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서정적 주체와 경계의 해체

 

 

이숭원 李崇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평론집 『폐허 속의 축복』 『초록의 시학을 위하여』와 저서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등이 있음. topos@swu.ac.kr

 

 

 

1. 담론의 출발

 

시가 어떤 의미를 담은 발화의 한 양상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그것이 산문과 구분되는 독특한 층위를 지닌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밥을 먹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지시한다. 그런데 “허기로 지친 내가 눈물 젖은 밥을 꾹꾹 씹어삼킨다”라고 하면, 여기에는 화자의 감정과 태도와 반응이 복잡하게 얽혀든다. 이것을 다시 “공복의 현기/눈물 젖은 식욕의 갈증/목구멍에 넘어가는 환멸의 흰 밥알들”이라고 고쳐쓰면, 최초의 단순한 의미가 분해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의미의 층이 형성된다.

이런 점에서 시는 어떤 의미를 단순명료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기능적으로 부적합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진술(statement)은 말하는 주체(화자)가 있고 그 말을 듣는 객체(청자)가 있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화자가 청자에게 전달하려는 의미가 뚜렷해야 하며, 의미를 뒷받침하는 화자의 태도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자세가 진지해야 하고, 주체와 객체의 의사소통을 이어주는 공통언어의 기반이 있어야 한다. 내용이 명확하지 않거나 화자의 태도가 소극적이라면 청자의 자세 역시 산만하게 되어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내용이 명확하고 화자의 태도가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청자의 자세가 산만하여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교장선생님은 강단에서 열변을 토하는데 학생들은 떠들고 장난치는 초등학교 강당을 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시에는 화자의 존재가 크게 부각될 뿐 의미전달의 대상인 청자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청자의 자세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의욕은 넘치고 태도는 진지하지만 말의 내용을 딱 잘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복잡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감정의 파동에 따라 언어로 흘려보내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약 80년 전 영국의 리차즈(I. A. Richards) 같은 사람은 시를 ‘진술 비슷한 것’(Pseudo-statement, 흔히 ‘의사진술’이라고 번역한다)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다음의 시를 보면 리차즈가 설명하려 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맨발』, 창비 2004) 전문

 

이 시는 서로 다른 여섯 개의 장면을 제시하고 있을 뿐, 비가 오려 할 때 어떠했다든가, 비가 오려는 것과 나머지 다섯 개의 장면이 어떤 관계에 있다든가 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고 있다. 독자는 그저 이 여섯 개의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며 각각의 시행이 환기하는 정취와 장면끼리의 연관성을 상상할 뿐이다. 이 시의 화자는 적어도 전달하려는 의미가 무언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장면의 제시를 통해 의미의 상상을 방임해놓은 형국이다. 화제전달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따라서 매우 방임적이고 비관여적이다. 청자의 자세에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이 발화의 비의를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런 기묘한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이 시에서 우리가 수용하게 되는 것은 산문과 같은 명백한 의미의 층이 아니라 각각의 장면이 환기하는 감정의 파동이다. 요컨대 이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느끼게 하는 데 주력한다. 겉으로는 진술의 형태를 취했지만 어떤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므로 ‘가짜 진술’(Pseudo-statement)이라 할 만하다. 까만 염소를 소심한 공증인에 비유한다든가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편다고 표현한 것도 의미의 명확성을 희석하면서 오히려 감정의 다의성을 증폭시킨다. 특히 “바람의 살들”이라는 구절에서 ‘살’은 햇살이나 물살처럼 미세하게 흐르는 결을 뜻하는 동시에 바람과 청보리밭이 서로 접촉하며 술렁인다는 점에서 바람의 살결을 연상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의미의 명확성을 스스로 분해시킨다. 이러한 산포(散布)와 희석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가 오기 전의 풍경들이 몽롱하게 접합되는 특이한 감각체험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시가 언제나 이러한 의미배제의 몽롱한 어법만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의식을 내세우면서 산문이 추구하는 의미전달의 측면을 끌어안고 감정적 충동의 효과를 활용하려 할 때 시는 의사진술의 자리에서 벗어나 진술과 담론의 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프로문학의 목적시가 그러하며, 1980년대에 문단을 풍미했던 민중시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머리띠를 질끈 묶으며

적과 아를 확연히 갈라내어 묶으며

전선에 선 동지들을 한 대오로 묶으며

‘결사투쟁’ ‘일치단결’ ‘승리쟁취’ ‘노동해방’

살아 펄펄 뛰는 구호들을 정수리에 새기며

결연한 투지로 비장한 맹세로

떨리는 손길로 머리띠를 묶는다

–박노해 「머리띠를 묶으며」(『참된 시작』, 창작과비평사 1993) 부분

 

민중시 중에서도 전위의 자리에 섰던 박노해의 노동시는 불필요한 어사를 배제하고 선명하게 집약되는 의미의 중심을 향해 정연하게 시어를 배치하고 있다. 눈앞의 목표가 뚜렷하고 확고하므로 멀리 에둘러갈 필요가 없다. 단결심과 투쟁의식 고취를 위해 필요한 말만 할 뿐이다. 80년대의 이러한 직설적 시는 산문의 기능을 시의 율격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의미의 명확성과 격정의 파동을 함께 전달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 시대가 산문이 감당해야 할 의미전달의 통로가 상당부분 막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가 이런 시를 시도한다면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고 지탄을 받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전달매체가 우리 앞에 널려 있기 때문에 산문적 의사소통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다채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더욱 내밀화되고 화자의 목소리는 더욱 음성화된다. 위의 문태준(文泰俊)의 시와 박노해의 시를 비교해보라. 박노해의 시에 당당히 살아 있던 명령하는 주체의 목소리는 문태준의 시에서 찾아볼 수 없다. 몇개의 작은 장면을 소개하고 저 뒤에 물러서 있는 화자의 모습을 감지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큰 것인데 이러한 차이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들의 시에서 서정적 주체 즉 화자는 어떠한 양상으로 작동하는가? 최근 간행된 세 권의 시집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겠다.

 

 

2. 독백의 어법과 서정적 주체의 자리

 

공교롭게도 고재종(高在鍾)은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 2004)의 ‘시인의 말’에서 바로 이 주체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 시에서 주체가 사라지곤 했다. 아니 애초부터 그랬다. 그건 내가 나를 별로 신뢰하지도 않지만, 세계와 우주를 ‘독학’하는 처지에 무슨 목소리를 내랴 싶어서이기도 했다. 주체가 드러내는 게 ‘속내’라고 한다면, 어쨌든 그것은 속에서 내를 열든가 산을 세우든가 무슨 길을 찾겠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