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닫힌 미래’와 싸우다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 등이 있음. jwhyi@naver.com
1. 들어가며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희망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이 없다면 우리가 삶을 이어가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주체가 꽉 막힌 현실을 돌파하여 희망을 자신의 수중에 거머쥘 수 없는 형편이라면 얘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때 희망은 생(生)을 위한 자산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부패되어 이내 절망으로 변질되고 마는 치명적인 위험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절망의 위험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 따위의 유행어들은 어느새 우리가 냉소와 체념, 자조의 감각으로 충만해졌음을 보여준다. 문학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문학이 사회를 투명하게 되비추는 거울은 아니지만, 작가는 엄연히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작가들이 호흡하는 사회의 공기는 작품 속에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근래의 문학에서 희망의 전언보다 묵시론적 파국을 쉽게 감지한다면, 그리고 폐쇄적인 골방에서 자신만의 유희에 골몰하는 인물에 좀더 익숙해졌다면, 그것은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남긴 그 흔적들을 거듭 발견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정치적/정신적 한계에 고여 있지 않으며 그 한계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돌파해내려 고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미학적 충격과 감동의 출처가 바로 이러한 성공적인 돌파의 산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성급한 절망이 습관적으로 발설되고 비루한 자조와 체념이 지루할 만큼 넘쳐나는 암울한 현실에서 절망을 과장하지 않고 의연하고 깊은 호흡으로 희망의 싹을 돋우어내는 작업의 소중함은 더욱 절실해지며 그러한 작업을 날카로운 감식안으로 응원해주는 비평 역시 긴요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적극적으로 돌파하려는 실천적 의지나 희망의 분위기로 채색된 미래에의 전망이 서사의 표면에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작품이 그저 현실을 체념적으로 수락했다거나 절망적인 현실에 짓눌려 있다고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삶이 때론 희망도 절망도 상관할 수 없는 자리에서 제 몫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처럼, 문학 역시 희망이나 절망이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비결정의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의연하고 깊은 호흡으로 희망의 싹을 돋우어내는 작업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어떠한 종류의 희망(의 생산)과도 무관한 자리에서 삶을 견딘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적 작업 또한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비록 겉으로는 희망과 무관한 듯 보이는 그 작업들 역시 세계와의 치열한 대면을 통해 생성된, 현재를 감당하는 문학적 작업의 일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감당하고 견딘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고쳐 생각할 필요가 있다. 흔히 감당한다는 것은 능히 견디어냄을 뜻하며, 견딘다는 것은 올바른 방향성을 지향하는 주체가 그것을 왜곡시키려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지켜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주체의 진정성은 견딤의 형식을 구성하는 내용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은 참담한 부끄러움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변질(變質)이나 변절(變節)이란 단어가 모두 품고 있듯이 견딘다는 것은 ‘변(變)’함과의 투쟁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곧고 염결하게 지켜내는 것만을 진정한 견딤이라 할 수 있을까. 굳게 견디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갖 변형(變形)들은 그저 부끄러운 흔적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견딘다는 것은 뒤틀림의 반의어라기보다는 그것조차 포함하는 생존의 형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한 의지와 굳은 마음으로 미래의 희망을 차분히 직시하며 전진하는 것이라기보다 온갖 기형(奇形)으로 점철된 마음과 육체를 끌어안고 자신의 생을 겨우 밀고 나가는 일에 더욱 가까운지도 모른다.
2. ‘쓰레기’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
여기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돌연 뿌리 뽑힌 후 밑바닥 삶으로 내쳐진 한 여자가 있다.1) 한때 대학 강사였던 그녀는—작품 속에서는 ‘라오슈’(중국어로 ‘선생님’의 뜻)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철학과가 다른 비인기 학과와 묶여 인문학부로 통합되고 철학과 관련된 교양수업이 폐강되면서 (…) 대학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254면) 되었으며 결국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에 이르고 만다. 그녀는 “어디로든 발을 뻗어야 하지만 내딛는 곳이 곧 나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분명하게 의식해야 하는 불안한 피곤”(253면)에 휩싸인 채 하루를 버텨가는데, 이십년 가까이 대학에서 강의해왔지만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그녀에게 이러한 불안의 근거는 너무나 명확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은 비단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는, 한때 그녀의 학생이었으며 현재는 독일에서 유학 중인 중국인 메이린 역시 비슷한 종류의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산성과는 완전하게 무관한 산책”(252면)으로 하루를 소요하는 메이린의 처지는 라오슈의 그것에 비해 낫다. 그러나 라오슈가 편의점과 임대아파트로 상징되는 ‘속된 세계’의 이방인인 것처럼 메이린 역시 독일이라는 낯선 세계에서 철저히 이방인으로서의 감각만을 부여받는다. 물론 이것은 (라오슈의 경우와는 다르게) 메이린 스스로가 선택한 삶이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유대관계의 부재에서 오는 고독과 불안의 감각이 그녀의 삶에 깊이 스미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메이린은 자신의 삶을 “해변에 버려진 종이상자처럼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조금씩 무너지고 있”(252면)는 것으로 느끼는데 물에 젖은 종이상자의 흐물흐물한 질감은 그녀의 삶이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단단한 지반과 대비되면서 존재의 필연성을 상실하고 우연과 임의성으로 점철된 세계의 불안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현대인의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2)
중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한국을 거쳐 독일로 이어지는 메이린의 궤적은 국경 간 장벽을 허물고 자유로운 인구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 세계화의 효과이리라. 하지만 메이린이 산책 중에 만난 청년 노숙자 루카스는 세계화가 자본의 세계화인 동시에 사회적 위험의 세계화이며 존재론적 불안의 세계화이기도 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민자 출신의 루카스는 독일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서 한때 독일 회사에 고용되어 일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일시적”(263면)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루카스의 모습은 일상(日常)이 단지 일시(一時)적인 것으로밖에 허락되지 않는 세계적 현실을 잘 보여주거니와 작품을 지배하는 전반적인 불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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