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세계문학을 능동적으로 구성하자

● 지난호 특집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은 시의적절했다. 최근 이에 관한 논의가 문학계와 출판계에서 무성하기는 했지만, 논의의 주안점은 산업으로서의 문학출판의 해외 도서시장 진출이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 우리 문학의 해외 번역·소개 등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들도 나름 중요하기는 하지만, 문학 자체의 소통 가능성에 주안점을 두어 더 진지하고 근본적으로 성찰한 드문 경우가 바로 지난 특집이었다.

특집 글이 모두 관련정보의 충실성과 주제에 대한 성찰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유익했지만, 특히 “작가의 국적과 주인공의 국적이 반드시 ‘한국인’에만 한정되지 않는, 다채로운 ‘한국-문학’이 되기를 꿈꾼” 정여울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한국문학과 한국-문학의 차이에 대해 더 본격적인 논의 전개를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후의 논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한국문학의 분열적이고 다성적인 세계화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될 것이다. ‘세계문학을 위한 초국적인 운동’의 가능성을 제기한 이현우의 글도 의미있는 발제다. 특히 세계종교와 세계문학을 대비하면서 번역으로 국민문학의 경계, 내부와 외부의 장벽이 제거된다면 그것이 곧 세계종교에 상응하는 세계문학일 수 있다는 견해는, 세계문학을 둘러싼 개념의 혼란을 정리해주는 적절한 유비(類比)였다.

오늘날 우리는 문학에서든 사상에서든 이른바 정전(正典)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까지 정전의 대부분은 주류 서양 지식인사회가 규정한 텍스트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텍스트의 권위가 상당정도 무너지고 새로운 권위가 자리잡지는 못한 상황, 일종의 정전 아노미 상황인 셈이다. 이러한 아노미는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아닐지. 요컨대 일방적 수용자가 아닌 능동적 참여자 입장에서, (개념과 작품 모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을 구성해나갈 수 있는 기회다. 창비가 앞으로 그런 기회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 참여자가 되기를 바란다.

표정훈·출판평론가 bookman@empal.com

 

 

원순씨와 남주씨의 수다를 엿듣다

● 요즘 유행하는 알파벳 줄임말을 덧붙여, SD(쏘셜 디자이너) 원순씨와 남주씨의 대화를 정독했다. 두분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사적인 수다를 엿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 불러야 할까? 그동안 보아온 많은 선배활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두분은 분명 인터뷰 자리가 아니라 사석에서도 거리낌없이 이런 이야기를 즐겨 나눌 것이 틀림없다. 이 글을 읽으며 시민운동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하다가 엉뚱하게도 「A.I.」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는 감정을 가진 신형 로봇(Artificial Intelligence)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은 결코 프로그램화될 수 없는 복잡미묘한 판단과 감정 들을 넘나들며 살아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민운동이 위기이든 블루오션을 가졌든 중요한 건 우리 사회가 소위 ‘시민운동’에 내장된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거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프로그램에 결함이 있는지 없는지 따질 새도 없이, 이젠 대용품은 미뤄두고 진짜 인간을 만나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 진짜 인간을 두고 누구는 풀뿌리라고도 하고 누구는 블로거라고도 한다.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진짜 인간으로서 함께 호흡하고 어울리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시간이 걸리고 껍데기가 좀 깨지더라도 부딪쳐 찾아보아야겠다.

장상미·함께하는시민행동 활동가 amy@action.or.kr

 

 

신경숙 작가님께

● 작가님의 새 장편 「엄마를 부탁해」의 첫번째 이야기를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이건 어머니가 아닌 엄마에 관한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을 읽은 순간부터 첫회분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눈물 한방울이 눈가에 매달려 있다가 결국엔 또르르 굴러떨어져 버렸습니다. 집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엄마나 아빠에 관한 글을 읽으면 어김없이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늘 그립고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거든요.

이 소설에서 작가님은 주인공을 ‘너’라고 표현하셨어요. 작가님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여기 설정되어 있는 ‘너’가 작가님 자신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데 말이에요. 십년 전 소설에 관한 이야기나, 약사 여동생 이야기, 더군다나 ‘너’의 직업은 글 쓰는 일이구요. 읽다 보면 작가님 자신이라고 짐작되는데 자꾸 내가 아니라 ‘너’라고 해요. 너의 엄마, 너의 오빠, 너의 아버지, 너의 그 남자. 어쩌면 그건 작가님의 고도의 설정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처럼 보이는 너. 그래도 좋아요. 저는 작가의 이야기, 작가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읽는 편이 소설에 더 푹 빠져들 수 있어 좋아요.

스무살 때는 서로의 등만 바라보는 삼각관계의, 이름도 외자여서 예쁘기만 했던 『깊은 슬픔』의 주인공들에게 빠져서 며칠 동안 헤어나오지 못했어요. 이제는 그 소설을 다시 읽어도 사랑 이야기에 그렇게 가슴 아리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요. 『리진』에서도 콜랭의 사랑을 그리 담백하게 끝내고 리진이 어미로 여겼던 명성황후의 죽음에 그렇게 가슴 저리게 만들었던 지금의 작가님이 지금의 저는 정말 좋습니다. 봄이 오면 전해질 「엄마를 부탁해」 두번째 이야기, 따스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금령 ilem1@hanmail.net

 

 

과학이 하는 일은 과학에 맡겨야

● 지난호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김재영의 촌평을 뜻깊게 읽었다. 과학은 점점 전문가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고, 상대적으로 종교는 대중이 접근하기 쉽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진화생물학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얼마나 지나면 원숭이가 사람이 되느냐’고 묻는다. 이런 잘못된 이해가 널리 퍼진 데는 진화론을 (악질적으로) 왜곡해온 일부 창조론 옹호자들과 부실한 과학교육에 책임이 있다. 과학의 공공적 이해가 왜 필요한지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도킨스의 대중저서들은 과격한 면이 엿보이고 비슷한 논의를 계속하는 경향이 있지만, 종교의 반대쪽 극단에서 대중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과학서적이 대중에게 외면받아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만들어진 신』의 인기는 반가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의 이번 책을 꼼꼼히 읽고 평가한 촌평이 반가웠다.

종교가 만물의 형성에 관한 교리를 신화처럼 간직하고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임무에 충실한다면, 종교 없는 세상이 아름다우리라는 주장은 사라지지 않을까? 신화는 사실만도 아니고 허구만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의 조화가 과학에 영감을 줄 수 있을지언정, 신화 자체가 과학이 될 수는 없다. 과학이 하는 일은 과학에 맡겨야 한다.

김태욱·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kimtaeuk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