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어떤 시대인가

 

세계화와 국민경제의 긴장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현황과 대안

 

 

유철규 劉哲奎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경제학. 편서로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과 21세기 한국경제』가 있음. yoocg@mail.skhu.ac.kr

 

 

오늘날 진행되는 세계화(globalization)는 ‘자본’의 세계화이고, 구체적으로는 국제적 금융자본을 필두로 하는 초국적기업의 자유화이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세계화를 경제개방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대다수 국민경제들에 있어 세계화는 재앙이 되고 있다. 세계화의 혜택과 위험은 각 국민경제에 대단히 불균등하게 작용하며, 그 혜택은 세계화를 주도하는 소수의 국가들, 그리고 이들 구가 내에서도 소수층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많은 경우 세계화는 국민경제의 조정기능을 약화시킴으로써, 국민경제의 내적인 발전동력을 파괴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기도 한다. 세계화에 따른 국민경제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한국경제도 외환위기 이후 세계경제로의 통합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취약성이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외국 금융투자가들의 손에 국민경제의 운명을 내맡기지 않으면서 세계화라는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버리고 국민경제의 내적인 연관성을 높일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공존할 수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전략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국민 다수의 민주적 참여를 도모할 수 있는 개혁방안들이 고안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적 참여는 우리 사회가 자본의 해외탈출을 초래하지 않고도 새로운 개혁방안들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1. 세계화와 국민경제

 

세계화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유행어이다. 세계화란 금융자본을 핵심으로 하는 자본의 세계화이며, 이를 이끌어가는 실체는 초국적인(transnational) 기업이다. 현재의 세계화는 바로 전세계가 초국적기업들간의 경쟁과 각축전의 장소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초국적기업들은 전세계를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엮어가는 가운데, 국민국가라는 경계를 무너뜨려야 할 장애로 여긴다. 국민국가들간에 존재하는 상이한 정치권력과 제도, 그리고 역사적 차이마저도 제거되어야 한다. 최소한 경제활동의 공간을 단일하게 통합할 만큼은.

한편 국민국가는 자본만큼 세계화되고 자유화될 수 없기에 거기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이 바뀌어가는 데 참여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름 모를 투자가들과 초국적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운명이 좌우되는 데 저항한다. 즉, 사소한 수익률의 차이로 국제자본이 대량으로 유출입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의지나 잘잘못과 무관하게 삶이 극도로 불안정해지는 왜곡된 자본의 세계화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의 삶을 그나마 덜 위협하는 방식으로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제자본의 활동이 국민경제의 발전에 봉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또 국민경제 내 생산과 소비, 투자와 저축 간에 상당한 연관성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이때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보루의 하나가 국민국가의 정치적 권력이며, 이를 통한 경제에 대한 의식적 개입이다. 민주주의는 자본 세계화의 희생자가 될 위험에 처해 있는 이들이 스스로 국가권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에, 그 발전도 필수적이다.

오늘날 세계화가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발전과 충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유권자들의 경제적 생존과 ‘모든’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형평과 공공의 복리라는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시장경제에서는 기업가적 자유와 경쟁에서의 승리가 우선적인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승리자의 권리가 관철되며 경쟁의 패배자에 대한 배려는 없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간의 균형은 각 국민국가의 내부적 조정기능에 의해 달성될 수밖에 없는데, 자본의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기업가와 주주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킴으로써 양자간의 균형이 붕괴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힘으로 표현되는 자본의 세계화와 국민국가의 이해의 대립 및 충돌은 단순하지 않다. 비록 국민국가의 권력이 초국적자본의 활동에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초국적기업들의 활동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개별 국민국가의 정치권력과 정책적 개입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시장’(market)은 법률과 관습을 포함하여 특정한 제도적 틀 속에서만 작동할 수 있으며, 스스로는 자신이 움직일 비경제적(혹은 비시장적) 틀과 조건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의 제도적 틀과 정치적 환경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개별 국민국가의 정치적 권력일 수밖에 없다. 즉, 한미·한일 자유무역협정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도, 유럽시장의 통합도, 그리고 IMF(국제통화기금)를 통한 개발도상국의 시장주의 개혁도 최종적으로는 관련된 국민국가들의 정치권력이 직접 행사되고 개입된 결과이다. 결국 초국적자본의 활동은 국민국가(혹은 국민경제)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진행되는 자본의 세계화 과정은 대단히 불안정하며 모순적이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은 초국적화하는 자본의 활동을 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계속 심화될 것이다.

금융자유화를 중심으로 해서 자본에 대한 사회적 규제의 폐지는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다음 세 가지 측면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대다수 국가에서 정책자율성의 위축에 따른 국내적 불안정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업 문제나 사회복지 문제의 개선을 위해서 투자 확대나 정부지출 증가가 필요하더라도, 이를 위한 이자율 및 세율 조정은 곧바로 자본의 국외 유출을 초래함으로써 사실상 정책의 유지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단기자본의 이동인데, 만약 국내든 국외든 투자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이 시행되면, 이들은 그 국가로부터 자본을 빼서 해외 단기자산에 투자할 것이다. 어떤 지역에 얼마나 어떤 내용의 투자를 할 것인가에 대한 자본의 결정력이 증대함에 따라 소득 재분배, 환경문제, 복지, 노동조건 등을 둘러싼 국내의 갈등은 첨예화할 소지를 안고 있다. 둘째, 현재의 세계화 추세가 세계경제의 3극인 북미, 서유럽,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제한되고 여타 지역은 배제되는 경향을 띰으로써 국가간·지역간 불균등성이 커진다. 70년대 들어 오일달러의 환류(還流)가 개발도상국의 광범한 외환위기로 마감된 이후 최근까지 3극 지역과 그외 지역 간의 경제적 연관성이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세계시장의 통합과 더불어 국제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어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주 지적되는 것이지만 금융자유화가 투기적이고 비생산적인 금융활동을 촉진한다는 점이다. 투기활동에 의한 국제금융시장의 위기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화에 대응해 국민경제의 지속적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을 병행시킬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의 고안이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다.

 

 

2. 아시아 경제위기와 세계경제의 불안1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는 세계경제의 통합과정이 국민경제에 일으킨 마찰과 긴장의 한 예이다. 아시아 경제위기의 전개를 둘러싸고 상이한 주장들이 대립했지만,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있어서의 아시아 경제위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로, 위기 진

  1. 이 절은 유철규 「구조조정의 늪: 신자유주의 개혁의 함정」, 윤진호·유철규 편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과 21세기 한국경제』(풀빛 2000)에 의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