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세계를 아는 힘, 동아시아공동체의 길
테라시마 지쯔로오 寺島實郞
미쯔이물산 전략연구소 회장, (재)일본총합연구소 회장, 타마대학 학장. 저서로 『세계를 아는 힘』 등이 있다.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국학연구원장, 사학과 교수, 본지 편집주간. 저서로 『동아시아의 귀환』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다.

테라시마문고(寺島文庫) 4층 회의실│사진 ⓒ田中みどり
테라시마 지쯔로오는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일본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영향력있는 대표 지식인이다. 작년 여름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후 하또야마(鳩山) 총리의 “오랜 벗으로 외교정책의 브레인”(아사히신문, 2009.12.8)이라 해서 언론의 총아가 되었다. 또한 올해 1월에 출간된 그의 저서 『세계를 아는 힘』(世界を知る力)은 석달 만에 13쇄를 찍고 15만부(3월말 현재)를 돌파한 베스트쎌러다.
그는 산(産)·관(官)·학(學)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영역을 갖고 있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1947년 홋까이도오에서 출생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종합상사 미쯔이물산에 입사한 이래 워싱턴사무소장 등 오랜 기간 미국 지사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미쯔이물산의 전략연구소 회장이자 재단법인 일본총합연구소 회장으로서 공공정책 분석활동을 하는 가운데 타마대학(多摩大學) 학장직도 맡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에도 자주 출현해 시사문제에 대해 발언하면서 왕성한 집필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내 주변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가 시야 넓은 지식인으로서 미국을 잘 알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는 인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일본의 오래된 비판적 잡지 『세까이(世界)』의 편집장 오까모또 아쯔시(岡本厚)는 그의 주장이 학자나 언론인이 아니라 비즈니스 경험에 근거한 실물감각에서 나온 것이란 데서 강점을 찾을 수 있다고 귀띔한다. 미국 중국 등에 정통한 그의 입장은 『세까이』의 새로운 변화를 상징한다. 『세까이』 지면에서 원로 정치학자 사까모또 요시까즈(坂本義和, 본지 2009년 겨울호에 소개)와는 다른 입장에 서지만 그와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이룩한 일본의 민주당이 새로운 한일관계의 길을 열어 동아시아 평화와 공생의 시대를 창출할 수 있을지, 창비 독자와 함께 점검해보기 위해 테라시마 지쯔로오와의 대담을 마련했다. 사전에 일본어로 작성된 질문서를 보냈고, 이를 바탕으로 토오꾜오에서 일본어로 대담이 진행되었다.(백영서)
‘한일병합’ 100년을 돌아보는 복잡한 생각
백영서 테라시마 선생은 일본이 후발 제국주의국가로서 ‘열강의 일익을 담당하는 일등국’의 꿈을 좇아 아시아에서 패도(覇道)를 추구한 근대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면서, 당시 세계사에서의 일본의 역할을 자각하고 아시아의 시선을 마음속에서 공명하는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사를 아시아 속에서 총괄할 필요성을 제기한 선생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저 역시 ‘시간과의 경쟁’에 쫓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근대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면서 ‘이중의 주변의 시각’을 갖자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아사히신문 2010.3.19 칼럼). ‘한일병합’ 100주년인 2010년을 맞아 지난 100년 일본역사에 대한 견해를 한국 독자들에게 간단히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이 대담을 시작하고 싶네요.
테라시마 보내주신 질문서에도 그러한 문제의식이 넘쳐 감명받았습니다만,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본이 얼마나 한국의 문화·문명에 영향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유라시아대륙의 문명·문화를 전해주는 회랑 같은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 사건이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서 전개되어왔던 것이고요, 대단히 복잡한 생각으로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특히 올해는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해인데요, 저는 일본근대사에 대해서 어떤 의미의 엄격한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는 식이 아니라 대단히 유감스러운 마음으로 일본근대사를 돌아보는 입장입니다. 일본근대사는 이중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만든 말인데, ‘아시아에 가까워진다’는 의미의 ‘친아(親亞)’라는 입장과, ‘아시아를 침략한다’는 ‘침아(侵亞)’1의 이중구조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중구조야말로 골치아픈 테마이자, 일본근대사를 깊이 성찰하는 시선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1885년에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가 「탈아론(脫亞論)」을 썼습니다. 거기서 후꾸자와는 구주(歐洲)를 모방하여 국가의 진로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후꾸자와가 「탈아론」을 쓴 그해에 타루이 토오끼찌(樽井藤吉)는 『대동합방론(大同合邦論)』을 썼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시아주의’의 전형적인 책으로, 아시아와 연대하여 요즘 말하는 ‘아시아공동체’라는 것을 만들어 구미(歐美)에 맞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후꾸자와와 타루이가 제시한 이 두 문제의식이 새끼줄 엮이듯, 바이오리듬처럼 교차해 나온 것이 일본이 아시아와 관계맺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미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안 좋은 상황에 빠지면 일본은 돌연 아시아의 일원이라고 말하면서 대동아공영권 같은 것을 주장하고 일본을 리더로 한 아시아의 결속이라는 입장으로 아시아에 회귀했지요. 그런데 전쟁에 지고 1964년 토오꾜오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코오사까 마사따까(高坂正堯)가 「해양국가 일본의 구상」이라는 논문을 썼는데요, 여기서 그는 일본이 복잡한 아시아와의 관계에 얽매이기보다는 세계 7대양을 차지하여 이른바 통상국가, 해양국가로 나아가는 노선을 취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저는 전후판 ‘탈아론’이라고 봅니다.
