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종은 金鍾銀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으로 「후레쉬 피쉬 맨」 「메모리」 「그리운 박중배 아저씨」 「미확인 비행물체」 등이 있음. youturn1@hanmail.net

 

 

 

세일즈맨의 하루는

 

 

창신동 반지하에서,

 

꿈으로 시작된다. 그는 꿈꾼다. 어둑하기만 한 방안, 위로는 축 처진 천장의 벽지, 아래 어린애 붓 장난처럼 마구 그어진 녹물 자국, 사이로 날벌레처럼 날아다니는 먼지, 가운데 술내와 담뱃내 가득한 방안에서. 그는 꿈꾼다. 그녀의 배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배꼽에 입맞추는 꿈. 보송한 털을 뺨으로 문지르다 시월 하늘 닮은 어떤 소리를 듣고야 마는 그런 꿈을 꾼다. 만약 그녀가, 당신 닮은 아들이었으면 좋겠어,라고 한다면 그냥 소리없이 웃어주고 싶다. 당신 닮은 딸도 좋지 않겠느냐고.

그는 꿈꾼다. 책을 읽고, 또 읽고 읽어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꿈. 그녀가 무언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담배 하나 빼어물고 휘파람 불며 슬리퍼 꿰어 나서는 길, 총총한 별 아래 골목길을 즐겁게 걷고 싶은, 그런 꿈을 꾼다. 만약 그녀가, 당신처럼 뭐든 잘 먹어서 건강했으면 좋겠어,라 말한다면 그냥 소리없이 웃어주고 싶다. 당신 닮아 시디신 과일만 좋아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는 꿈꾼다. 그녀가 당신 사랑해요,라고 말끝 흐리며 내밀었던 새카만 비닐봉지 속 금붕어 두 마리 꿈. 봉지를 헤집어보기 전에는 결코 안을 확인할 수 없는 꿈을.

“하난 자기고, 하난 나야.”

조그만 어항 하나, 주리지 않게 내리 떨어지는 모이 가루와 밝은 햇살. 그 이상 바라고 싶은 것도 없어서, 동화 속 세 가지 소원을, 그는 떠올려본다. 순간 그녀가 말한다.

“살길이 없어. 수술비쯤은 내가 마련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아버지 빚을 청산하고 남은 것이라곤 감당하기 어려운 책뭉치뿐. 그나마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돌아선다. 홀로 남은 그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소주 한병 주문한다. 결국엔 그런 꿈이다. 두 잔 반 만에 눈물나는 꿈. 아, 왜 우리는 세상 모든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이고 싶다. 어이없게도 그의 꿈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세상 빛과 마주침과 동시에 어둠과 만날 모양이다. 멀리 그의 어머니가 보이는데,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침묵.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손을 뻗어보지만 잡지 못한다.

“아버진 벌받은 거예요. 사고도 아니고, 착실히 일하다 배신당한 것도 아니잖아요. 욕심이 지나쳤어. 뭐가 슬프다는 거예요. 어머니, 저도 어딜 가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면 그의 몸은 급속히 작아져 손바닥만한 태아로 변한다. 시커먼 색으로 변하고 만다. 이윽고 서늘한 빛 뿜는 금속 튜브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는 헤엄치고 싶다. 헤엄쳐 달아나고만 싶다. ……그는 언제나 그런 꿈을 꾼다.

청년 김은 늘 같은 꿈을 꿨다. 처음에는 소스라치듯 놀라 일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요 바닥에는 보기 흉한 얼룩이 졌다. 하지만 계속되고 보니 그것은 그에게 더이상 악몽이지 않았다. 덤덤해진 것이다. 손에 잡힌다면 더이상 꿈일 수는 없다는 생각. 그런 것쯤이야 그저 길을 잃는, 식상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일 뿐이라고. 어느덧 그는 그렇게 가슴을 가라앉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실제 그런 사람을 몇 보았지만, 그는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 주저앉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누가 뭐래도 세일즈맨이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는 꿈, 21세기 프런티어 S전자에서, 아홉시를 알려드립니다.

