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서울대와 국가주의

 

 

서울대와 국가주의

『창작과비평』 봄호에 실린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은 지난 1월 하순 한완상 전 부총리의 국무회의 발언과 관련하여 학벌문제가 사회의 이슈가 되던 차에 나온 시의적절한 좌담이었다.

학벌주의를 심화시키는 책임의 소재를 놓고 서울대에 직격탄을 날리는 김상봉 박사의 매서운 공격과 이를 방어하는 송호근 서울대 교수, 또 온건한 입장에서 서울대 문제를 지적하는 다른 토론자의 발언들은 이 문제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서울대 문제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은 김종엽 교수가 적절히 제기하였듯이 “세금에 의해 국립대학이 운영되는 체제가 어떤 정당성을 지니며 어떨 때 그 정당성을 충족시키는가” 하는 것이 돼야 한다. 이에 대해 송호근 교수도 서울대가 “가장 우수한 학생을 받아들여 교육시키는 기관이 아니라 성적(性的)·지역적·계층적으로 안배된 다양한 자질을 가진 학생들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교육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지적하였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옳은 방향이다.

서울대가 현재와 같이 이른바 학벌우상이자 슈퍼명문으로서 대학서열의 정점에 군림함으로써 대학서열체계를 고착화시켰던 데는 무엇보다 국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즉 사립대에 비교한 서울대의 경쟁우위는 오로지 국가프리미엄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대학교육이라는 영역을 민간에 개방하였으면서도 국립대학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국가주의의 정체를 밝혀내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서 제기된다. 좌담회에서도 국가주의라는 개념이 여러번 등장하였다. 김상봉 박사는 “국립대학이 순수학문을 책임져야 한다는 발상이 국가주의적”이라고 비판하였고, 안상헌 교수는 김상봉 박사의 학부할당제 제안을 “국가주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라며 유보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국가주의라는 것은 정치경제학 용어로 국가와 시장의 관계에서 국가가 관료조직의 영도 아래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고도의 성장을 일구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교육, 특히 고등교육의 영역에서는 국가가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교육을 이끌겠다는 발상으로 나타난다. 즉 양적으로는 민간 참여 비율이 80%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교육의 주도적인 역할은 역시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관의 민에 대한 우위를 버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자면 국립대학 출신이 국가엘리뜨의 주요공급원이어야 하고 국립대학이 사립대학보다 권위를 더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주립대학이 사학위주의 체제를 보완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들에게 폭넓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반면, 우리에게는 복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국공립대학이라는 발상이 매우 미미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국립대의 등록금 할인은 마치 덤핑판매와 같아 사립에 대한 국립 우위를 강화하는 큰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민간을 참여시킨 영역에서 여전히 민간과 경합관계에 머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민간의 활력과 역동성을 살리지 못하고 민간을 무기력과 부패의 길로 이끌 뿐이다. 사실 지금 사립대의 부패는 근본적으로 사립대가 민간영역 고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타의에 의한 서열체계에 갇혀 자생력과 의욕을 잃었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국가수립 초기 대학교육에서 국가의 선도적 역할이 필요했더라도 일정한 싯점이 되어 국가의 존재가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경우에는 공공성의 담지자로서의 국가는 빨리 발을 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되지 않는다. 이미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 제도는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사회 내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마침내는 강력한 국가의 통제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서울대가 그러한 위치에 있다. 현재 교육부는 교육정책 수립에 있어 서울대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고 서울대는 교육부와의 협약을 밥먹듯이 위반한다. 또 BK 21 사업 등에서 보듯이 교육부를 통로로 삼아 합법적으로 거대한 자금을 갖다쓰기도 한다. 결국 서울대 문제는 국가가 서울대를 육성하였으나 이제는 서울대가 국가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학벌권력체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 지난 1월 이상주 신임 교육 부총리가 임명되자 이규택 국회교육위원장이 서울사대 트로이카(교육 부총리, 교육부 차관, 국회교육위원장이 모두 서울사대 출신이라는 의미) 체제가 구축되었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가 뒤늦게 취소하는 해프닝을 연출한 것을 봐도 국가기관의 서울대 사당화(私黨化)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내년 대학입시에서 다시 수능 비중을 높이겠다는 서울대의 발표가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학벌사회의 피해자들이 국가권력을 대신하여 이 학벌권력체에게 압박을 가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힘없는 교육부로 달려가 시위하는 많은 교육시민단체들이 이제는 교육부 위에서 군림하는 서울대학교 본부 앞으로 그 시위의 대열을 옮겨야만 비로소 우리의 교육상황은 그 파행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찾게 될 것이다.

