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사랑

1984년 서울 출생. 201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스크류바』, 장편소설 『우주를 담아줘』 등이 있음.

giparang-1@hanmail.net

 

 

 

서울의 바깥

 

 

T팰리스에 들어서며 나는 무슨 지령이라도 수행하듯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공동 현관을 지나칠 때 시간을 체크했다. 10시 36분. 아직 여유가 있었다. 현관 안의 자동 유리문은 자동으로 열리지 않았다. 카드키로만 열리는 문이었다.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몰라 기웃거리는데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 틈에 무사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경비실에서 방문증을 받으라고 했었지. 경비실 앞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이름과 방문 호수, 방문 목적 등을 작성하자 직원이 신분증이나 차키 중 하나를 요구했다. 그리고 매끄러운 동작으로 내가 건넨 운전면허증을 받아서 넣고 임시 카드키를 내주었다.

엘리베이터는 어디에 있죠? 하는 내 물음에 직원은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 다시 왼쪽으로 꺾어진 곳에서 타시면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왼쪽 코너를 돌자 양쪽으로 갈라진 길이 나왔다. 왼쪽은 저층(1~ 30층) 전용, 오른쪽은 고층(31~ 60층) 전용이었다. 나는 왼쪽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29층 버튼을 눌렀지만 엘리베이터는 멈춰 있었다. 아, 카드키! 카드키를 어디에 대야 하는 건지. 더듬거리며 카드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에 맞춰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당황해서 여기저기 대보는 사이, 딩동 소리가 나며 인증이 이뤄졌고 그제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2909호 앞,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43분. 약속한 시간까지 2분이 남았다. 나는 몇시간 전 전화 통화로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럼 10시 50분에 시작하는 걸로 하죠. 선생님은 수업 5분 전에 도착해주세요. 빨리 오시지도 늦게 오시지도 말고요, 꼭 10시 45분에 벨 눌러주세요. 제가 이명이 있어서 벨소리를 못 듣거든요. 이명하고 벨소리가 똑같지 뭐예요. 그러니까 화면 보고 있다가 딱 45분에 문 열게요. 2분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휴대폰 시계만 노려보다 45분이 되는 순간 벨을 눌렀다. 귀에 익었지만 제목을 알 수 없는 클래식 벨소리가 울려퍼졌고 잠시 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풀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구두를 반쯤 벗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어둑한 거실에 불이 켜지며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작고 마른 몸이 눈에 띄었다. 여자는 화장기 없는 얼굴을 문지르며 피곤한 듯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주 서서 고개를 숙이며 나도 인사했다. 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카드키는 저 상자에 넣으시고요, 들어오셔서 선생님이라고 쓰여 있는 파란색 슬리퍼 있죠. 그걸 신으세요. 그리고 손 소독제 한번 쓰시고요.

나는 지령에 따라 카드키를 넣고 슬리퍼를 신고 알코올 향이 나는 손 소독제로 손을 닦았다. 그러자 어머님은 베란다 문을 열고 책과 시험지가 쌓여 있는 베란다를 지나 중문을 열고 또 닫고, 마지막으로 방문을 열었다. 분명 거실 입구에 방문이 있었는데 이렇게 돌아 돌아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묻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침대가 보였다. 높은 침대에 누워 있던 거구의 학생이 몸을 돌려 누웠다.

넌 5분만 쉬어. 엄마가 선생님이랑 잠시 얘기 좀 할 테니까.

반쯤 몸을 일으키던 학생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안녕이라는 말을 건넬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학생은 다시 누웠고 나는 어머님을 따라 좁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방은 침대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책장과 책상이 놓인 구조였다. 책상은 앞이 막혀 있는 것으로 두개가 이어져 있었다. 책상에 앉으면 방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공부할 책들만 보였다. 의자 뒤로는 남은 공간이 별로 없었다. 비좁아서 몸집이 큰 학생이 자유롭게 드나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머님은 두개의 의자 중 왼쪽 것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다. 나는 가방을 잠시 책상에 올려두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어머님은 가방은 책상 밑에 두세요, 하고 말한 뒤 휴지에 세정제를 묻혀 가방이 있던 자리를 닦았다. 펜은 따로 꺼내지 마시고 여기 있는 거 쓰세요. 나는 네, 하고 말했다. 네,밖에는 더이상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없었다.

