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생활의 발견

지금 여기의 리얼리즘 시인들

 

 

정우영 鄭宇泳

시인. 시집 『활에 기대다』 『살구꽃 그림자』 『집이 떠나갔다』 등이 있음.

jwychoi@hanmail.net

 

 

1. 부정처, 무중력의 시대

 

그러니까 시고 생활이고 간에 요렇게 고뿔들린 콧구멍 모냥 앞뒤 콱콱 막혀서 속 터지는 날은 이렇게 하렷다 크흠 큼큼 큰기침 몇 번 하고 가래를 돋워 카악 뱉어버리고 입가 쓰윽 소매에 문지르고 패앵 코도 풀어 쓱쓱 바람벽에 닦고는 콧굼기 발씸발씸 양볼이 쏙 들어가게 담배를 뻑뻑 피워 물고설랑 잡놈같이 쪼그려 앉아서 까마귀가 까치 떼에 쫓기는 눈발 치는 먼 논 너머 외딴집 뒤안 고욤나무 같은 거나 생각해보렷다

—송진권 「동지冬至」 부분(『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 걷는사람 2018)

 

요즘 이런 시들이 주로 눈에 들어온다. 소리 내어 읽으면 절로 흐뭇하다. 입말은 자유롭고 동원되는 사물들도 저희끼리 거침이 없다. 게다가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원초적 지형까지 펼쳐 보이고 있다. 그의 말처럼 “시고 생활이고 간에” 이처럼 당당하게 감겨야 하지 않을까. 눈에든 입에든 맘에든 착 감기는 시가 살갑게 느껴진다.

물론 감겨 오는 게 다는 아니다. 내가 이 시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우리 생활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생하고 능청스러운 입말도 흥미롭지만 더욱 큰 울림을 전하는 것은 사내와 “까마귀” “까치” 그리고 “외딴집 뒤안 고욤나무”가 빚어내는 교감이다. 나는 이들의 오묘한 친소(親疏)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본모습을 본다.

시는 이처럼 삶과 엮여야 하지 않을까. 최근 우리는 삶을 나날의 일상으로 치환하고 산다. 물상들과 서로를 나누고 섞이면서 이뤄가는 우리의 생활은 저만치 멀어졌다. 그러다보니 현실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한 마음과 몸은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다닌다. 그야말로 부정처(不定處), 무중력의 시대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만나게 되는 생활 속 시인들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나는 그 고마운 시인들과 함께 ‘지금 여기의 시숲’에 들어, 만지고 냄새 맡고 숨 쉬어볼 참이다. ‘나’와 ‘너’, ‘우리’의 연대를 자신의 시작(詩作)에 착실히도 심어놓은 시인들이다.

 

 

2. 범상한 생활의 흥감한 상생

 

냉정하게 나는 인정해야 한다. 내가 실감하는 시들이 더이상 시의 대세가 아님을. 나와 함께 시공간을 활발히 넘나들던 시인들은 이제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우리 시대 삶의 연대기를 받아 적던 치열한 시선들은 슬슬 저물어가는 것처럼 비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여전히 ‘시를 사는’ 시인들이 있다. 생활의 중심에 시가 놓여 있고 하루의 마감과 함께 시도 저문다. 이 시인들에게 하루는 생활이자, 숱한 문학적 기척들의 집합이다. 생활에서 묻어난 아주 사소한 장면들조차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소중한 영상으로 각인된다. 이렇게 기록된 그의 삶은 당연하게도 동시대의 우리를 어루만진다. 나의 삶이면서 동시에 너의 삶인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면모를 이명윤, 박승민, 송진권, 문동만의 시작에서 뚜렷이 확인한다. 그 실제를 실감해보기 위해 맨 처음 시숲에 초대한 시인은 이명윤이다.

