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나희덕

시인.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가 있음.

 

 

90년대 이후의 시들이 독자적인 지형도를 그려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생태주의와 여성성에 대한 탐구가 그 밑그림을 이루는 중요한 성과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주변적인 가치들의 복권은 그동안 거대담론에 가려진 시적 가능성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적 주체에 대한 모색을 가능케 했다.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는 이성과 남성 중심의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특히 최근 활발해지기 시작한 에코페미니즘의 이론화 작업은 두 관점이 실천적 필요에 의해 결합할 뿐 아니라 자연과 세계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시에 있어서 양자의 자각적 결합을 보여주는 예는 아직 풍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생태시가 여성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고 진정한 여성시가 대상과 언어에 대해 생태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접점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파괴와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어온 까닭도 있겠지만, 시적 언어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어떤 장르보다도 생태적이고 여성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라는 양식이 구현할 수 있는 본원적인 태도로서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의미를 천착해보는 것은 시의 현재적 역할과 존재방식에 대한 반성적 질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생태담론과 페미니즘담론의 활발한 유통과 생태시·여성시의 양적 증가가 반드시 우리 사회와 문학의 근본적인 전환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생태적’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것들의 일시적인 유행이 뿜어내는 악취가 도처에서 진동한다”1는 신랄한 비판이 생태학자인 머리 북친(Murray Bookchin)의 입에서 나올 만큼 생태주의의 번성이 또다른 역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시에 있어서도 범박한 소재주의나 새로운 유행에 편승한 문학상품이 양산되었으며, 직설적인 주장을 반복하거나 담론의 단순한 적용에 머무른 시들 또한 적지 않았다. 물론 그 당위적 요청의 긴박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 시들이 보여주는 시적 언어로서의 취약성은 부차적인 결함 이상의 문제로 여겨진다. 더욱이 ‘환경시’ ‘생명시’ ‘생태시’ 등 장르의 명칭조차 통일되어 있지 못한 실정에서 어떤 작품을 기계적으로 생태시의 범주 속에 귀속시켜버릴 경우 그 작품이 내장하고 있는 미학적 특질의 복합성은 사상(捨象)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사정은 ‘여성시’를 논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 분류나 가치평가의 기준이 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그 다양한 입장들과 전개과정을 변별하며 생태시와 여성시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지면 사정도 필자의 능력도 부족하거니와, ‘생태시’ ‘여성시’라는 이미 범주화된 장르개념보다는 ‘생태적’ ‘여성적’이라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논의를 풀어가려고 한다.

 

 

나는 이제 그 눈의 순결을 의심하네

 

‘생태적’이란 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자연이다. 생태주의는 우리에게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던 태도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며 만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라고 권유한다. 또 거대한 그물망과도 같은 자연의 순환적 질서를 되찾기 위한 실존적 노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태적 상상력과는 달리 역사적 상상력은 자연해방보다는 인간해방을 강조하고 그것이 실현될 미래의 한 싯점을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상상력과 역사적 상상력은 자연에 대한 태도가 사뭇 대조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생태계의 전면적인 위기나 세계사적 상황이 이 두 가지 상상력 모두를 위축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봄이 갱생과 부활의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현대 시인의 상징체계에 들이닥친 일대 재난”2이라는 도정일(都正一)의 진단은 현대 시인들이 겪고 있는 고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봄은 더이상 역사의 해방도 자연의 부활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리고 눈은 더이상 순결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자연은 때로 저렇듯 소나무로 퍼렇게 눈을 뒤집어 쓰고

서 있네.

나는 이제 그 눈의 순결을 의심하네.

—이하석 「소나무」 전문

 

그러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전언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직 갈 수 있다고, 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

아직도 숲속 골짜기에는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

것이다. 마을 뒷산 속에 있는

그 중 하나를 나는 황혼 무렵이면 찾는데

늘 산영이 잠겨 푸르게 물들어버린

호수 위로 우선 밀잠자리며 실잠자리들

편대 지어 날아오르고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만 열릴 것 같은

깊고 그윽하고 투명한 숲속의 호수는

물 위에서 제 몸을 잽싸게 튀기는

소금쟁이로도 잔물결 가득 일으킨다.

—고재종 「여름 다 저녁 때의 초록 호수」 부분

 

위의 두 시를 빌려 다소 거칠게 말해본다면, 오늘날의 생태시는 ‘의심’과 ‘낭만성’ 사이에 있다. 물론 시인의 관심이나 개성에 따라 다양한 층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생태에 대한 시적 관심은 대체로 이 두 경향으로 수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에서는 문명에 의해 여지없이 파괴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의심이, 다른 한편에서는 남아 있는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믿음과 낭만성이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과 낭만성의 거리를 젊은 시인들에게서 찾아보자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1. 머리 북친, 문순홍 옮김 『사회생태론의 철학』, 솔 1997, 136면.
  2. 도정일 「풀잎, 갱생, 역사」,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