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사회의 발전전략을 찾아서(21세기의 한반도 구상 3)

 

소국주의와 대국주의를 넘어서

 

 

박명규 朴明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한국 근대국가 형성과 농민』 등이 있음. parkmk@snu.ac.kr

 

 

1. 파병론 속의 자의식

 

이라크 추가파병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란이 명분과 국익의 대립은 아니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국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물음을 제쳐두더라도 실제 파병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뚜렷지 않고 오히려 파병으로 잃을 것이 더 많으리라는 예상에 힘이 더해진다. 최근에는 오히려 파병론자들이 이라크의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파병반대론자들이 국익에 해롭다는 주장을 펴는 경우조차 있을 정도로 애초의 명분/국익 이분법은 근거를 잃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란 자체를 무의미한 것이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이 속에서 우리 사회의 주요한 쟁점을 찾아내고 이를 21세기 한반도 공동체 전체의 발전과 관련하여 검토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파병을 둘러싼 대립은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 기인하는데 그 바탕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우리의 자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파병론자들은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한반도의 평화나 지속적 경제발전에 심각한 위협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의식은 한국이 힘이 약한 소국이라는 자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위상을 꽤 높게 평가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악화에 노심초사하는 경제인들의 사고에서도 이런 자의식은 확인된다. 현실주의자들은 이것을 실용적인 대응전략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OECD 국가군에 편입되고 세계 11위의 교역량을 자랑하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군사력을 보유한 오늘의 한국사회를 소국이라 지칭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뿐더러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소국의식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부당함으로 이해된다. “왜 미국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가”라는 파병반대론의 배후에는 나약한 소국의식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깔려 있다. “스스로를 약소국가로 규정한 현실주의는 부당한 결정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도덕적 방기이며 타인이 강요하는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자신이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자기검열이다”1라는 비판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세계화와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우리의 자의식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이런 특이한 자의식의 결합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고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것의 한계와 극복방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등을 생각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전략을 모색하는 한 단서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2. 민족주의, 소국주의 그리고 대국주의

 

자신이 속한 정치공동체가 ‘약하다’는 소국의식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위상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해줄 뿐 아니라 허장성세의 유혹을 통제할 수 있는 내면적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논리가 압도하는 상황에서 소국으로서의 자의식은 “열등감과 우월감의, 그리고 현상용인 심리와 현상변경 심리의 복합관계의 어딘가에 위치”2하게 된다. 따라서 소국의식으로부터 두 가지 상이한 정치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는데 소국으로서의 자의식을 수용하면서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경우와 소국으로서의 지위를 거부하고 강대국으로 변신하려는 지향이다. 전자를 소국주의, 후자를 대국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인데 물론 그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3

