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읽기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로 『흔들리는 분단체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배수아(裵琇亞) 장편의 제목은 장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도 「작가의 말」에서 주로 이 문제를 언급한다.

“나는 소설을 쓰기를 원했으나, 그것이 단지 소설의 형태로만 나타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혹은 처음에는 그 기간 동안 내가 읽고 들은 몇 권의 책과 소소한 음악에 관해서 짧고 단조로운 에세이를 쓰고 싶었으나, 그러기 위해서 소설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배수아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197면)는 첫마디가 집필과정에 소설가로서의 욕구와 에쎄이스트로서의 욕구가 함께 작용했음을 알려준다. 그 결과물이 소설로 불리는 데 대해서는 짐짓 대범한 태도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 사람들이 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가 일단은 소설가이기 때문이고 대개 소설을 썼기 때문이고 또한 이것의 공식적인 타이틀이 소설이라고 불려질 것이기 때문이다.(197~98면)

 

그러나 저자의 좀더 뼈있는 주장은 그 단락의 끝머리에 나온다.

 

어느 순간에 달콤한 멜로디에 의존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바이올린 음악의 선율이 참을 수 없게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는 글 속에 담긴 스토리 자체를, 혹은 그런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을 내게서 가능한 한 멀리 두고 그 사이를 뱀과 화염의 강물로 차단하고자 했다. 무엇이라고 불리는가 하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가 될 것이다.(198면)

 

자신의 글쓰기가 소설문학의 어떤 낯익은 모습에 대한 치열한 거부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무엇이라 부를지를 정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은 아니다. 실제로 호칭의 문제에서는, 소설 또는 장편소설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을 갖고 서점의 소설 코너에 나와 있는 책들은 일단 소설이라고 불러주자는 것이 내 입장이다. 그것이 온갖 불필요한 관념적 논의를 피해가는 길이기도 하려니와, 실제로 그 수많은 책들의 형식을 두루 포용할 만큼 다양하며 변화무쌍한 것이 소설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생각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배수아가 상정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글머리에 장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책의 제목이나 작품이 지닌 ‘에쎄이적 요소’ 또는 저자의 에쎄이스트적 욕구 표명에 이끌려서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실제로 보여주는 소설적 성과를 과소평가할 우려가 없는지 따져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비소설적 산문’이라는 뜻에서의)‘에쎄이적’ 면모로는 먼저 작가 자신이 말한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과의 거리를 떠올릴 수 있다. 동시에 작가가 애초에 쓰고 싶었다는 ‘짧고 단조로운 에세이’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독서감상과 음악평, 그밖의 숱한 관념적 담론이 도처에 발견되는 점을 들 수도 있다.1 게다가 작중의 1인칭 화자는 비록 고국에서 ‘작가’로 활동했다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M을 마지막 만날 무렵에 쓰고 있는 것이 음악에 관한 에쎄이이며,M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쓰기 시작한―아마도 이 책의 내용에 해당할―글 또한 그녀에게는 허구가 아니라 성찰과 회상의 기록, 즉 비소설적 산문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이 실존인물의 진실된 기록이라는 설정이야말로 낯익은 소설적 장치다. 실제로 사실에 충실한 기록일지라도 소설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을 일단 내건 책에서 그것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주장이 나오면, 이 주장 자체를 허구(虛構=픽션)로 읽기로 독자와 작가 간에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기록이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은, 그것이 스토리(=이야기) 자체의 전면적인 부재가 아닌 한, 현대소설에서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실은 서구의 장편소설이 처음 자리잡아가던 18세기 영국에서 이미 『트리스트럼 섄디』(Laurence Sterne, Tristram Shandy, 1760~67)의 선례가 있다.

사변적인 담론의 존재 또한 전통적인 장편소설에서 오히려 흔한 현상이다. 현대소설로 올수록 저자의 논설적 개입을 차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만, 작중의 대화나 1인칭 화자의 서술은 경우가 다르다. 사변적인 언설 자체가 (1인칭 화자를 포함한) 해당 인물의 형상화 수단일 수 있으며, 이런 언설을 작품의 일부로 삼는 포용성이야말로 장편소설이 지닌 큰 매력이다. 다만 그런 대목들이 무언가 저자의 생경한 개입으로 느껴져서 독자의 공감을 사지 못할 때 그것을 나쁜 의미로, 즉 소설임을 표방하면서 제대로 소설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로, ‘에쎄이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지식인의 사변적 언어를 작중인물의 실감나는 진술이자 이야기 진행의 유기적 요소로 포용했다는 점만으로도 한국소설에 흔치 않은 성취라 할 만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소설적 성취가 과연 어떤 것이며, 혹 나쁜 의미의 에쎄이적 요소가 그래도 있다면 어떤 것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보는 일이다.

