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세계체제의 (반)주변부와 근대소설

식민지근대의 극복을 화두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평론집으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이 있음. jatw19@moiza.chonnam.ac.kr

 

 

1. 글머리에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라는 서사의 형식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논의는 지역의 문화적 현실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그중 세계체제 (반)주변부 근대소설의 ‘기원’을 식민지근대로 잡는 논자들의 경우는 이언 와트(Ian Watt) 식의 입론을 일종의 대전제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1 산업혁명으로써 서구의 근대가 출범하고 시민계급이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실주의에 근거한 장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태어난바, 18세기부터 성세를 이루기 시작한 소설이 본격 제국주의시대를 맞아 식민지로 수출된 결과 ‘아류의 서사’가 발생했다는 가정이다.2 이 논리가 20세기 식민지조선에 적용되는 경우 그 산파역은 동아시아에서 서양문물의 수입에 가장 적극적이던 일제(日帝)로 설정된다. 이를테면 쯔보우찌 쇼오요오(坪內逍遙, 1859~1935)의 『소설신수』(小說神髓, 1886)라는 소설론을 식민지작가들이 탐독하는 과정에서 ‘노블’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한층 기세등등해진 탈민족담론과 문화연구의 합작으로 그 가정은 한국의 국문학계에서도 자명한 공리로 승격된 듯한 느낌이다.

김흥규(金興圭)의 「한국 근대문학 연구와 식민주의」(『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이하 「근대문학」으로 표기)가 필자의 흥미를 끈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민족문학운동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한국문학 연구의 패러다임에 대한3 문제제기는 사실 꽤 있어왔다. 하지만 비판의 타당성 자체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예는 드문 것으로 안다. 김흥규의 논문이 바로 그 검토에 해당한다. 그는 사뭇 다른 학문적 이력과 경향의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김철(金哲)과 황종연(黃鍾淵)이 “근대를 식민 기원(紀元)의 시간구획 속에서 보고 그 외래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역사인식”(313면)을 공유한다고 판단하고 그런 역사인식이 “모든 반식민운동과 민족담론들을 제국주의가 발신하는 일방적 회로 속의 반사체(反射體)로, 그리고 대개는 저급한 복제품으로 전제하는 담론틀”(308면)을 전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논쟁이 예견되는 대목인데, 두 논자가 어떻게 대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우선은 이 논문이 제출한 쟁점을 제3자가 받아서 발전시켜보는 것도 논쟁에 참여하는 한 방식일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특히 「근대문학」의 3절(‘번역된 근대’와 소설/노블), 즉 “노블이라는 방사체(放射體)가 세계 각지에 침투·적응하여 장르적 식민화를 달성한다는 ‘노블 제국주의’의 보편성에 대한 방법론적 의심”(318면)이 두 논자의 학구에 결여되어 있음을 김흥규가 논박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물론 이때도 “‘노블 제국주의’의 보편성”을 주장해온 서양 근대 장편소설의 독보적 성취는 성취대로 인식해야 하는 숙제는 남는다고 보지만 여기서는 김흥규의 문제의식을 근대문학의 영역, 그중에서도 소설 장르에 집중해 좀더 심화해볼 생각이다. “전근대 소설의 연속적 진화라는 기대와 19세기 서구소설 모델의 이입(移入)·토착화라는 설명방식을 모두 접어놓은 지점”(322면)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가 던진 물음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국내외의 괄목할 만한 사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브라질의 탁월한 비평가인 호베르뚜 슈바르스(Roberto Schwarz, 1938~)의 문학론을 살펴보고4 그 연장선에서 1930년대 식민지근대를 대표하는 장편소설 가운데 하나인 염상섭의 『삼대』를 읽으면서 이 장편의 현재성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2. 식민주의와 (반)주변부 문학의 대응

 

20세기 초입에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경로를 통해 ‘근대’에 진입한 한반도 지역에서, 한문소설과 국문소설로 이분화된 전근대 서사양식의 연속적 진화를 논제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조선후기의 국문소설과 갑오경장(1894~95) 이후의 ‘신소설’ 및 1930년대의 장편소설을 일직선상에 놓기는 힘들다.5 다른 한편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소설사적 단층’이 개화기의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식민통치 또는 반식민통치를 받은 서구 바깥 수많은 나라의 문학에도 단층의 선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어진바, 식민지배의 시공간적 관철 양상이 상이한만큼 그 양상의 소설적 구현도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대륙 등 지역에 따라 제각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수탈과정에서 식민지와의 직간접적인 문화 간섭 또는 접촉을 피할 수 없었던 ‘본국’도 모종의 ‘감염’은 불가피했을 테니, ‘노블 제국주의’의 본산인 영국에서조차 소설 장르가 돌연변이 없는 진화를 거듭했다는 식의 가설을 세우기는 어려울지 모른다.6

반면에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떨어진 나라에서의 단절이 한층 급격하고 그에 대한 대응도 서구의 문학과는 달랐으리라는 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통과의 단절이 폭력적으로 관철된 식민지 현실에서 “전근대 소설의 연속적 진화”란 낭만적인 환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서구 서사모델 대 전통 서사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 과정에서 들어온 서구의 문학(개념)으로 인해 식민지의 서사양식에 어떤 형질변화가 발생했으며, 그 변화는 과연 식민주의에 대한 창의적인 대응에 값하는 것인가가 핵심적인 물음이다. 만약 ‘모든 근대문학은 식민지근대의 문학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면 더욱이나 그렇다.

