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 제14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생의 우울을 지탱하는 ‘지옥의 눈’

 

박창범 朴昌範

1971년 강원도 철원 출생. 한양대 국어교육학과 석사과정 수료. arasaro@naver.com

 

 

1. 아비를 욕보이는 두 풍경

 

병든 아비가 방 저편에 있다. 아들은 집을 나갔고 어미는 죽은 지 오래다. 노처녀 딸(‘나’)은 자신의 방에서, 불행하게 죽은 어미의 유품을 뒤적이다 아비의 기척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러고는 이내 자위를 시작한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익히 알려진 「저녁의 게임」(오정희)의 결말부이다. 왜‘나’는 아비를 곁에 두고 죽은 어미(체취)를 불러들여 자위를 하는가. 아비와 나는 어미의 비참한 죽음에 연루된 자들이다. 나의 탄생은 어미의 실성을 불렀고, 그 어미를 매정하게 내친 것은 아비였다. 물론 나 또한 그 결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나’의 자위는 모든 사태의 원인이면서도 반성하지 않는 아비를 욕보이는 방식이자, 그 아비/죄의식의 세계로부터 탈주하고픈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 자위의 현장에 불러들인 그래서 필시 내려다보고 있을 어미(마침 위층에는‘여자’/어미가 아이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부르며 서성인다)에게 자신이 충분히 타락했음을, 죄의 댓가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니 속죄이고 자학이자 자기모멸이다. 이후 이 수인(囚人)의 영혼이 내달려간 곳은 어미(중산층 여성)의 세계였고, 아비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적대의 대상이었음은 대체로 동의하는 바다. 또 하나, 아무튼 자위행위 그 자체는 성공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이후 우리는 이십여년의 격차를 두고 수인의 자리를 고집하는 또다른 자아를 만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비를 욕보이고‘나’를 징벌하는 행위는 여전히 반복, 변주된다.

권여선(權汝宣)의 『푸르른 틈새』는 “성과 정치”를 알면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순진한 처자의 이야기다.1 그 처자는 한국사회의 관례적 성장코스를 따라 대학에 입학했고 거기서 성과 정치라는 두 “장애물”과 대결한다. 결과는 예상되는 바 그대로다. 사랑은 그녀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었고, 변혁의 꿈 역시 눈앞에 엄존한 적이 아닌 허약한 내면과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그녀에게 좌절을 선사했다. 아비의 권력이 장악한 “성과 정치”에 입문하는 길은 곧 상처와 절망의 과정이었다. “피에 젖은 새”의 이 찢긴 영혼은 자살로써 아비의 세계에 화답하려 한다.

그런데 자살을 감행하기 직전, 이 훼손된 영혼은 도발적 행위를 저지른다. 골방(“젖은 방”)에서 자위하기가 그것이다. 그것이 도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쾌락의 현장에 얼마 전에 죽은 실제 아비를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위를 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 쾌락은 흔적없이 사라진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클리토리스” 앞에 아비를 세우기를 쉬 멈추지 않는다. 이 불온한 상상력, 불경한 몹쓸 짓을 한사코 아비의 시선 아래 두려는 것은 극단적인 자기모멸을 실천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보호자이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면전에서 타락한 자신의 실존을, 치욕과 수치를 드러내는 것보다 더한 모멸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물론 이같은 행위는 “최대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신의 자살을 정당화하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니 위악이다. 또한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그‘파랑새 신화’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내보임으로써 자신에게 집중됐던 책임과 기대의 하중을 벗어던지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가 애타게 기다리는 절정의 순간은 끝내 오지 않는다. 자위는 실패한다. 충분히 위악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악을 실천하기에는 천성적으로 모질지 못한 탓이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이 피투성이의 영혼, 기본적으로 충분히 독하지 못해 자살도 자위도 성공하지 못했던, 그리하여 끝내 아비(의 세계)를 외면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자의 후일담이다. 오정희의 광기와‘엽기’(김윤식)가 주로 사회와의 교섭을 차단한 채 가부장이라는 자장 내에서 폭발적 위력을 드러낸 것과 달리 권여선의 히스테리적 발작과 파괴적 에너지는 그 틀 너머에서 발현되고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권여선 소설이 오정희의 소설, 그리고‘집 나가는 여자들’(김형중)을 앞세웠던 90년대 이후 일군의 여성소설들과 갈라지는 대목도 바로 여기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물음의 좌표를 서성여야 한다. 결국 아비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던 이 여리나 곤두선 정신은 어떤 여로를 펼쳐내고 있는가. 세계에 대한 낭만적 신화와 호기심이 사라졌을 때 무엇을 지켜보고 어떻게 삶을 견디는가.

