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대담: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

 

 

ⓒ이영균

ⓒ이영균

 

윤지관

문학평론가,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저서로 『놋쇠하늘 아래서』 『리얼리즘의 옹호』, 역서로 『오만과 편견』 등이 있다.

 

임홍배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교수. 역서로 『루카치 미학』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주요 논문으로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등이 있다.

 

 

때: 2007년 10월 20일 오전 10시

곳: 세교연구소 회의실

 

 

林洪培
통상적으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지역·민족문학의 산술적 총합 또는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문학사적으로 보면 민족적인 편향성을 넘어 근대 세계체제의 부상에 대응하는 문학운동 내지 기획의 의미를 지닙니다.

임홍배 이번호 『창작과비평』의 특집 대담으로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이란 주제를 마련했는데, 문학평론가이자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 계시는 윤지관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세계문학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 있으니까 독자들의 실감에 닿는 노벨문학상 얘기부터 해보죠. 얼마전에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었고 한국 작가의 수상을 기대했지만 아깝게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문학이 번역된 짧은 역사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 문학이 많이 세계화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노벨문학상 백년을 돌이켜보면 거의 반세기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서구문학에서 수상자가 나올 만큼 서구중심적 경향을 보이다가, 70년대 이후로는 상대적으로 비서구 쪽에서도 여러 작가들이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이번에는 도리스 레씽(Doris Lessing)이라는 영국 작가가 받았죠?

 

노벨상 열망에 깔려 있는 의식구조

 

尹志寬
지역적으로 근대성이 발현하는 양상에 따라 그 민족의 독특한 성과들이 나오게 되고 그런 성과들이 모여서 세계문학을 형성하는 것이지, 세계문학의 정형이 이미 존재하고 그것에 도달하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윤지관 예, 금년 노벨문학상이 그렇게 되어서 문단에서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실망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꼭 노벨상이란 걸 받아야 국민문학 내지 민족문학의 가치가 확보되는 건 아니겠지만, 역시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한국문학을 바라보자면 이런 국제적으로 인정된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있느냐 없느냐가 흔히 준거가 되기도 합니다. 아까 소개하신 대로 제가 지금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에서 일하다 보니까 이번에도 남달리 관심있게 보게 됐어요. 노벨문학상 수상이 비단 문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함축성이 큰 문화적인 사건이긴 합니다만, 비록 못 받았더라도 해마다 관심을 모으는 고은(高銀) 시인이나 소설가 황석영(黃晳暎)을 비롯한 우리 작가들이 해외문단에서 주목받고 또 최종후보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증거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임홍배 한국문학이 식민지시대, 분단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사의 현실을 천착한 성과를 인정받게 되고, 그 문학적 성취들이 한반도와 주변 세계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통해 세계문학적 지평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윤지관 그렇습니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나 반응이 좀 지나친 것 아니냐, 후진적인 것 아니냐 하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꼭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나 싶어요. 이런 현상에는 우리말로 씌어진 창조적인 성과를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의 욕망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 자체를 민족주의적이라고 비난할 소지가 없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이 문화적 인정 욕구에도 먹고사는 일 못지않은 진정성 같은 것이 있다고 봅니다. 노벨상이 서구에서 주는 것이고 또 이번에 레씽도 그렇듯이 구미 작가들이 주로 수상하는, 유럽중심·서구중심적인 면이 있단 말이죠. 이런 가운데, 우리가 이제 먹고살 만한 처지가 되었다고 다가 아니고, 그들 못지않은 창조성을 지닌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열망이 깔려 있다고 봐요.

사실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가 수상했던 1994년 이래 10여년간 영국 작가 2명을 포함해서 수상자 대부분이 유럽 작가들입니다. 문학에서는 유럽중심주의가 더 강화되는 느낌마저 있어요. 우리로서는 이런 현상 자체를 냉정하게 읽어야지 일희일비할 필요야 없겠지요. 또 뒤집어보면 올해의 레씽이든 재작년의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든 의미있는 작품활동을 벌써 수십년 전에 끝낸 작가들이 수상자로 선정되는 것은, 유럽문학에 이들 이후로 그만한 활력을 보여준 사례가 드물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합니다. 오히려 세계문학이라는 구도에서 보자면 우리 문학을 비롯한 비서구권 문학의 활력이 기대되는 대목이지요.

