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생태주의는 민족주의의 대지를 동요시킬 것인가?

권혁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 솔 2000

 

 

고미숙 高美淑

문학평론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려니와 말을 하면 천하인이 취해 쓸 수 있어야 하고, 발표하지 않으면 그만이려니와 발표하면 우내인(宇內人)이 감복할 수 있어야 한다.”(『기측체의氣測體義』) 최한기(崔漢綺)의 이 파격적인 언술은 늘 찬탄과 회오의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히 천하를 배경으로 철학을 구축하겠노라고 선언하는 그 호쾌함에 무릎을 치면서도, 한편 어째서 한국의 인문학은 근대 100년간 단 한번도 한반도라는 시공간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곧바로 뒤를 잇는 까닭이다. 그 엄청난 중력의 진원지에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대상과 영역을 불문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심층을 장악하고 있는 ‘민족’이라는 주술을 어떻게 떨쳐낼 것인가? 이른바 ‘근대 너머’를 사유하고자 하는 연구자라면 이런 화두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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