국민대 법학과 교수 김동훈 / dohookim@kmu.kookmin.ac.kr

 

반가운 농촌문제

지난호 현장통신에서 다뤄진 두 글 「농촌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와 「뉴라운드와 한국농업」이 가장 먼저 내 시선을 끌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가슴 두근거리며 이 글을 실어준 창비사에 감사해하며 읽었다. 물론 농촌문제에 대한 글을 써준 이중기, 박진도님께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점에 가보면 참으로 많은 문예지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책을 펼쳐보아도 우리의 뿌리, 도시의 뿌리인 농촌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글은 금광을 찾기보다 힘들다.

작가, 시인, 평론가 등을 막론하고 글 쓰는 이들이라면 일년에 단 한번만이라도 진심으로 농촌에 대해 걱정하는 사명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은 자신이 고사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을 키운 곳은 곧 농촌이라는 뿌리가 아니던가. 도시의 병원에 태를 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의 뿌리는 농촌이다.

온갖 수입농산물에 잠식당해가는 우리의 몸이 과연 순수한 한국사람의 몸이라 볼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그릇은 한국인이나 알맹이는 온갖 수입음식물로 채워진 잡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잡탕에서 나온 정신은 과연 몇 퍼센트나 순수한 우리의 것일 수 있을까. 무섭게 밀려 들어오는 수입농산물의 파도에 휩쓸려 우리 것들이 멸종될까 두려워진다.

물론 농촌에 관심있는 글을 쓰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앞으로 『창작과비평』 역시 농촌문제에 대한 글을 자주 실어, 농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보석 같은 잡지이기를 바란다.

백정희 hobongsan@hanmail.net

 

송기원님의 「바보막둥이」를 읽고

송기원님이 쓴 소설 「바보 막둥이」를 호감있게 읽었다. 송기원님의 출생지가 보성으로 돼 있는데, 아마 보성군 조성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보성군과 경계에 위치한 고흥군 대서면에 살면서 조성으로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니면서 조성(새재) 장날이면 소설에서 바보 막둥이로 나오는 막둥이를 자주 보았다. 옹기전에서 그를 자주 보았는데, 언젠가 조성에 사는 친척집에 잔치가 있어 갔더니 막둥이가 잔심부름을 돕고 있었다. 그때 그의 성씨가 정씨라는 것을 알았다. 丁인지 鄭인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한번 보았다고 그 뒤부터 시장에서 보면 인사를 하던. 나는 1945년 생이고 작가 송기원님은 1947년 생이며 동시대와 같은 지역을 배경으로 자랐기에 이 소설에 더욱 공감이 갔는지도 모른다.

허구를 사실처럼 쓰는 것이 소설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쓰면서 약간 재구성해놓은 것 같다. 작가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읽었겠지만, 남의 과거를, 그것도 보통사람이 보기에 좀 모자란 사람을 성씨나 이름도 바꾸지 않고 소설로 그대로 옮겼다는 것은, 한번쯤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중간과 말미에 미적으로 끌어올린 곳이 두어 군데 보이긴 했지만 성씨나 이름 중 하나라도 바꾸어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특별한 작품적 의미가 없는 한 장성포로 나오는 지명을 확실한 지명인 장선포로 표기해 소설적 배경을 정확히 썼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송기원님이 그 지역(작가의 고향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더 많이 써서 「춘향전」의 남원처럼 소설 속 고을로 이름이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인천시 계양구 서운동 43-9 정하선

 

故 김영무 시인과 김기택 시인의 시를 읽고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경배할 일들이 많았던 지난 봄이었다. 그러던 중 김영무의 유고시 「내가 일생 동안 떨쳐버린 어둠이」에서 ‘어둠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라는 시구를 발견하고 전율했다. 왜 어둠의 하느님이어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단지 ‘찬미 받으소서’라는 언어를 익히게 해준 고인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김기택 시인의 「그들의 춘투」도 잘 읽었다. 사무직노동자들의 왜소한 일상을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 나방떼에 비유한 이 멋진 시에서 나는 ‘춘투’라는 시어에 매료됐다. ‘춘투’라고 발음할 때의 그 격한 울림 때문에 힘없는 사무원이 더욱 서럽게 다가왔다. 사무원들에게 제대로 된 ‘춘투’란 아직 멀고 먼 일이라 더 그랬을까?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시였다.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112 이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