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역서로 『우리 집에 불났어』 『마틴 에덴』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공역)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최근 우리 문단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작년 11월 전주에서 개최된‘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인데, 제3세계의 문인들이 서구중심의 세계문학적 발상에서 벗어나 소통의 가교와 문학적 연대를 구축하려는 취지가 뜻깊다. 서구패권주의와 아울러 아시아의 토착적 전통이나 자민족중심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쌍방향 비판’의 필요성을 지적한 것도 값지다.1 또 하나는 지난호 『창작과비평』(2007년 겨울호)의‘세계문학’특집이다. 세계문학의 쟁점을 조목조목 짚는 대담을 비롯하여 묵직한 주제의 평론들, 다양한 발상의 해외작가 발언으로 구성된 방대한 특집은 많은 시사점과 숙제를 안겨준다.
『창비』의 이번 세계문학 논의가 중요한 것은 우리 문학의 미래에 관련된 실천적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부터 자본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국내외에서 세계문학 논의가 등장했고 나도 글 한편을 썼는데,2 그때는 학구적인 관심사에 머물렀던 사안이 지금은 실천적인 과제로 다루어지는 면이 있다. 가령 한·중·일 세 나라 국민문학을 하나로 묶어 세계문학적 지평에서 그 장단점을 비교하는 논의가 그렇다. 10년 안짝의 짧은 기간에 중국의 부상과 동북아 지역경제권 형성,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이라는 역사를 거치면서 이 논의는 우리 문학이 당면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국민문학(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혹은 세계문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나 민족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다룰지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특집 참여자들의 견해는 사뭇 다르며 심지어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이와 연동되어 우리 문학의 현재적 성격과 향후 발전형태(근대/탈근대 문학)에 대한 예측도, 우리 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가치판단도 달라지는 듯하다. 이밖에도‘역사소설’이나‘마술적 리얼리즘’, 판타지 같은 장르나 양식의 활용 문제, 번역의 의의, 한·중·일 작가와 작품의 평가 등 논의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난호 특집 글을 선별적으로 논한 후 미국문학의 현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이 우리의 세계문학 논의에 요긴한 참조점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중·일 문학의 단계론
지난호 특집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한·중·일 문학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가령 대담에서 윤지관(尹志寬)은 “‘베트남이나 중국 소설이 우리 6, 70년대식의 리얼리즘이다, 그런데 일본문학은 그런 단계를 진작 지나서 포스트모던한 대중소설로 간다, 그리고 한국은 그 중간 어디쯤이다’이런 식으로 단순화한다면 좀 지나치겠지만, 일면의 진실은 있다”3고 정리하면서 역사의식을 상실한 가볍고 표피적인 일본문학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단계론적 도식에 입각한 일본문학 비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의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이 도식이 자승자박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좋든 싫든 우리 문학 역시 일본문학과 비슷한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결정론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결정론적 도식이나 일본문학 비판에 대해 우리 젊은 작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최근의 한 좌담4을 참조하면, 그들이 현재의 일본문학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거니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크게 꺼리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박민규(朴玟奎)는 일본문학이 우리 문학보다 앞서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5 그런데 이런 태도 이면에는 “지난 수십년간 그나마 우리가 일군 것은 리얼리즘 하나밖에 없어요. (…)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SF가 있나요, 추리소설이 있나요, 공포소설이 있나요, 판타지가 있나요”6라는 발언에서 드러나듯, 도덕적·예술적 우월성을 내세워온 한국문학이 실제의 문학적 자원은 지극히 빈곤하다는 불만 혹은 자기비판이 깔려 있는 듯하다. 사실 일본문학 비판이 젊은 세대에게 설득력을 지니려면 우리보다 풍부한 일본문학의 대중예술적 자원을 일정하게 평가해줄 필요가 있고,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이후의 일본문학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들을 찾아내도록 애쓸 필요가 있다. 『창비』의 특집 대담에서 (그간 누차 지적된) 하루끼의 허무주의적 역사의식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의 소설적 자원과 호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자상하게 짚었으면, 그리고 젊은 작가 한둘을 그와 함께 거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문학에 대한 좀더 자상한 비평작업도 중요하지만, 앞의 결정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근대적 시민의식이나 예술문화의 형성 면에서 일본이나 일본문학은 소위‘선진’자본주의국가 중에서 모범이라기보다 별종에 가깝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이다. 천황제에 발목잡혀 시민의식은 발육이 부진한데 도리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열망하는 일본사회는, 이를테면 마땅히 밟아야 할‘진도’를 건너뛰고 원숙해진 기형(畸形)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일본문학 역시 모범이라기보다 별종인 것은 현재 지구상에서 진지함을 아예 포기한 듯한 포스트모던한 대중소설이 일본만큼 판을 치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우리 비평가나 독자가 외면하는 한, 앞의 단계론적 결정론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현우(李玄雨)가 정치하고 분별력있는 글솜씨로 백낙청(白樂晴)의 세계문학론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후에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세계종교’론을 원용하여 국민문학의 경계가 제거된‘세계문학’을 또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이런 일본적‘특수’현상에 휘둘린 결과가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카라따니의‘근대문학 종언론’자체가 일본문학의 특수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한 데서 나온 물건이 아니던가.
미국문학의 현황
앞서의 단계론적 도식을 연장하면,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된 나라이자 최고의 패권국인 미국의 문학은 일본문학보다 포스트모던한 대중소설 쪽으로 더 나아갔을 법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 소설문학의 판세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대체로 미국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부
- 김재용, 마카란드 파란자페, 파크리 쌀레의 대담 「유럽중심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시아』 2007년 겨울호 23~24면 중 파란자페의 발언 참조. ↩
- 졸고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20세기 후반 아메리카대륙의 소설문학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이 글의 주된 주장은‘쌍방향의 세계문학’이다. 세계문학이 구미 중심부의‘선진’문학에서 주변부 제3세계의‘낙후된’문학으로 나아가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거꾸로 주변부 민중의 밝은 눈으로 중심부 담론·서사의 서구중심주의나 식민주의를 비판하기도 하는 “쌍방향의 교호작용”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52면). 세계문학의 쌍방향성은 비판이자 배움을 뜻한다. 주변부가 중심부의 성취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제3세계의 토착적 전통이나 민족주의에 매몰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
- 윤지관 임홍배 대담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 『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35면. ↩
- 이기호 정이현 박민규 김애란 신형철 좌담 「한국문학은 더 진화해야 한다」, 『문학동네』 2007년 여름호. ↩
- 그는 한국 독자들이 일본소설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해방된 후 지금까지 지구의 어떤 나라가 아닌, 일본을 쌤플로 발전하고 쫓아온 나라예요. (…) 일본사회는 한국사회와 가장 닮아 있는 사회죠. 그러면서 진도가 우리보다 앞서 있는 거예요. (…) 게다가 글을 쓴 역사가, 또 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풍부해요.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이기호 외 좌담 109면. ↩
- 같은 글 10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