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소설

 

성장서사와 균열의 상상력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저서로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fos.com

 

 

1. 성장서사와 균열의 상상력

 

성장서사는 문학독자를 오래전부터 매혹해온 이야기 양식이다. 개인이 집단에 적응하는 고난의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성장서사는 한 사회가 지닌 내부적 모순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집단에 적응하기 이전의 자아의 혼란과 절망을 보여주면서도 결국에는 사회체제 속에 안전하게 합류하게 되는 자아의 모순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성장서사가 근본적으로 균열의 도정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위기의 서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1

최근 소설들의 흐름을 살펴보아도 자기성찰의 여정 속에서 대두되는 고향 모티프나 성장서사는 기원찾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성석제와 은희경, 구효서와 윤대녕, 조경란과 하성란의 소설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가족과 성장의 모티프는 이전의 나르씨씨즘 서사와는 다른 각도에서의 계보적 고찰을 필요로 한다. 가족적 유대가 희미해진 김애란과 박민규 소설들 역시 ‘아비 없는’ 성장서사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례이다. 위기와 균열을 극화하는 성장서사는 주인공이 목표로 삼은 성숙의 지점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가는 힘겨운 과정 그 자체를 돌아보는 데서 의미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계절에 만날 수 있는 성장서사들 역시 다양한 모색과 성찰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관심을 끄는데, 그중에서도 전성태, 김중혁, 윤성희, 공선옥의 소설은 소외의 현실과 타자적 존재의 발견이라는 주제를 깊이있게 형상화한 작품들로 다가온다.

전성태(全成太)의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는 압축적인 대화의 묘미와 서정적인 감수성을 잘 살린 뛰어난 성장소설의 형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전리 마을의 한 학교에서 시행되는 하프마라톤 훈련과정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고장의 풍속과 시대상을 절묘하게 연계시키는 풍부한 입담의 세계를 그려낸다. 마라톤 대표선수인 ‘오쟁이’의 종아리 굵기를 재며 성장신화를 역설하는 학교 교장,11대 대통령 취임식을 축하하는 현수막, 방과후 달리기연습에 동원되는 아이들, 편도선이 부은 아이들에게 모나미볼펜 대롱을 통해 가루약을 불어넣는 노인의 모습 등은 이 소설이 힘있게 장악하고 있는 풍속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동네 아이들의 우상인 오쟁이의 과묵한 모습이나, 늘 건들거리며 아이들을 괴롭히는 쎄비 형, 새침한 명심이와 순박한 돼지어멈의 생생한 캐릭터 역시 이 소설을 활기차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소설에서 아이들이 달리기를 통해 속도경쟁체제의 원칙을 습득해가는 일련의 과정은 성인사회로의 편입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것이 지닌 모순과 균열을 들여다보게 한다. 오쟁이의 신발이 부러웠던 ‘나’는 우연히 주운 돈으로 육미관 설렁탕을 사먹고 스파이크 슈즈를 사 신는다. 그러나 돈의 임자인 돼지어멈이 나타나는 바람에 행운은 곧 불운으로 바뀐다. 멋모르고 쓴 돈을 갚기 위해 쎄비 형에게 돈을 빌린 나는 다음날부터 개구리를 잡아 다리 껍질을 벗기고, 라면봉지를 주워다 나르며 돈을 모으려 하지만 고단한 노동의 뜀박질은 해도해도 끝이 없다. 주인공이 체감하는 물신사회의 가혹한 원리와 속도경쟁체제의 부조리함은 오쟁이가 짐수레에 밀려 사고를 당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괜찮다니께. 이대로 서울까장도 달리겄구만”이라는 오쟁이의 자신만만한 음성은 과하게 짐을 실은 수레의 무서운 가속도에 휩싸여 힘없이 사라진다. 이 장면은 성장신화가 균열을 일으키고 붕괴되는 한 지점을 현시한다. 속도전의 선두에 서 있던 오쟁이가 궤도 밖으로 이탈해 사라져버리는 장면은 주인공이 느낀 어깨의 격통과 더불어 비극적인 성인식의 한 장면을 상징하는 듯하다. 사고로 실려간 오쟁이는 돌아오지 않지만, 눈속임수로 오쟁이의 종아리를 재던 교장은 ‘야구시범학교’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며 또다른 성장신화 재건에 몰두한다. 이 소설이 일러주는 진정한 비극은 바로 오쟁이의 사고 후에도 냉혹한 경쟁사회의 논리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성장의 화법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의 일면을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남기는 비극적인 여운은 상징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매향』(실천문학사 1999)의 세계가 일찍이 가리켜 보인 농촌공동체의 서정적인 기억을 절실한 체험의 형태로 가져다놓았으며, 『국경을 넘는 일』(창비 2005)이 묘파한 제도적 억압의 양상을 구체

  1. 이 균열은 여성 성장서사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남성 성장서사의 상당수가 조화로운 인격의 완성을 위한 길찾기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여성 성장서사는 가부장제사회로 쉽게 투항할 수 없는 여성주체의 고뇌와 거부를 은연중에 노출한다. 이처럼 제도 속에서 자아감각을 파괴하지 않으려는 여성의 정체성 인식은 “불확실성의 수사학”으로 명명되기도 한다(김성례 「여성의 자기진술의 양식과 문체의 발견을 위하여」, 『또하나의 문화』 9호, 1992, 123~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