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소희 사진_fmt

박소희 朴邵熙

서울예대 학사과정 문예창작전공 1학년. 1992년생.

parksohee823@gmail.com

 

 

 

스물세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로베르또 미란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는 “시간적 배경은 현재이며,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라도 무방하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등장인물은 빠울리나 쌀라스, 헤라르도 에스꼬바르, 그리고 로베르또 미란다. 빠울리나는 15년 전에 독재정권하에서 고문을 당했다. 당시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현재 남편인 헤라르도는 인권변호사로서 고문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차가 고장나 도로에 멈춰 있던 헤라르도를 한 사내가 도와주게 되고, 그 일로 그는 헤라르도의 집에 들른다. 그의 이름은 로베르또 미란다. 빠울리나는 로베르또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그 의사, 15년 전에 어둠 속에서 자신을 강간하고 고문했던 그 의사,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틀던 그 의사라고 한다. 그리고 그를 결박하고 총을 겨눈다. 로베르또 미란다는 자신은 절대 그 의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빠울리나는 모든 것을 자백하라고 한다. 바로 여기서, 오늘, 내가 당신을 재판할 거라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풀어주겠다고.

기울인 부분은 희곡 속 실제 대사들이다.

사실 빠울리나와 헤라르도는 지금 어딘가에 다른 이름으로 살아 있다.

나 역시도.

그리고 세상에는 나를 로베르또 미란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형이 내게 와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형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해, 내가 물었다. 가장 깊은 데까지, 형이 말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냉기가 묵직해졌다. 저 아래에 사람들이 있어. 나를 닮은 형은 말했다. 이제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름을 지우는 거다. 여기선 나를 버드라고 불러. 버드? 그래, 버드. 난 너를 의사라고만 부를 거다.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은 없어. 내디딜 때마다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아래로 형의 목소리가 한겹 더 울렸다. 저 아래에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없는 사람들이 있어. 우린 없는 사람들인 거다. 그게 모든 걸 구별해. 기억해. 우리는 여기서 진짜 이름도 얼굴도 지운 거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형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지운다는 게 이런 뜻인가. 나는 어둠에 잠겨 턱 윤곽만 어렴풋한 형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저 사람들이 끝까지 버티다 죽을 것 같으면, 죽기 직전에 멈춰. 다른 사람들도 멈추게 해. 특히 전기, 그리고 물. 우린 죽이려는 게 아니라 단지 알아내려는 거니까. 가장 중요한 진실 말이다. 그리고 넌 공산당들이 아버지에게 한 짓을 갚아줄 수 있어. 저 아래에서, 전부 다.

두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형이 문을 열었다. 비리고 역한 냄새가 몰려들었다. 나는 코와 입을 막았다. 형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 겨우 이 정도로 그래서 되겠어? 난 형을 올려다봤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버드, 이런 약골을 데려와서 어떡하려고? 의사 선생이 맞기는 한 거야? 덩치가 큰 사내가 동료들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말했다. 스터드라고 불러주쇼. 나는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악수 같은 건 필요 없지, 의사 양반. 그는 어깨로 나를 가볍게 쳤다. 그런데 진짜 의사 맞아? 아니, 그냥 신기해서 그래. 병원 밖에서 의사를 만나는 건 처음이거든.

몇몇 사내들이 웃었다. 그 사이로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작은 체구에 포마드로 넘긴 희끗한 머리. 장화와 팔토시. 그가 팔에 낀 토시를 벗으며 말했다. 내 옷차림을 용서하시고…… 들어오세요, 닥터. 피와 물로 젖은 옷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알랭 들롱이라고 불러요. 여기선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 닮지 않았나? 사내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낮게 킬킬댔다. 그는 마지막 음절을 끌며 말했다. 버드에게 설명은 들었을 겁니다, 의사 선생님.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건 꽤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너무 유명한 말이긴 하지만, 죽은 자들은 말이 없어요. 우리는 말을 해줄 사람들이 필요한데 말이죠, 그게 뭐든 간에. 그러니까 닥터는 응급처치를 해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길고 복잡한 복도를 계속 걷기 시작했다. 젖은 장화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갔다. 그가 중간중간 손을 마주치는 소리, 형의 발소리, 나의 숨소리. 버드는 믿음직한 비밀경찰입니다. 과묵하고 진지하죠. 아시다시피, 침묵은 힘이 세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 수많은 방들을 지나쳤다. 빽빽한 문앞을 지날 때마다 각기 다른 비명이 새나왔다. 이 일을 할 때엔 더 그렇습니다, 나라를 위해선 이렇게 보이지 않는 데서 묵묵히 일하는 젊은이들이 필요한 법이죠. 그가 형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형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좀 복잡하고 어두워도 금세 적응될 겁니다, 냄새도 익숙해져요. 사람의 감각 중에서 가장 빨리 적응하는 게 뭔지 당연히 아시겠죠, 의사 선생님? 그의 단정한 머리를 흘깃 봤다. 후각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럼 가장 익숙해지지 않는 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통각 아닙니까.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겪어보면 사람들은 고통에도 꽤 빨리 익숙해지는 것 같더군요. 저 사람들이 익숙해지지 않게 하는 게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저도 쉰이 넘었지만 여기에 있으면서 인간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이 곧잘 듭니다. 눈을 마주치며 그가 어떤 미소를 띠었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 닥터께서도 그러시게 될 겁니다. 자, 들어가십시다.