 

괴테와 맑스, 그리고 세계화시대의 세계문학

 

임홍배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계문학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여러 견해와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간단히 개념을 짚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통상적으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지역·민족문학의 산술적 총합 또는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요.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괴테는 민족적인 편향성을 넘어 적극적인 상호 소통과 교류를 추구하고 인적 교류와 연대까지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로 세계문학을 주창했죠. 근대 세계체제의 부상에 대응하는 새로운 문학운동 내지 기획으로 이해한 셈이지요.

그 조건으로 괴테는 자본주의 발달과 국가간 교역의 증대를 꼽았고요. 그런 측면에서는 나중에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세계문학의 이념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또한 괴테는 특정한 민족문학을 모델로 삼아서도 안된다고 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위계적 통합을 경계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사적 시야에서 당시 독일 현실을 탐구하는 창작실천을 통해 세계문학의 지평을 개척해나갔지요. 가령 서구 교양소설의 전범으로 알려진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구체제에서 시민사회로의 이행기라는 시대적 배경하에 한 인간이 어떻게 온전한 인격체로 성숙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는 시민적 가치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동체의 탐색을 주제로 삼고 있어요. 그리고 필생의 대작 『파우스트』는 괴테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인류사와 세계사’자체를 다룬 것이라 할 수 있죠.

윤지관 세계문학의 이념을 말하자면 역시 말씀하신 괴테의 뜻부터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는데…… 이런 질문이 먼저 떠올라요. 노벨상 얘기를 할 때도 항용 따라나오는 것인데, 한국문학이 과연 세계문학인가, 세계문학으로 인정받을 만한 성취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한국도 세계의 일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문학도 세계문학이다 하면 간단하지만, 문학의 수준이나 혹은 어떤 목표로서의 세계문학에 얼마나 다가서 있는가 하고 물을 때는 달라지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괴테의 세계문학 개념이 지금 다시 얘기될 수 있는 근거랄까 당위성이 있겠어요.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고 통칭되는 세계 자본주의 발전상의 국면과 맞물려서 서구 문학이론에서도 근년에 세계문학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던 거구요. 세계화시대라고 해서, 전지구적으로 대량 유포되는 베스트쎌러들, 해리포터 씨리즈라든가 『연금술사』 『다빈치코드』 같은 작품들이 저절로 세계문학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괴테의 시대에 지구화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문제의 단초 같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괴테나 맑스의 세계문학 이념이 가지는 현재성이 있겠습니다.

임홍배 그런데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에 자본주의의 전일적인 지배라는 새로운 국면의 세계화시대를 맞아, 괴테가 말한 세계문학이 현실에서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그러니까 자본의 논리에 편승한 문화상품의 세계적 유통을 부추기는 양상으로 쏠릴 가능성이 전에 없이 커진 것 또한 사실이에요. 이런 추세에 대응하는 우리 나름의 문학을 추구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어요. 민족적인 것에만 집착해서도 곤란하지만, 추상적인 세계시민주의를 앞세우는 것도 작금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논리로는 공허해 보입니다. 가령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울리히 벡(U. Beck) 같은 사회과학자들이 얘기하는 ‘세계사회’론도 그런 맹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세계화의 대세가 지구적 차원의 양극화와 국지적 차원의 국가간 갈등을 격화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민족 내지 국민국가가 중요한 준거가 되지 않을 수 없지요.

윤지관 그렇습니다. 세계화와 민족국가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듯이, 세계문학을 얘기할 때 민족문학이나 국민문학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세계문학이 전체 민족문학의 총합이라는 점도 있어서 그렇겠지만, 민족문학 자체가 세계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이룩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문학에서의 민족문학론도 그렇구요. 크게는 근대성의 문제, 근대라는 전지구적인 문제에 지역적으로 혹은 민족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민족문학 혹은 국민문학이 발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민족문학의 시대가 가고 세계문학의 시대가 온다는 발언을 괴테가 했고, 또 그 20년 후쯤에 맑스도 『공산당선언』에서 같은 취지의 얘기를 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직후 유럽에 극도의 민족주의가 팽배하면서 그런 세계문학적인 기획은 크게 후퇴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괴테의 발언도 액면 그대로가 아니라 세계문학의 이념에 비추어 민족문학의 내용을 제대로 채워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던 것 같고, 또 실은 당시보다는, 말하자면 그런 기획이 과도한 민족주의 때문에 불발로 끝난 제국주의시대보다는 지구화가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더 적실성이 있는 그런 이념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임홍배 사실 괴테 당대의 유럽 정세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혁명과 나뽈레옹전쟁의 여파로 국민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쟁패전이 벌어지면서 민족주의가 발호하고, 전후 유럽질서의 복고적 보수화와 제국주의적 팽창이 그런 갈등을 봉합하는 형국이었죠. 그러니까 당시에도 온전한 뜻의 세계문학은 국수적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모두 넘어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던 거죠.

