으로 밀려 넣어지는 익명의 흐름처럼 보”인다. 그러니 “제도화된 약육강식이 아니라면, 이처럼 단순하고 원시적이며 동일한 유형의 사고에 의한 떼죽음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고 방치되고 외면될 수는 없다”3라는 문장에는 어떠한 과장도 없다. 현대의 노동자는 고전적인 의미의 소외가 아니라, 바이러스 감염과 산업재해를 포함하여, 건강과 안전 혹은 깨끗한 공기와 수도의 공급과 같은 ‘삶의 물질적 조건들’에서 소외되고 있다. 맑스주의적 의미의 생산관계가 아니라 “삶의 물질적 조건들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착취당”하는 것이다.4

차별과 야만성의 시대일수록 다른 삶의 기획과 새로운 사회의 고안을 역설하는 목소리는 넘친다. 하지만 상품과 마케팅 사회에서 개인의 삶의 모습과 욕망은 점점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교환될 때의 능력과 값어치가 개인의 고유한 경험과 개별적인 시간이 지닌 가치를 대신한다. “이 풍요가 너절한 세상에/각자 다르게 사는 것이 패션인 시절에/어쩌면 생각이 이처럼 같은지”(백무산 「교환가치」,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2020)5, 사람들은 대체로 유사한 성공 모델을 지닌 채, 다만 평균적인 삶에 안착하기 위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창조성이 중요한 가치로 추구되기는 하지만 정작 드러나는 것은 “새로운 창조성”이 아니라 “새로운 상투성”이다.6

이를테면 “죄 없는 자들일수록 더 많이 참회하고/적게 먹는 자들이 더 많이 감사하고/(…)/적게 살생한 자들이 더 많이 속죄한다는” 히말라야에서의 깨달음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하고, 경쟁과 중독의 도시에서 감사와 참회의 문화는 세련된 교양이자 종교가 된다. 동시에 “많이 먹고 많이 가질수록 죄가 줄어든다는,”(「히말라야에서」) 혁명할 것이 없어진 시대의 진리는 은폐되고, 히말라야의 깨달음은 여행 상품으로 전환된다. “거액의 자산가가 방송에 나와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대해/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좀 살 만한 작가’가 “무소유의 청빈함을 제대로 글로” 썼을 때, 욕망과 물화의 도시에서 무소유와 가난의 가치는 현대의 도덕이자 양심이 된다. 이때에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이고 “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무무소유」) 없다는 진짜 현실의 얼굴은 공포스럽게 다가올 것이며, 한편에선 무소유가 마케팅 전략에 활용될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이미 낡은 문화이며 새로움을 가장한 상투성이다.

켄 로치(Ken Loach)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는 “무엇에 저항하는지 아는 건 쉽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건 어렵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백무산은 한 인터뷰에서 이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폭력에 대하여, 즉 ‘어떤 현실에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현재의 착취 구조와 자본의 시간 이후에, ‘어떤 현실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고민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동시에는 ‘부정해야 할 현실’이 담겨 있지만, ‘이것이어야 하는 현실’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지는 않았다는7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이같은 사유는, 불평등 재현이 갖는 문제적 지점들을 짚으며,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있는 현실’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배태하고 있는 현실’(백낙청)로 다시 생각하자는 황정아의 논의와 연결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눈앞의 “불평등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관념에 맞서서 공동영역의 존재를 모색하는 작업의 요청으로 이어지는데,8 백무산이 문학의 고유한 기능을 “공동체의 이상과 공통성”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에서 찾고 있는 것9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 1996) 이후 백무산의 시를 인간주의, 생태주의로의 전환으로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백무산 시의 시간과 육체는 자본의 시간 ‘바깥’의 인간과 생명에 대해서, 부재하는 현실, 곧 새로운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제로베이스’에서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백무산의 시를 통해, ‘자본의 시간에 포획된’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과 ‘자본의 시간 이후의’ 현실을 발견하고 감각하는 시의 모험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저항의 시와 저항 이후의 시, 새로운 노동시의 가능성을 최근에 발표된 신인들의 시를 통해서 타진해보고자 한다.

 

 

2. 죽음의 무의미와 생명의 감수성

 

백무산은 시란 “나 자신을 통해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신이란 시인이 겪어낸 “당대의 경험”과 그 경험을 통과한 시인의 “세계의식”으로 구성될 것이다.10 시인은 당대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의식을 통해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시의 언어로 씌어지기 이전에 시인의 몸이 이미 감각하고 있는 경험과 (무)의식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신체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옮겨 적는다. 그러므로 전지구적 생태위기 혹은 재난 자본주의의 증상 앞에서 시인의 몸이 무엇을 감지하고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11

 

천마리 악어를 사육하는 우리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여인이 있다는 것이다

먼 나라에서의 그 일은 끔찍하지만

이 지구 위에서 가난한 자들의 삶에 대한

그저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구덩이 세상을 피해 악어의 아가리로 피신한 것인지

고깃덩어리밖에 안 될 무의미를

악의 없는 저들에게 그저 던져준 것인지

나의 상상도 역시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이 나라에서만 매일

마흔명이나 걸어들어가는 그곳에 대한

—「평범한 일상」 부분

 

사람들은 “천마리 악어를 사육하는 우리에/제 발로 걸어들어간 여인”의 이야기를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