 

 

2. 사랑, 불가능하거나 불구적이거나

 

우리는 권여선 소설에서 엇갈리고 실패한 혹은 불가능한 사랑의 서사와 빈번하게 조우한다. 사랑의 대상은 기억 속에서나 겨우 존재하고(「내 정원의 붉은 열매」) 연애가 제공하기 마련인 “달고 격한 느낌”은 꿈속에서나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위험한 산책」). 또한 두 남녀의 욕망의 행로는 필시 엇갈리거나(「사랑을 믿다」 「처녀치마」) 너무 늦게, 그러니까 열정과 향기가 죄다 휘발된 뒤에나 찾아온다(「12월 31일」). 이렇듯 권여선 소설에서 사랑은 어김없이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은 불행의 얼굴로만 방문하는가. 우선 작가가 실패한 연애담에 유독 주목하는 이유를, 사랑의 실패에서 발현하기 마련인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다 성숙한 시선과 성찰을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소설외적 추정이다. 문제는 내부의 어떤 요인이 실패한 사랑을 도출하는가이다. 미리 언급하자면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사랑의 감정이 금지에 의해 작동되거나 거꾸로 좌절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랑은 불가능하거나 추억 속에서 호명, 전유될 수 있을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양태와 관계한다. 다시 말해 권여선 소설에서 사랑은 대개 죄의식에 묶여 있어 불구적이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먼저 전자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12월 31일」은 우정이라는 장벽 혹은 허울 아래서만 존속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서사이다. 소설은 마흔을 앞둔 독신남‘나’가 십년 전 그녀(민혜원)에게 전하지 못해 간직해야 했던‘종이봉투’를 매만지다 과거 추억의 현장으로 접속되는 다소 상투적인 상황으로 시작된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어느날, 대학시절 내내 짝사랑했던 그러나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인 민혜원에게서 뜻밖의 전화가 걸려온다. 학창시절‘나’는 소심한 성격 탓에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하지 못했고, 그녀는 이러한‘나’의 감정을 익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취한 “적당한 거리감 덕분”에 “각별한 우정”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녀가 설정한 간격, 아니 어쩌면 내가 지레짐작으로 그녀가 그어놓았다고 상상한 건지도 모르는 그 아슬아슬하고 지워지기 쉬운 페인트 자국을, 나는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했다. (「12월 31일」 99면)

 

졸업 후 다시 만난 이들은 그날 술을 마시고 오랜 주저와 실랑이 끝에 잠자리까지 갖게 된다. 나는 뒤늦게 “열렬한 구애”를 한 셈이고, 그녀는 더이상 외면하지 않는다. 행복한 결합을 가로막던‘간격’,‘상상의 선’이 제거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둘 사이의 우정은 사랑으로 전환될 법도 하다. 그러나 상황은 기대에 어긋난다. 여자는 가정으로 돌아가고‘나’는 붙잡지도 전화번호조차 묻지도 않는다. “아슬아슬하고 지워지기 쉬운 페인트 자국”이 걷히자 사랑은 물론 그들의 관계 전체가 파탄난 것이다. 이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고 자리를 잡은 주인공이 자신의 일상이 침해받는 것을 저어한 까닭으로도, 불륜이 제기하기 마련인 윤리와 양심의 문제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반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나’가 쎅스의 와중에 무엇과 조우했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내가 목격한 것은 “여관 창밖에서 쾅쾅 터지는 폭죽 빛에 드러난, 그녀의 턱과 목을 가르는 부자연스런 화장 선”이었다. 즉 “간격”이 사라지자 그녀에 대한‘나’의 내밀한 환상, 그 몽환적 시선도 더불어 증발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사랑의 감정 역시 휘발된다. 금지와 한데 묶여 있던 환상이 걷히면 날것 그대로의 모습(중년의 주부)이 포착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나’의 사랑을 유지시키는 것은 바로 그녀가 “설정한 간격”에 있었고, 이러한 점에서‘나’의 사랑은 단지 우정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금지의 지위는 모순적이다. 사랑을 촉발하나 사랑의 실현 혹은 완숙을 위해 금지가 제거되면 사랑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탓이다. 반면 금지와 장벽이 그 본연의 임무(장애물)로 기능하는 경우도 있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운동권 선후배간의 실패한 첫사랑을 그린다. 첫사랑을 가로막은 요인은 두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당대 공적 대의를 위해 사적인 것을 억제해야 했던 경직된 운동권의 분위기이다. 당시 대학선배라는 존재는 우선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어야 했다. 그리고 운동권이 갖추어야 할 품성

  1. 이 글에 인용한 권여선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푸르른 틈새』(살림 1996) 『처녀치마』(이룸 2004)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 2007) 「내 정원의 붉은 열매」(안찬수·정홍수·진정석 엮음 『소진의 기억』, 문학동네 2007) 「사랑을 믿다」(『한국문학』 2007년 여름호). 이하 인용할 때는 작품명과 면수만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