윤지관 괴테 자신도 중국이나 페르시아 문학 등 외국문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기본적으로 타민족의 문화나 타자에 대한 인정, 개방성, 관용, 대화의 정신 등을 세계문학 이념의 요건으로 제시하기도 했어요. 나뽈레옹전쟁 이후에 일시적으로 팽배하던 국제주의 흐름과도 연관되는데, 국제적인 조건 면에서는 1990년대 탈냉전 기류 속에서 서구에서 다시 세계문학 논의가 나오기 시작한 것과 아주 흥미롭게 맞아떨어져요. 그런데 괴테한테도 그런 요소가 있었지만 세계문학이란 것이 때로는 유럽문학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서는 서구중심의 정전으로 고착되어온 면이 컸잖습니까? 우리 독서계에서도 세계문학 하면 서구 명작이고, 비서구권은 가물에 콩 나듯 하고, 한국문학은 거기 끼지도 못하고 따로 취급되어왔고 말이죠.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탈식민주의의 이론적인 영향도 있고 해서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새로 그려야 한다는 논의가 서구 쪽에서 나오고 있어요. 괴테의 이념도 서구문학의 보편성 논리로 왜곡되어온 부분은 그것대로 비판하고, 애초의 이념은 살려내는 그런 태도가 중요하겠습니다.

임홍배 우리 문학에서 보면 바로 그런 비판적 문제의식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되살려서 진전시킨 경우가 지난 40여년 동안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화두로 견지해온 백낙청(白樂晴)의 비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간의 논의맥락을 여기서 두루 살피긴 어렵겠습니다만, 9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문학의 새 단계’를 거론하고 특히 근년에 ‘지구화시대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강조하는 대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냉전체제 붕괴와 더불어 자본과 힘의 논리가 주도하는 세계화의 파고에 대응하면서, 동북아시아를 한 축으로 전개되는 세계정세의 흐름과 분단체제 극복의 과제가 더욱 긴밀하게 맞물리는 양상을 직시할 필요가 있겠지요. 거칠게 말해 분단체제 극복이 그냥 대세를 추종하는 통일에 안주하자는 게 아니라 남과 북에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일구는 방식으로 통일을 하자는 것이라면, 그동안 한반도 질서를 규정해온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에도 일정한 변화를 동반해야만 가능하겠지요. 지금 한반도 현실에서 민족적인 과제와 세계문학의 이념을 함께 사고할 필요성은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윤지관 워낙 한국문학이든 외국문학이든 민중적인 혹은 제3세계적인 시각에서 보자는 민족문학론의 전제 자체가 세계문학의 지향이나 이념을 함축하고 있었던 셈이지만, 역시 동구권 몰락과 냉전구조 해체로 대변되는 1990년 무렵이 세계문학 논의에서도 한 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크게 보면 장기적인 흐름으로서의 세계화가 이 시기부터 강하게 부각되면서, 또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민족문학 논의에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일부 탈근대론자들이 민족 범주의 해체나 소멸을 말하고는 있지만, 기실 세계화 국면에서 가령 동구권의 경우가 그렇듯이 민족이 새로운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사고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세계화가 실은 미국문화 중심의 획일성을 강요하면서 다문화주의의 외양을 띠고 있는 양상이 세계문학의 전열 자체에 위기를 불러오고 있고,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적인 이념에서 자양을 얻기 위해서는 세계체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 백낙청 비평의 문제의식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 제3세계적 시각이라는 것이 세계를 셋으로 나누어서 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자는 문제의식이기 때문에, 민족의 위기란 것도 결국 세계체제의 문제와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