여기서 이 물음을 환기한 것은, 전근대 소설의 연속적 진화나 서구소설 모델의 이입·토착화라는 “설명방식을 모두 접어놓은 지점”이라는 것 자체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담론의 진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확보해야 할 과제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외국의 많은 비평 사례 가운데 슈바르스를 꼭 집어 논하는 것도, 마샤두(Machado de Assis, 1839~1908)로 대표되는 19세기 브라질 근대소설의 성취를 다각도로 해명한 그의 이론적 탐구야말로 바로 그 지점을 선취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그 너머를 향한 창조성의 성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슈바르스와 그가 논하는 작가 모두 국내 독자에게는 낯선만큼 창비 지면에 처음으로 소개된 「주변성의 돌파」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이 평문의 문제의식은 “유럽의 사회사·문학사의 경로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내적 필연성을 상실하는 주변부 국가에서는 사실주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115면)라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슈바르스는 이에 대한 정답이 있을 수 없음을 시인하면서 19세기 후반 서구 중심부에서는 거의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주의가 마샤두라는 소설가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넓게 보면 「주변성의 돌파」는 선배 작가들이 빠져든 서사의 교착상태를 마샤두가 어떻게 타개해나갔는가에 대한 비평적 해명이다. 동시에 오랜 기간 뽀르뚜갈의 식민통치를 받는 과정에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서구의 문학양식이 ‘원천담론’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브라질 문학의 주체 형성에 대한 역사적 탐구이기도 하다. 슈바르스는 “근대국가로서의 심각한 약점을 인식하여 유럽문명의 기본요소들을 흡수하고 해외의 새로운 발전을 따라잡는다는 애국적 과제”(120면)가 제기되지만 식민성의 폐습이 그같은 과제의 실행을 가로막는 신생국 브라질 특유의 온갖 (신)식민지적 질곡을 예시하면서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문학의 분투를 기술한다. 최종적인 논점은 마샤두의 걸작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The Posthumous Memoirs of Brás Cubas, 1880, 이하 『사후 회고록』으로 표기)이 식민주의에서 발원한 역사와 문학의 모순이라는 이중 질곡을 어떤 방식으로 돌파했는가를 밝히는 데 놓여 있다.

슈바르스의 해명은 일종의 비교문학적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한편으로는 “사실주의를 진지하게 시도한 최초의 브라질 작가”인 알렝까르(José de Alencar, 1829~77)의 문제작 『씨뇨라』(Senhora, 1872)가 여러 미덕에도 불구하고 “발자끄 소설의 위대한 효과 중 하나인 주요 갈등과 부수적 일화 간의 근본적 통일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을 따지면서(123면), 그같은 한계가 깨끗하게 극복되는 서사적 성취를 마샤두의 소설에 대한 분석으로써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마샤두 소설의 초기 국면과 원숙기 사이의 단절 양상을 보여주는바, 그는 처음에는 노예제, 가부장제, 봉건적 후견인제 등 전근대 구습이 자유주의 근대와 뒤엉킨 브라질사회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온정주의(〓서구 휴머니즘)를 가동시켰지만 그 한계를 절감하고 전혀 새로운 서사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이다.

슈바르스는 그것을 변절자 서사(turncoat narrative)로 규정한다. 이는 로런스 스턴(Laurence Sterne, 1713~68)이나 디드로(Denis Diderot, 1713~84) 등이 표방하는 18세기 유럽의 메타서사에 대한 혼성모방이라 할 만한 것이다. 마샤두는 서사의 관점을 브라질 지배계급의 한 전형적 표상인-물론 그의 목소리는 모든 세속적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망자(亡者)의 것으로 설정된다-상류층으로 바꾸고 그의 내면을 스스로 까발리게 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가진 자의 휴머니즘이 안고 있는 관념성에서도 탈피하게 된다. 이제 망

  1. Ian Watt, The Rise of the Novel: Studies in Defoe, Richardson and Field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7, 국역본 『소설의 발생』, 강유나·고경하 옮김, 강 2009.
  2. 영미 학계에서도 이런 가설의 문제점을 반박한 저서는 이미 여럿 나와 있는 것으로 안다. 그중 Margaret Anne Doody, The True Story of the Novel, Rutgers UP 1997, 특히 11장과 12장 참조.
  3. 김흥규는 그 패러다임을 “‘민족이라는 인식단위에 집착한 연구, 근대를 향한 단선적 진보사관, 그리고 이들을 희망적으로 결합시킨 내재적 발전론의 구도’”(300면)로 정리했다. 이에 대해서는 4절에서 다시 거론하겠다.
  4. 슈바르스의 평문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불과 2년 전이다(「주변성의 돌파: 마샤두와 19세기 브라질 문학의 성취」, 황정아 옮김,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원제는 “A Brazilian Breakthrough,” New Left Review 2005년 11-12월호).
  5. 이에 대해서는 특히 『흔들리는 언어들: 언어의 근대와 국민국가』(성균관대출판부 2008)에 실린 임형택의 「소설에서 근대어문의 실현 경로」 외 몇몇 논문 참조.
  6. 프랑꼬 모레띠에 따르면 1740~1900년에 이르는 기간에 영국소설에는 무려 44개의 소장르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는 이들 장르의 부침이 “여섯 차례의 주요한 창조성의 분출”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제시하는데, 아무튼 ‘노블’(Novel)의 본고장에서도 연속적 진화는 하나의 관념일 뿐임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Franco Moretti, Graphs, Maps, Trees: Abstract Models For a Literary Theory, Verso 2005,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