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윤수 南潤秀
1982년생.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essego@hanmail.net
당신의 얼굴
긴장 탓에 새벽녘에 깨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밖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누군가 수화기를 집어들었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거의 열흘 만에 들어보는 아버지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수화기에서 새어나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네 형이야, 인마. 너는 나보다 잘살면서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동생이 돼서 형이 잘살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빚 독촉이나 하고. 그러고도 네가 동생이냐. 세상이 정말 어찌되어가는지.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게 실감나는구나. 하긴 넌 같은 피도 아니지,라고 쏘아붙이며 아버지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나는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면서 슬며시 잠금 버튼을 눌렀다. 벌써 아버지와의 대화가 단절된 지 수개월이 지났다. 그걸 빌미로 아버지가 홧김에 내 방으로 들어와 시비를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옆방 문이 열리며 어머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와서 가스레인지 점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왜 이제야 아침을 준비하느냐며 괜한 신경질을 부렸고 어머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학사정보 씨스템으로 들어가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확인 버튼을 클릭했다. 눈을 떴다. 예비합격번호 2번. 포털싸이트 검색창을 띄워 작년 추가합격자 현황을 확인했다. 내 예비번호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다시금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국이 왜 이리 짜. 김치는 왜 이리 싱겁고. 반찬은 이거밖에 없어? 반찬 살 돈 한푼 안 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어머니는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언성은 금세 높아졌고 어머니는 몇마디 대꾸하다가 언제나처럼 꼬리를 내렸다. 말대답만 늘어가지고는. 아버지는 다시금 수저를 들었다. 아버지가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진짜 안 갈 거야? 어떻게 가요. 염치도 없이. 돈이야 벌어서 갚으면 되는 거지, 그래도 명절인데. 어머니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짜서 도무지 못 먹겠다. 다시 가져와. 아버지 말에 끙, 하고 어머니는 일어났다. 아버지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거, 한 십만원 정도 없어? 한참 후 어머니가 말했다. 막내 병원 갈 돈도 모자라요. 아버지는 혼자 뭐라고 실룩대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는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신발 신는 소리가 난 후 현관문이 바닥을 끌며 열렸다가 닫혔다. 아버지와 사이가 어떻든 간에 나는 며칠 후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야 할 것이다. 나는 종손이었다.
의사는 동생의 병명이 갑상선항진증이라고 했다. 심각한 병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약물치료와 통원치료를 병행하면서 길게 싸워야 한다고 했다. 고생할 동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동생 치료비로 들어갈 내 통장의 잔고를 생각했다. 입학처 교직원은 확신할 순 없지만 곧 내 순번이 올 거라고 했고 등록금을 미리 준비해두는 편이 좋을 거라 했다. 병원비가 예상보다 초과된다면 학자금 대출을 받고도 입학 후 생활비 명목으로 또 대출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나는 망연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이층 양옥으로 된 작은아버지 댁이 눈에 들어왔다. 스피커에서 종점을 알리는 안내멘트가 나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차벨을 눌렀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아침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차례는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왜 이제 왔냐? 작은아버지가 나무랐다. 얼른 와서 앉아라. 밥 먹고 할아버지께 세배 드려야지. 나는 작은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엉거주춤 앉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다가 국을 떴다. 아버지는 나를 한번 힐끔 보고는 밥을 떴다. 내가 앉은 자리에는 수저가 없었다.
부엌으로 들어섰다. 숙모는 씽크대 앞에서 김치를 썰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숙모는 이마를 훔치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숙모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프지? 얼른 가서 밥 먹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수저가 없다고 했다. 그래? 숙모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씽크대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거실 쪽에서 숙모에게 김치 아직 멀었냐, 소리치는 작은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숙모는 가져가요, 하고는 수저통을 들여다보고 씽크대 서랍을 열었다. 남는 수저가 없는 모양이었다. 놔두세요. 집에서 아침 먹고 왔거든요.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그때 다시 한번, 작은아버지가 김치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잠깐만. 숙모는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지금 가요, 숙모는 거실 쪽으로 소리치며 식탁 위에 있던 접시를 들고 와서 잘라놓은 김치를 담았다. 행동이 왜 그리 굼뜨냐. 가져오라고 한 게 언젠데, 거실 쪽에서 작은아버지가 나무랐다. 내 시선은 식탁 위, 소쿠리에 담긴 차례음식에서 떠나지 않았다. 숙모 혼자서 저 많은 걸 다 만든 건가.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지 이 상황이 낯설었다. 숙모는 나를 지나 빠른 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의 뒤태가 겹쳐지는 숙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부엌을 나와 슬그머니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아무 책이나 빼들었다.
문이 열리며 작은아버지가 들어왔다. 밥 안 먹어? 배가 안 고파서요. 작은아버지는 책상 옆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이리 늦었어? 아르바이트 때문에요. 할아버지가 계속 너 찾았다. 그래도 네가 종손인데. ……차례 때 보니까 정수가 몸이 안 좋아 보이더라. 얼굴색도 누렇게 뜨고 목도 붓고. 아까 약 먹고 방에 들어가 잠깐 누웠다. ……어머니는 잘 계시지? 계속 식당 일 나가시고? 고생 많으시다. 네가 잘해야 된다. 나는 작은아버지의 말에 짧게 대답하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작은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다음주 할머니 제산 거 알지? 그땐 늦지 말아야 된다. 오늘 할아버지가 많이 기다리셨어, 작은아버지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이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나와서 떡국이라도 한숟갈 들어. 설날이잖아. 네, 좀 이따 갈게요. 작은아버지는 문을 닫고 나갔다. 굳게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설 연휴가 끝나고 이틀 후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 몇개의 독촉장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신발을 벗으며 그중 하나를 집어들었는데 어머니 앞으로 온 것이었다. 스멀스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자기 앞으로 독촉장이 날아온 사실, 즉 아버지가 어머니 카드를 몰래 들고 나가 도박에 쓰고 다닌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집이 경매로 넘어간 사실을 알았을 때, 그때 아버지는 벌어서 갚으면 되지, 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그래도 난 네 아버지야,라고 했다. 그 네 아버지야라는 말이 가슴팍을 파고들어 지금까지 거미줄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다. 나는 아버지 앞으로 온 나머지 독촉장들을 집어서는 잔뜩 구겨버렸다.
거실이라고 해봤자 세평 남짓한, 부엌과 겸한 곳이다. 거기로 들어서는 순간 고기 냄새가 콧속으로 옅게 배어들어왔다. 오늘이 어머니 월급날이었던가. 씽크대 개수대에는 고기를 구웠던 프라이팬, 기름장 접시, 밥그릇 등이 쌓여 있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옷을 추스르며 밖으로 나올 때, 화장실 거울에 언뜻 내 얼굴이 비쳤다. 뜬금없이 나는 저게 내 얼굴인가 싶어 무심코 얼굴에 손을 갖다댔다. 어머니가 말했다. 일찍 왔네. 후번 근무자가 일찍 왔거든요. 나와 시선이 마주친 어머니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머리 그렇게 해서 다니지 말라고 해도 또 그렇게…… 어머니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덥수룩한 게 꼭 네 아버지 같네. 안 지저분하니? 정리 좀 해라. 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는 씽크대 쪽을 힐끔 보고는 매트에 발을 닦으며 말했다. 너 퇴근시간 맞추기가 참 힘드네. 다음에 같이 먹든지 하자. 어머니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어김없이 그렇게 변명을 했다. 어머니는 나를 지나 설거지를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
-
2009년 봄호 소설 | 당신의 얼굴남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