백영서 탈아와 아시아주의의 바이오리듬적 교차, 아시아주의가 바이오리듬처럼 되살아나는 바로 그러한 역학에서 일본이 살아왔다는 설명은 마치 일본근대사 강의를 듣는 것 같네요.(웃음) 이제는 바로 한일병합 얘기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테라시마 그럼, 한일병합 문제를 생각해보지요. 그때 일본의 판단에 대단히 중요한 충격을 준 것이 실은 미국의 움직임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898년에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푸에르토리코를 영유(領有)하고 필리핀을 거의 영유하는 형태로 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컨대 뒤늦은 식민지제국 미국이 아시아에 출현한 것과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것의 타이밍이 일치했다는 사실이 20세기 미일관계의 비극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한일병합에 대한 일본의 동기부여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 실은 미국의 ‘하와이 병합’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괴로운 이야기이지요. 조사해보니 흥미롭게도 당시 일본 지도부의 인식 속에는 미국이 하와이에서 행한 일이 한일병합의 밑그림이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1998년 미국은 과거 쿠데타를 일으키고 하와이 왕정을 전복시킨 일에 대해서 상하 양원이 사죄 결의를 했습니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 사죄 결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미국의 성실함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요컨대 한일병합의 복잡함이라는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의 세계사 조류를 볼 때, 한국은 실로 불행하게도 그 지정학적 역학이 충돌하는 곳이 되었던 거지요. 여기서 자극적인 얘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가령 제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의 일본의 정치 리더였다면, 미국이 필리핀을 영유하고 아시아로 진출하고 하와이를 병합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일본은 아시아와 동등한 시선에서 연대해간다는 구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심히 어렵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요. 즉 민족의 에너지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분출하고 불타오를 때, 가령 히비야(日比谷) 폭동사건2 등이 일어나는 가운데, 과연 국민의 고양된 의식을 억누르면서 한일병합을 피하고 한국의 자립을 도모하며 한국과 연대해서 아시아에서 안정된 힘을 배양해간다는 구상을 펼칠 수 있는 견식있는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백영서 한일병합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실로 불행한 역학구도에서 이뤄졌다는 말씀의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그것은 특히 한국인의 역사이해와는 거리가 상당합니다. 한국인이 아닌 당시 일본인 사이에서도 그런 대외팽창의 길을 걷는 것 말고 다른 길을 주장한 흐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러일전쟁 무렵 대일본주의와 소일본주의, 즉 소국주의(小國主義) 논의가 있었지요. 대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 대외팽창이 일본에 손해라고 지적한 이 흐름은 이후 자유민권운동이나 타이쇼오(大正)민주주의의 형태로 지속되어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소수파의 주장이었고 ‘미발(未發)의 계기(契機)’였지요. 그러나 이런 흐름까지 염두에 두고 일본근대사를 성찰적으로 돌아보지 않는다면 역사문제는 오늘날 일본이 아시아로 돌아오는 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지요. 실제 현실에서 한일간 역사인식의 차이는 양국관계의 커다란 쟁점으로 남아 있잖아요.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생각입니다만, 미국의 하와이 병합 사죄 결의처럼 한일간 역사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사죄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에 그렇게 된다면 매우 뜻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연대해서 새로운 선언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3 양국의 역사인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떠한 역할을 할지 기대가 됩니다. 또한 1995년의 ‘무라야마(村山) 담화’ 즉 최초로 일본정부의 총리(무라야마 토미이찌村山富市)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을 넘어서는, 한층 높은 차원의 선언이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한국에서는 민주당과 일본정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차를 거칠 때 본격적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과 일본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만,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테라시마 솔직히 말해서 민주당정권이 100년을 맞아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본측이 책임을 져야 할 사건이 100년 전에 일어났다고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역사인식의 문제에 대해 더 길게 얘기할 수 없어 아쉬웠다. 현재 일본에서는 이와 관련해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역사이해를 넘어선다면서, 뒤늦게 제국주의 경쟁에 참여한 일본이 처음부터 침략의 의도를 품었던 것이 아니라 조숙한 제국주의국가로 전환해온 복잡한 굴절과정을 겪었다고 설명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런데 긴 시간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