 

어제는 근교 호수에 다녀왔어요. 날씨가 흐리긴 해도, 가을이 성큼 다가온, 그런 느낌. 알 수 있더군요. 그리운 사람들 얼굴 떠오르는, 그런 하늘과 바람 말이죠. 자, 이럴 땐 잠시 일을 접어두고 따뜻한 까페라떼 한잔. 그 부드러운 향 맡아보는 건 어떨까요. 아, 재스민 차도 좋겠군요. 출근하시는 분들은, 정체로 짜증나시더라도, 잠시 핸들에서 손을 떼고 눈 한번 감는 겁니다. 해보세요. 가을이 느껴지지 않나요. 자, 저와 함께 가을여행 떠나시죠. 첫곡 「오텀 리브즈」입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치 잔디 위로 흩어지는 물방울 같았다. 조그만 거울 앞에 선 청년 김은 침 뱉은 왼손바닥으로 연신 오른쪽 가르마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어제도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때문에 가을이 대체 어디만큼 다가온 것인지 그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사실 별 관심도 없었다. 양쪽 가르마가 보기 좋게 균형을 이루자 뒤돌아 라디오를 끌 뿐. 자가용 운전자도 아니고, 그리운 사람도 없으며, 재스민 차라면 구경도 못해본 그로선 당연했다.

프림 두 봉 사면 끼워주는 머그잔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설탕을 넣었다. 프림을 탈탈 털어 한 주먹 됨직 넣고 물을 부었다. 아침식사 대신 마시는 커피였다. 목이 조금 컬컬했기 때문에 눈물이 찔끔 맺히는 것도 마다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한결 나았다.

다시 거울 앞에 선 청년 김은 에에 아아, 하고 목청을 다듬었다. 그에게 가을의 시작은 이와 다름없었다. 가을. 그에겐 꼬박꼬박 걸리는 환절기 감기나 조심해야 할 그런 시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었다. 그는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이를 드러낸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럴 때마다 입술 사이로는 스스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거울을 보며 무언가 외우는 사람마냥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살의라도 숨긴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청년 김은 방을 나서기 위해 열쇠를 찾아보았다. 늘 그렇듯 열쇠는 케이크 상자만한 어항 위에 놓여 있었다. 어항 위를 손으로 쓸다 그는 물위로 떠오른 붕어 두 마리를 발견했다. 허연 배가 물위로 드러나 있었다. 금붕어는 눈을 감지 못하는가. 쓰레기통에 버릴까 했지만 혹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세일즈맨에게 금붕어 따윈 필요없는 까닭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건조한 동작이었다. 창밖으로 날아간 금붕어는 어디로 떨어졌는지, 아니 어디쯤 떨어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추락은 언제나 손쉬웠다. 그는 손끝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국물이 반쯤 담긴 즉석라면과 이쑤시개로 사용했던 부러진 나무젓가락, 제각기 흩어진 타월과, 구겨진, 게다가 얼룩까지 진 요가 어지러웠다. 포탄 맞은 베트남 마을 같은 느낌이다, 변함없이. 숱한 책들은 비닐테이프로 묶여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듯 버려져 있었다. 그는 책더미들을 바라보다 손을 바지춤에 쓱쓱 문질렀다. 아무래도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화동 반지하 사무실의,

 

조그만 거울 앞에 서 있던 정씨는 시계를 올려보다 무료한 듯 왼손으로 괜히 오른쪽 어깨를 쓸어보았다. 정씨는 청년 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차 시계를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시간은 여전히 제 속도로 흘렀다. 체념한 듯 정씨는 가지고 온 커다란 담배상자에 셀로판테이프를 감기 시작했다. 이내 손잡이도 만들어 달았다. 파이지 않도록 모서리 부분은 더욱 신경써 둘둘 말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꽤 튼튼해 보이는 가방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윙윙 날아다니며 신경을 거스르던 모기도 한마리 잡았다. 도시의 모기는 철을 가리지 않았다.

“어이, 왔는가?”

정씨는 막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청년 김을 반겼다. 그는 손바닥 위에 짓이겨진, 형체 알아볼 수 없는 모기를 바지춤에 쓱쓱 닦아냈다. 청년 김은 박스를 보자마자 아,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뭔가 빠먹은 거 같더니만. 아저씨 줄 가방, 그걸 놓고 왔네요.”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정씨는 조금 낙담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자네가 지금 그런 거 신경쓸 처진가. 나중에 해. 거의 다 만들어가네. 이게 난 사실 더 편해. 이걸로 일주일은 버텨.”

정씨는 자신이 만든 상자를 텅텅 소리나게 두드리며 대꾸했다.

“어쩌죠. 제가 요새 이래요. 죄송해요. 그나저나 왜 혼자세요? 다들 어디 가고. 혼자만 안 나가고 기다리셨어요?”

“다들 나갔지. 지금 시간이 몇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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