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세뿔베다와 라틴아메리카 문학 번역의 문제
송병선 宋炳宣
문학평론가,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저서로 『가르시아 마르케스』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과 한국문학』 등이 있음. avionsun@ulsan.ac.kr
1.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과 우리 문학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동향을 살펴보면, 과거에 비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상당히 약진했음을 알 수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국내 독자와 출판사에게 홀대를 받았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지금은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현상은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 현대작품으로는 드물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픽션들』(Ficciones)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백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두 작가의 작품은 교양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들어 국내의 유명출판사들이 라틴아메리카 문학 출판을 본격적으로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붐’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시장성이 국내에 어느정도 확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1990년대부터 우리 문학계가 경험하고 있는 ‘문화정전’(cultural canon)의 변화와 관계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문화정전은 당대의 사상과 미학적 선호도 등에 의해 확립된다. 이것은 오래 지속되기도 하지만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타국에서 유입되는 문화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지닌 세대들에 의해 바뀐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우리 문학계의 정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면서 수용되기 시작했고, 또한 그런 변화를 가속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의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이나 신진비평가들은 당시 소개되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접하면서 종래의 사실주의 문학관을 버리고 환상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핵심인 메타텍스트, 다성성, 대중예술과 전통문학의 접합을 통한 가짜 사실주의와 보편적 세계주의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환상적 사실주의와 상호텍스트 기법이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켰음을 깨달았다. 이런 정전의 변화과정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에 선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은 80년대 민중문학을 지배하던 사실주의를 극복할 대안으로 등장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학비평가들 상당수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주목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환상문학’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당시 사실주의의 반대개념으로 추구되던 환상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힘입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가령 문학평론가 한기(韓基)는 “광범위한 환상적 요소 작용의 현실은 (…) 현대예술 일반의 특징으로 돼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정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한국 소설문학 발전을 위한 제언: 현실에서 환상으로, 환상에서 현실로」, 『문학정신』 1995년 겨울호)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현상이 라틴아메리카 소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작품을 바탕으로 ‘사료적 메타픽션’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구축한 린다 허천(Linda Hutcheon)에 기댄 국내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게서도 이런 인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환상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로만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산띠아고 꼴라스(Santiago Colás)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포스트모더니티』(Post modernity in Latin America, 1994)에서 지적하듯이, 린다 허천은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을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설정한 혐의가 짙다. 그녀가 중점을 두고 설명하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경우, 소설 속에 항상 내재한 역사와 메타픽션의 문제를 넘어, 스스로를 ‘리얼리즘 작가’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현실’이란 일상사와 경제적 고통 같은 눈에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신화나 신앙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한 예로 동양의학을 들어보자. 동양의학은 서양에서 ‘유사의학’으로 분류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인식하는 서양과학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바탕을 둔 침술의 효력을 믿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서양의 ‘과학적’사고관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관이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이성주의자들과 스딸린주의자들이 항상 강요하려고 했던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현실’의 지평을 확장한다. 그런 지평의 확장을 서양인들은 ‘마술적’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우리 학계에서는 대부분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보르헤스와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환상문학으로 묶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수용의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전공자의 몫일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들이 대부분 번역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