 

이명윤: 지역에서 발화하는 범상의 비범

이명윤은 넷 중에서도 가장 덜 알려진 시인이다. 그만큼 독자적이다. 그는 지역을 지키며 그 지역의 독자성을 바탕 삼아 보편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속한 지역과 그 속에서의 삶을 세세하게 작품에 녹여낼 뿐만 아니라, 동시대와도 끊임없이 교감하려 한다. 자폐와 단절을 기본 속성으로 하는, 시대의 단독자로서의 자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삶창 2008)는 이같은 ‘고투의 소산’이다. 이 시집에서 그는 지루한 나날의 생활까지도 생생한 활동사진처럼 묘사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난한 살림살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두번째 시집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푸른사상사 2020)에서도 이는 이어지는데 그 관심의 영역이 더 넓고 깊게 펼쳐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생활의 이면과 그 비의적 순간을 놀라운 직관으로 꿰뚫어 보이기도 한다. 그가 발견한 시공간에서 사물들은, 홀연 뜨거운 이명윤식 의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이른 새벽 통영 서호시장 뒷골목에 가면 술이 덜 깬 구두든 단단히 묶은 운동화든 비린내 나는 장화든 건들건들 슬리퍼든 모두들 낯선 얼굴이지만 긴 나무의자에 서로의 어색한 엉덩이를 달싹달싹 붙이고 엄마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일렬로 앉아 겨우내 그늘에 말린 배추 이파리에 된장 풀어 끓인 그 국을 공손히 먹는다 이 거룩한 예배로, 어김없이 다툼과 낭비로 살았던 우리들의 한 주를

 

신은 그래, 그래, 알았어, 하며 부드러운 미소로 퉁쳐 주신다

—「통영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시락국을 먹는다」 전문

 

이명윤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단연 토착성이다. 그의 시적 정체성은 그가 지역을 자기 시의 중심으로 퍼올 때 더 번뜩인다. 인용한 시를 보라. 그는 그저 통영과 통영 사람들을 제시할 뿐이다. 그런데 읽고 있으면 그것이 묘하게 심금을 울린다. 이 시를 읽으면서는 누구라도 저 “긴 나무의자”에 가 함께 앉아 있는 자신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른 새벽 통영 서호시장 뒷골목”은 오늘 우리의 현재라고 생각한다. “술이 덜 깬 구두든 단단히 묶은 운동화든 비린내 나는 장화든 건들건들 슬리퍼든 모두들 낯선 얼굴”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 같이, “긴 나무의자에 서로의 어색한 엉덩이를 달싹달싹 붙이고 엄마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일렬로 앉아 겨우내 그늘에 말린 배추 이파리에 된장 풀어 끓인 그 국을 공손히” 받아먹는다. 평등이라면 이런 게 바로 평등일 것이고, 평화라면 이러한 장면보다 더 평화로운 시간은 달리 없을 터이다.

나는 여기 이 서호시장 뒷골목이 우리의 예배처이자 치유공간이라 여긴다. 누구든 공평하게 공손히 받아먹는 저 시락국 한그릇이야말로 “어김없이 다툼과 낭비로 살았던 우리들의 한 주를” 사해주십사 신께 바치는 공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신께 바치는 공물을 내가 먹는다는 점이다. 내 몸을 보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창조하신 신께 드리는 가장 신성한 경배의식 아닌가. 그러니 서로 낯선 통영 사람들이 새벽마다 모여 시락국을 먹을 때 저 서호시장 뒷골목은 경건함으로 흥건해질 듯싶다. 이것이 이명윤 시의 울림 깊은 확장이 아닐까.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의 틈에서, 공손하고 조화롭게 나누는 한끼의 경배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이같은 발견을 가상히 여겨 신께서도 “그래, 그래, 알았어, 하며 부드러운 미소로” 저 인간들의 죄를 사하노라 “퉁쳐 주”시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이명윤의 시선은, 「조화」에서 좀더 빛을 발한다. 언뜻 읽으면 별 의미없는 담담한 소묘로 채워지는데 시에서 눈을 떼자마자 상황이 아연 달라진다. 예기치 않게 명치가 아리는 것이다.

 

울며불며한 날들은 어느새 잎이 지고

죽음만이 우두커니 피어 있는 시간,

우리는 일렬로 서서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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