좁은 방 안에는 피와 멍으로 물든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의식이 없었다. 놀랄 것 없어요, 닥터. 피를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단지 기절한 겁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요. 나는 남자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벗겨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들립니까? 남자의 동공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앞으로 닥터를 부르는 곳으로 어디든, 달려와주시면 됩니다. 꼭 필요한 때를 빼고는 눈을 가려두도록 하세요. 그와 형은 문을 닫고 나갔다.

세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의사 양반, 나 가끔 왼쪽 배가 쿡쿡 쑤시곤 하는데 왜 그런 거요? 스터드가 히죽댔다.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닌가 몰라. 중얼거리면서 스터드는 스위치를 올렸다. 잘못했다는 말만 계속하던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는 경련했다. 그러곤 비명을 질렀다. 신을 믿어? 스터드가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비명 속에서 답했다. 믿어요. 나는 고문을 믿어, 그리고 너를 고문할 거야.*1)

남자를 바라볼 수 없었다. 스터드는 말했다. 저 늙은이 생각보다 질기데. 난 금방 나갈 줄 알았어.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을 하면 바로 풀어줍니까? 알잖아, 선생. 여기서 나가면 두가지뿐인 거. 땅 위거나 하늘 위거나. 난 저 노인네가 금방 날아갈 줄 알았지. 어떻게 해야 저들을 풀어주는 겁니까? 스터드는 물어뜯은 손톱을 뱉었다. 이제 선생이 있으니 두번째는 좀 줄겠어. 근데 형씨, 아무리 똑똑해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계속 버티다가도 순식간에 꼴까닥한다니까? 남자의 비명이 커질수록 스터드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스터드가 외쳤다. 한 단계 더 올려도 되겠지? 내가 눈을 찌푸리자 그는 스위치를 조금 더 꺾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지린내에 눈을 떴다. 남자 아래로 피 섞인 오줌이 퍼지고 있었다. 입에선 거품이 흘렀다. 거참, 늙은이하고는. 대걸레 가져올 테니 잘 보고 있으쇼. 그만하라고 말하려다 나는 그 자리에서 토했다. 돌아온 스터드는 말했다. 우리 선생 비위가 꽤 약하네.

네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형을 찾았다. 이건 내가 생각한 일이 아니야. 사람들을 구하는 게 아니잖아. 형은 나를 데리고 빈방으로 들어갔다. 시큼한 냄새에 다시 구역질이 났다. 불을 켜려는 손을 형이 막았다. 처음엔 다 그래. 곧 적응될 거다. 형은 어둠 속에서 말했다. 원래 나라와 진실을 위해 봉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실? 무슨 진실? 진정한 진실. 형은 그런 게 저 사람들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고문해서? 결국엔 나오게 될 거다. 형, 아니, 그래 버드, 진짜 진짜 진실이 뭔지 알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진실 같은 건 여기 없다는 거야.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해라. 저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되시지 않았다. 형, 그건 다른 얘기라고. 내가 여기서 누굴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형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렇더라도, 네가 가면 저 사람들은 다시 죽을 거다.

다섯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여섯번의 로베르또 미란다. 테오와 루이스를 알게 되었다. 어깨가 두껍고 몸이 단단한 루이스. 그는 머리가 조금 벗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됐느냐고 물었다. 루이스는 싱겁게 웃었다. 글쎄, 신의 뜻이었겠지. 루이스가 담배연기 속에서 계속 말했다.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 이름이 없었지. 의사 양반이 의사 양반인 것처럼 난 그냥 청소부였어. 그럼 왜 루이스가 되었습니까. 그냥. 내가 여기 와서 본, 처음으로 죽어나간 사람 이름이야.

나는, 의미 있어. 휴게실 소파에 걸터앉아 있던 테오가 끼어들었다. ‘테오’,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으신가? 그는 수염자국을 쓸었다. 고흐 말야,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나는 테오, 하고 작게 읊조려봤다. 그리고 고흐의 그림과 죽음을 떠올렸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왜 테오인지는, 말 안할 거라네. 의사 선생은 고흐 좋아하시나? 저는 에곤 실레를 좋아합니다. 오딜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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