시강을 위한 프린트 자료가 가방에 들어 있었다. 가방으로 몰래 손을 뻗치고 있을 때 어머님이 수능특강 책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수능특강으로 강의하시죠? 네, 그럼요. 나는 뻗던 손을 다시 책상 위로 가져왔다. 분명히 시중에서 파는 수능특강 책이 맞았는데 스프링 제본이 되어 있었다. 뭘 굳이 이렇게까지, 하고 고개를 드는데 책장에 꽂힌 모든 책이 스프링으로 제본되어 있었다. 어머님은 내게 준 수능특강 책 위에 숫자 2가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2라고 적힌 건 선생님이 보시고요, 1이라고 된 건 아이가 볼 거예요.

어머님은 바쁜 손길로 페이지를 펼치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애가 비문학은 나쁘지 않은데 문학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선생님 모셨어요. 다른 아이들보다 말뜻을 잘 못 알아듣는 편이니까 최대한 천천히 수업해주세요. 오늘은 「회색 눈사람」 있죠. 그걸 하는 게 좋겠어요. 아까 풀라고 시켰더니 두 문제나 틀렸지 뭐예요. 제가 읽어봐도 좀 난해한 부분이 많은 것 같고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네요. 인물의 관계라든지 대화의 이유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시면 좋겠어요. 지인아, 들어와. 벌써 1분 지났어.

어머님이 나간 좁은 틈으로 학생이 나타났다. 학생은 몸을 모로 틀어 겨우 의자에 앉았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며 나는 처음으로 학생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봤다. 한올도 빠짐없이 단정하게 묶은 머리 밑으로 둥근 이마가 보였다. 이마와 볼, 턱 주변은 모두 여드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눈은 작지 않은데 두꺼운 안경 때문에 축소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안경 너머로 학생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학생과 나는 각자 교재로 눈을 돌렸다. 선생님이 천천히 읽을 테니까 눈으로 따라 읽어. 모르거나 이해 안 가는 내용 있으면 질문하고. 그 말 뒤에 나는 평소처럼 앞부분 줄거리부터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학생이 잘 모를 만한 단어가 있으면 부연 설명을 했고 인물의 행동 이유도 간간이 덧붙였다. 아주 매끄럽지는 않아도 썩 나쁘지 않은 수업 분위기였다. 나는 두 페이지 가득한 본문을 다 읽고 나서 학생에게 물었다. 이해했어? 학생이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 가요.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평소 같으면 한 사람에 대한 결정적인 평가 절하로 연결될 이런 진부한 말이 고개를 돌린 그의 어두운 표정 때문인지 의도적인 모욕으로 들렸다.’ 이런 진부한 말이 가리키는 게 뭐지? 앞 문장에서 찾아봐. 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이 말이잖아. 안정된 직장도 가지고 시집도 가야 할 거라는 말, 그게 진부한 말이지. 진부하다는 건 표현이나 행동이 낡았다는 뜻이야.

그게 왜 평가 절하로 이어지죠?

여자니까 시집이나 가야 한다는 말이 좋게 들리지 않겠지. 게다가 이 주인공은 대학생이고 자신의 의지로 여기 와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선배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을 거야.

그럼 의도적인 모욕은 또 뭐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려고, 그런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요?

나는 지친 티를 내지 않고 했던 말을 이렇게 바꾸기도 저렇게 바꾸기도 하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간신히 학생을 이해시켰다고 생각할 무렵 책상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날아왔다.

“둘이 무슨 일을 하기에 남자가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거죠?”

나는 대답을 학생에게 해야 할지 아니면 저 책상 뒤편 보이지 않는 어머님에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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