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서구의 대안의학과 의료체제의 개혁
방건웅 方建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서로 『신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등이 있음. gwbahng@kriss.re.kr
1. 머리말
약사 및 한의사들의 파업에 뒤이어 의사들의 파업이라는 유례없는 경험을 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병이 들어도 의지할 곳이 없을 수 있다는 극단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정부는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나, 의·약·정 협상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들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건강을 이야기하지만, 그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의료체제의 왜곡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의 불씨를 제공한 정부는 의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뒤에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왕따되고 있는 국민들은 대안의학을 동원해서라도 자위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안의학도 국민들에게 만족할 만한 의료써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야말로 돌팔이에게 당해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 어디를 돌아봐도 국민들의 건강을 지켜줄 파수꾼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의료체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구미에서는 현대의학이 사람을 기계로 보고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채 일률적으로 치료하는 데서 드러낸 한계 때문에 대안의학을 찾는 경향이 근년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2 미국과 영국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대안의학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미국의 시민단체에서는 대안의학을 제도권에 포함시키고자 ‘의료의 자유’(medical freedom)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싯점에서 구미의 의료체제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은 새로운 의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미국의 현황
대안의학에 대한 수요의 증가
현대의학의 종주국 미국이 당면한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고도로 발달한 의술로도 치료되지 않는 질병들이 늘어난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사례로서 암·고혈압·당뇨병·에이즈·만성피로증후군 등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닉슨 대통령이 재임시절 암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10년 동안 250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어도, 여전히 미국 국민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고 5명 중 1명이 암으로 죽는다는 통계치가 제시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더 심각한데, 의료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계자료를 보면 의료비가 이미 국방비의 3배, 교육비의 19배 규모로 커진 상태이다. 1940년도의 의료비 지출은 40억 달러로 GNP의 4%였으나, 1992년에는 8천억 달러로서 GNP의 14%에 육박한다.3 그러나 이러한 비용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400만이나 되는 것은 누구나 건강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몸에 이상이 있을 경우 의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비용은 더 늘어나지만 만족할 만한 써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안의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990년도에 미국 국민들이 대안의학에 지불한 돈은 대략 137억 달러이고, 환자들이 대안요법을 제공하는 시술사(practitioner)들을 방문한 횟수는 정통의학을 공부한 의사를 찾은 횟수를 능가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당시 대안요법을 이용한 환자들의 70%가 자신들의 주치의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아이젠버그는 미국에 ‘보이지 않는 주류’(invisible mainstream)가 존재한다고 ‘주류의 의학’(mainstream medicine)에 빗대어 말했다.4
1998년에 미국의학협회(AMA)에서 다시 조사한 바로는, 1990년부터 1997년 사이에 대안요법을 이용하는 미국인들의 비율은 33%에서 42%로 증가했으며, 1997년에는 대안의학에 270억 달러가 지불됨으로써 정통의학에 지불되는 비용을 능가하기 시작했다.5 놀라운 사실은, 1994년의 조사에 따르면6 60% 이상의 의사들이 환자에게 대안요법을 권고하고, 47%는 직접 시술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날로 확산되는 대안의학에 대해서 미국의 정부와 의학계는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대안의학에 대한 학술적 접근
대안의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하게 높아짐에 따라 이러한 현실을 계속 외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의회는 1992년에 법(PL103-43)을 제정하여 보건의료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연구기관인 국립보건연구원(NIH)에 대안의학실을 설치하도록 했다. 6년 후인 1998년에는 또다른 법안(PL105-277)을 통과시켜 대안의학실을 NIH 산하의 독립연구기관으로 승격시키면서 명칭도 ‘국립 보완의학 및 대안의학 쎈터’(NCCAM)로 바꾸었으며, 2000년도 예산은 물경 6830만 달러였다. 정통의학의 총본산이라고 할 NIH에 대안의학을 전담하는 연구소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은 대안의학을 제도권 내에 정착시키기 위한 기초를 다졌다.7
NCCAM의 소장인 스트라우스(S.E. Straus)는 대안의학이 점차 정통의학에 융합됨에 따라 앞으로는 배타적인 의미의 ‘대안’이나 ‘보완’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포괄적 의미의 ‘통합의학’(integrative medicine)이라는 말이 쓰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정통의학의 환원주의(reductionism)적 특성과 대안의학의 통합생물학(integrative biology)적 특성의 균형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미루어보면 현대의학과 대안의학의 상호보완적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현대의학의 한계를 돌파할 실마리를 대안의학에서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정부 차원뿐만 아니라, 의과대학에서도 대안의학 분야의 연구소를 설치하는 등 학술적 연구기반을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199
- 의료제도상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박형욱 「의료다원주의 관점에서 본 의료개혁」, 『창작과비평』 2000년 겨울호 참조. ↩
- 전세일·전홍준·오홍근 엮음 『새로운 의학, 새로운 삶』, 창작과비평사 2000 참조. ↩
- 홍승권 「대체의학의 현황」, http://plaza.snu.ac.kr/~skdoc/대체의학.htm ↩
- D.M. Eisenberg et al., “Unconventional medicine in the US,”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28(1993), 246〜52면(이하 NEJM으로 약칭). ↩
- J.A. Astin, “Why patients use alternative medicine: Results of a national study,” 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279(1998), 1548〜53면(이하 JAMA로 약칭); D.M. Eisenberg et al., “Trends in alternative medicine use in the US, 1990〜97,” JAMA 280(1998), 1569〜75면. ↩
- J. Borkan et al., “Referrals for alternative therapies,” J. of Family Practice 39(1994), 545〜50면. ↩
- 연례보고서를 포함한 자세한 내용은 http://nccam.nih.gov/nccam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