이런 소국의식이 정치화하는 계기는 민족주의가 부상할 때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치적 세력확대를 꾀하려는 운동으로서 민족주의는 불가피하게 스스로의 자의식에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동쪽바다의 아주 작은 땅”이라는 영토의 왜소함과 “물산이 적고 농경과 어획이 얻는 바는 겨우 자급할 정도”라는 결핍의식은 오랫동안 자의식의 일부를 이루었다. 물론 유교적 조공체제 내에서는 이 소국의식이 반드시 문화적 종속이나 정치적 예속성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자임하는 문화적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의 강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었던 문명론적 소국의식은 19세기 후반 근대국가체제와 만나면서 다양한 정치적 대응논리로 분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대표라 할 최익현(崔益鉉)은 “저들의 강함”과 “우리의 약함” 사이에 강화란 있을 수 없고 “손에서 생산되어 한(限)이 없는” 서구의 물산과 “토지에서 나는 것으로 한이 있는” 조선의 물화가 교역되어서는 조선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서 전통적인 사대교린책의 고수를 강조했다.4 하지만 개화파의 비조(鼻祖)인 박규수(朴珪壽)는 조선이 마치 “진(晋)과 초(楚)사이에 위치하던 정(鄭)과 같은 소국”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양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적극 활용하는 전략적 대응을 강조했다.5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주도하였고 이후 근대적 개혁을 주도할 제자들을 키워냈다. 한편 신채호(申采浩)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도덕이 부패하며 경제가 곤궁하고 궁핍하며 교육이 부진하며 모든 권리가 타인의 손에 돌아가며 인민의 기상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6렀다고 탄식하면서도 부강했던 과거 영웅적 기상과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강한 국가의식·민족의식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각기 사대론·균세론·자강론으로 불러도 좋을 이들의 지향은 모두 근대국가체제와의 조우과정에서 소국의식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변용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 잠재적인 지향성만으로 본다면 자강의 구상은 대국주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재일조선인 사학자 조경달(趙景達)은 김옥균(金玉均)등의 급진개화파들을 대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세력으로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외세의 간섭과 압력 앞에서 독립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대국주의는 관념적인 구호나 먼 미래의 목표일 수는 있으나 실질적인 전략이나 운동으로 등장하기 어려웠다. 김윤식(金允植)이 “만약 중국의 길을 모방하고자 하거나 군대나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기계의 설치에 힘을 기울인다면 백성은 궁해지고 나라재정은 바닥을 드러내 결국 체제는 일거에 붕괴되고 말 것”임을 우려하고 “조약을 지키고 우방간에 무용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하는 것을 유일한 방책으로 주장했던 것7은 당당한 소국주의조차 세를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현상유지를 최선으로 생각하는 소극적 태도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민족개조론’을 썼던 이광수(李光洙)의 자기비하적 태도는 소국의식이 민족에 대한 열등감으로 연결된 경우이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은 소국의식을 오히려 약소민족의 정치적 자주권과 독립을 정당화하는 원리로 수용했다. 동양평화론에 입각하여 일본의 대국주의적 팽창정책을 비판하였던 안중근(安重根)은 스스로의 약함을 부정하지 않되 열등감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공존의 논리, 평화의 질서를 구성하려는 적극적 사유양식을 보여준다. 이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세력들도 일반적으로는 전세계 약소민족들의 처지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소유함으로써 피억압민족으로서의 자의식이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정치의식과 단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채호가 역사를 ‘아(我)와 피아(彼我)의 투쟁’으로 규정하였을 때, 이는 강대국에 대한 약소민족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옹호하려는 의지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가 20년대 중반 무정부주의를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민족독립운동은 강대국의 논리, 국가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기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소국의식의 국가적 전유와 종속적 발전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민족의식이 성공의 순간에 사회의식으로 바뀌지 않으면 오히려 해방을 지탱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8 독립과 더불어 저항적 민족주의가 권력의 논리로 쉽게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박순성 「현실주의는 도덕적 방기다」, 『교수신문』 2003년 4월 7일자.
  2. 장인성 『장소의 국제정치사상』, 서울대출판부 2002, 91면.
  3.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소영국주의와 대영국주의의 대립이 있었고 19세기말 일본에서도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대립이 있었다. 중국도 20세기초 소민족주의와 대민족주의의 대립이 있었다.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군사적 대외팽창정책이 대국주의의 핵심이었다면 중국의 경우는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누가 주도할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28면 및 田中彰 『小國主義』, 東京:岩波書店 1999 참조.
  4. 최익현 「丙子持斧伏闕斥和議疏」, 신용하 『한국근대사회사상사연구』, 일지사 1987, 307~309면에서 재인용.
  5. 한국학문헌연구소 엮음 『박규수전집』 상권, 아세아문화사 1978, 466~69면.
  6. 신채호 「20세기 신국민」, 정해렴 편역 『신채호 역사논설집』, 현대실학사 1995, 310면.
  7. 김윤식 『續陰晴史』 상, 234~35면; 木村幹 『朝鮮/韓國ナショナリズムと小國意識』, ミネルバ書房 2000, 221~22면에서 재인용.
  8. 에드워드 싸이드, 김성곤·정정곤 옮김 『문화와 제국주의』, 창 1995, 461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