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성(性)을 사유하는 윤리적 방식

최근 한국문학에 나타난 성·사랑·가족에 대한 단상들

 

 

김형중 金亨中

문학평론가. 주요 저서로 『소설과 정신분석』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등이 있음. unabomber5@hanmail.net

 

 

불경을 지고 가던 우리집 늙은 암소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김훈(金薰)의 「언니의 폐경」(『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은 그 자체로는 흠잡을 데 없는 텍스트이다. 김훈 단편 특유의 구성력과 미문은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언니의 등 뒤로는 매번 곱게 늙은 노을이 지고, 그 노을 속으로 물고기를 닮은 비행기가 뜨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그“강의 흐름이 두 번 뒤집히면 하루가”(262면) 간다. 달이 그 강의 흐름을 주관한다. 물론 언니의 몸도 주관하는데, 침대 시트를 생리혈로 더럽힌 정월 대보름 밤, 언니는 말한다. “얘, 커튼을 닫자. 달 때문이야.”(233면) 침대 시트는 마른풀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정갈하게 풀 먹인 옥양목, 주로 채식만 즐기는 언니가 그 위에서 잔다. 기도(氣道)에 ‘카이바시라’가 걸려 숨을 못 쉬는 손자를 살려내는 이도 언니고, 낙오한 조류(鳥類)와도 같은 인상의 ‘그이’를 품어 사랑하는 이도 언니다. 언니는 소설 말미에서 원효의 제자인 사복(蛇福)의 어머니와 동일시되는데, 사복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자 이렇게 말했단다. “불경을 싣고 가던 우리집 늙은 암소가 이제 죽었다.”(274면) 월경(月經)의 ‘經’과 불경(佛經)의 ‘經’이 같은 글자이니, 사복의 어머니처럼 언니도 부처의 풍모를 부여받는 셈이다.

언니 주변엔 몇사람의 남성이 있다. 그들은 모두(수컷들의 경쟁에서 낙오한 ‘그이’를 제외하고) 차갑고 단단한 금속성의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고, 위압적이고 무거운 검은색을 선호하며, 혈족주의와 배금주의의 신도들로 그려진다. 비행기사고로 죽은 형부는 일 중독자였고, 제철회사 인사관리부서에서 일했다. 모든 가부장들이 그렇듯이 가문의 대소사에 아내를 대동해 체면 차리기를 즐기는 ‘나’의 남편은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8기통 검은색 승용차를 즐겨 탄다. 아마도 그 차는 항상 차갑고 빛나게 손질되어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인사관리부서에서 일했는데 낙오한 조류를 닮은 ‘그이’를 퇴출시킨 이가 바로 남편이다. 조카와 언니의 시댁 남자들은 형부가 남기고 간 20억을 두고 드잡이를 마다하지 않으며, 연방“이래서 여자들한테 집안일을 맡길 수 없다니깐”(270면) 따위의 말들을 남발한다.

이전의 단편들에서 그랬듯 김훈은 이 작품에서도 비행기의 상승과 하강, 물의 들고 남, 달의 차고 이지러짐 등 적절한 신화소(神話素)와 상징, 이미지와 리듬을 긴밀하게 상호 조응시키면서 여성의 몸에 잠재된 삶과 죽음의 이중성이란 테마를 관념의 노출 없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언니는 여성성의 화신이다. 반면, 남성인물들 주위에는 언니의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차갑고 위압적인 이미지들이 계열을 이루면서 ‘남성성/여성성’의 차이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언니의 폐경」은 ‘잘 빚어진 항아리’다.

 

 

여성은 남성이다

 

그러나, 정말 여성은 꽃이거나 젖일까? 우물이거나 달일까? 꽃처럼 곱고, 우물처럼 깊고, 달처럼 풍요롭고, 대지처럼 넉넉한 여성, 그러나 그토록 우주화된 여성은 남성이다.1 아도르노는 말한다. “본능에 근거한다는 모든 유의 여성성이란 항상 모든 여성이 폭력적으로 강요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다.”2 여성성이란 여성의 본능으로부터,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다. 여성성이란 최종심에서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이러저러한 담론들이 여성에게 강요한 자질이다. 여성성에 대한 사유가 지극한 회의와 자성이 동반되지 않는 한(동반된다 하더라도), 거의 자동적으로 남성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여성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성차에 대한 지배담론은 여성을 여성주체로 호출하는 데 일조한다. 여성 또한 그렇게 남성이 된다.

여성이라는“성별은 항상 헤게모니적인 규범들의 반복으로서 산출된다.”3 물론 헤게모니는 남성중심사회의 것이다. 여성이 꽃이고 밥이고 달이거나 물일 때, 남성들은 꽃을 꺾고, 밥을 먹고, 달빛을 거닐고 오래오래 양수 속을 유영한다. 여성성은 남성들의 실현되지 못한 꿈이다.

김훈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금홍이는 이상(「날개」)의, 안지야는 장용학(『원형의 전설』)의, 은혜는 최인훈(『광장』)의, 심청은 황석영(『심청』)의, 정희남은 김성동(『꿈』)의, 리엔은 방현석(「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실현되지 못한 꿈이다. 물론 신경숙을 필두로 여성성의 이상화에 편승했던 90년대의 많은 여성작가들 또한 (비록 그들이 구부린 남성적 막대의 경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타자와 이방인

 

여성은 이를테면 성기의 ‘두 음순’으로부터 나오는 확산된 성욕과, 남근중심적 담론과 같이 동일성만을 요구하는 가설 내에서는 이해도 표현도 될 수 없는 리비도적 에너지의 다중성(多重性)을 경험한다는 것이다.4

 

다소 생물학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A.R.존스의 이 말은 남성으로서 글을 쓰는 이들에겐 가히 치명적이고 절망적이다. 여성성이란 남근중심적 동일성 담론으로는 애초에 이해도 표현도 불가능하다. 남성들의 언어체계 안에(그리고 어쩌면 여성들의 언어 안에도) 여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 ‘여성은 없다.’ 그런 판에 여성성을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남성작가가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사유의 틀 자체에 대한 회의 없이 여성을 말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어법을 빌리자면, ‘비윤리적’이란 말은 ‘윤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렇다면 윤리는 언제 발생하는가? 타자의 외부성을 용인할 때 발생한다. 말하자면 타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 혹은 질시와 모멸의 대상으로 ‘이방인화’하지 않을 때 윤리가 발생한다. 코오진의 말이다.

 

여기서 ‘타자’의 개념에 대해 확실히해둘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나 문화기호론자는 공동체 바깥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방인〔異者〕은 공동체의 동일성·자기활성화를 위해 요구되는 존재이므로, 공동체의 장치 내부에 있

  1. 1990년대 이후 한국소설과 비평에 나타난 ‘여성성’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심진경 「새로운 여성성의 미학을 찾아서」, 『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 참조.
  2. T.W.아도르노 『한줌의 도덕』, 최문규 옮김, 솔 1995, 136면.
  3. J.버틀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김윤상 옮김, 인간사랑 2003, 203면.
  4. A.R.존스 「몸으로 글쓰기」,『여성해방문학의 논리』,한국여성연구회편역, 창작과비평사 1990, 1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