 

 

2

 

먼저 분명한 것은, 작품의 제목이나 제1장의 파격적인 출발이 줄 수도 있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책을 읽었을 때, 선명한 줄거리가 없다뿐이지 개별화된 인물과 극적인 사건이 작품의 길이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소설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점이다.M에 대해서는 뒤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주인공급인 ‘나’와 M이 모두 개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며 요아힘, 아네스, 에리히, 수미 등 군소인물도 각기 생생한 인상을 남긴다.

제3장의 경우는 전통적 사실주의 소설의 한 장을 방불케 할 정도다.1,2장과 달리 3장에서는 사건진행의 앞뒤가 어느정도 정돈되기 시작한다. 화자가 3년 만에, 그것도 갑작스럽게 독일에 다시 왔다든가, 요아힘과는 중도에 만나 그의 집으로 왔고, 요아힘은 머잖아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화자는 따라가지 않을 참이라든가, 때는 크리스마스 철이라 성탄절 전날 저녁에 요아힘의 어머니 집을 방문키로 되어 있다는 사실 들이 고전적 소설에서처럼 솜씨있게 소개된다. 또한 요아힘의 거처와 그곳에서의 일상, 추운 저녁 어머니 집을 찾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과 주변의 풍경 등이 드문드문 끼어드는 회상과 함께 실감나게 묘사된다.

특히 그 집에 도착한 후 요아힘의 어머니 아네스, 그녀의 (몇달 단위로 바뀌는) 동거자 비욘, 요아힘의 쌍둥이 형제 페터 등과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주로 아네스와 화자만이 대화를 나누다가 모두가 아무런 대화 없이 오리고기 요리를 먹는 장면은 전혀 난해하지 않으면서 재미있는 명작소설의 한 장면 같다. 음악 이야기가 아네스와의 대화 도중에 나오기는 하지만, 화자 자신의 음악관에 대한 난해한 담론은 없다. 아네스가 소장한 음반을 보면서,“나는 하나하나의 CD 재킷을 모두 꼼꼼하게 읽었다. 흥미가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듣기 편하고 소프트한 음악을 몹시 싫어했으나 특별히 할 일이 없었고, 아네스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39면)라고 언급하는 정도다. 화자와 M이 공유하는 전혀 다른 음악론은 우회적으로만 제시되고 아네스의 성격이나 그때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져 있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 요아힘과 둘이서 교회의 자정 예배를 구경갔다가 헌금통을 돌리기 직전에 빠져나와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마지막 대목 또한 잘 만든 단편의 마무리처럼 깔끔하다.

물론 제3장은 이 작품에서 매우 예외적인 부분이다.M에 대한 언급이 단 한차례도 안 나오는 유일한 장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요아힘과 함께 지내는 날들의 기록은 제4장으로 이어지는데, 섣달 그믐날 요아힘 친구들의 파티로 시작해 며칠 뒤 요아힘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으로 떠나고 화자가 요아힘의 애견 베니를 돌보며 남게 되는 데서 끝난다. 여기서도 파티의 묘사 같은 것은 3장의 사실주의적 재현 솜씨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M 이야기가 끼어들면서 시간상의 이동이 한결 어지러워지고 M 또는 화자의 생각이, 적어도 이 싯점에서는, 이해하기기 힘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복선이 준비되기도 하는데, 예컨대 파티에서 어떤 남자가 물었고 돌아오는 길에 요아힘이 다시 묻는 ‘M은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은 바로 화자가 자주 꾸는 악몽 속의 질문이기도 함이 그 다음 장에 가서야 밝혀지며,누군가 아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묻고 자연스럽게 돌아서는 그 꿈이 왜 악몽이어야 하는지는 책을 거의 다 읽으면서야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이다.

표면상의 이야기는 5장으로 이어져 요아힘이 떠난 뒤 화자의 생활을 들려준다. 베니를 데리고 나가는 산책 외에는 거의 독서로 시간을 보내

  1. 책의 해설자도 이 점을 강조한다.“그 때문에 이 소설은 마치 M을 정신적 질료로 하여 그에 대한 회상에서부터 풀려나오는 언어나 음악에 대한 생각과 예술 텍스트에 대한 개인적 논평을 펼쳐놓은 에세이처럼 읽히고, 또 실제로 소설 전체가 인물이나 사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에세이적인 형식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제목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김영찬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글쓰기의 자의식」, 『에세이스트의 책상』 18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