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 한국문학의 오늘, 민족문학의 새로운 구도

 

순수·초월의 서정시와 불순·대항의 열린 시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김승희 金勝熙

시인. 서강대 국문과 교수.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이 있음. sophiak@sogang.ac.kr

 

 

1. 대문자 시의 죽음, 소문자 시의 활성화

 

‘시는 죽었다’─흔한 말이다. ‘문학은 죽었다’─이것 역시도 흔하디흔한 말이다. 흔한 말을 하기는 너무 쉽다. 그리고 흔한 말을 믿는 것도 너무 쉽다. 디지털문화와 대중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문학의 지위가 격하되고 대중의 관심이 문학 고유의 범주로부터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로만 야콥슨의 지적대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시라는 하나의 특정 장르 안에서도 지배소가 달라지기도 하고 또한 한 특정 시대의 문화 안에서도 지배소의 장르가 변화하는 것일 뿐 한 장르가 그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지배소는 개개 예술가의 시작품, 혹은 어떤 시파의 규범체계, 곧 시적 규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대의 예술, 곧 특수한 전체상으로서의 한 시대의 예술 속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르네쌍스 시대의 예술에 있어서 그 지배소는 시각예술에서 찾아지고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에서는 지고의 가치를 음악성에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 시는 음악성을 지향하였다. 낭만주의 시대의 운문은 그 촛점이 음악성에 있었고 그에 따라 운문의 억양도 음악적 선율을 모방하였다. 사실주의 미학에서 지배소는 언어예술이었다. 따라서 시적 가치의 위계도 그에 따라 변모된다.”1

따라서 우리는 ‘시는 죽었다’는 대중적인 담론에 우리의 절망을 다 내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영화나 디지털매체 같은 시각예술이 지배소가 되어 지배적인 자리에 있는 것일 뿐 시 자체가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단지 이 시대의 문화 안에서 지배적으로 전경(前景)화되어 있지 않다뿐 후경(後景)에 머무르고 있으며, 대중적인 힘을 상실한 대신 오히려 더 비의적으로 될 수 있고 매니아를 위한 강력한 소수문학이 될 수 있다.  

시인이란 기본적으로 생산은 없고 소비만 만드는 주류의 담론, 즉 ‘지금-여기-있는-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부르주아 담론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주류보다는 소수의 자리에, 주체보다는 타자의 자리에 자기정체성을 놓을 때 더욱 강력하고 생명적인 예술을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부르주아를 싫어했던 롤랑 바르뜨의 입장2을 나는 존중한다.

‘시는 죽었다’라고 말할 때의 시란 ‘대문자’로서의 시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대문자로서의 시란 당대의 역사나 사회, 문화 속에서 무언가 중심적인 기능을 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시인이 문화의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사회·정치의 자리에서도 전경화되어 있던 그런 시대의 예언적·사회반영적·계시적·행동지향적인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시는 죽었다는 말에 나는 수긍할 수 있다. 대문자로서의 시는 죽은 것이다. 대문자로서의 시가 존재하려면 시대와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게끔 하는 중심이라거나 근원, 형이상학적 원천이 구심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심력을 가진 중심이나 세계의 총체성이 파편화된 지 오래된, 분산적인 원심력의 세계이다. 이러한 분산의 시대, 다원적인 세계 속에서 대문자로서의 시의 기능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문자 시의 죽음의 제단에 필요 이상의 헌사나 비탄, 회한 등을 바칠 까닭은 없다. 대문자 시의 죽음은 오히려 다양한 소문자 시들의 자유로운 활성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어느 면에서는 대문자 시의 죽음이 오히려 무수한 젊은 시인들의 게릴라적 분출과 다양한 실험정신을 낳을 수 있는 축성(祝聖)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불타죽은 시체에서 불의 새 포이닉스(phoinix)가 태어날 수 있듯이 대문자 시의 죽음이라는 태 안에서 힘차고 아름답고 실험적이며 자유롭고 분방한 젊은 소문자 시들이 태어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대단히 우울하게도 시단의 무기력증과 상상력의 식물인간적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주류시인들─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저널들의 각광을 받는 시인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의 시세계는 장르상 표현적인 서정시에만 국한되어 있고, 그 서정시적 경향은 대중들의 선호와 더불어 우리 시단의 광범위한 유행을 이루고 있다. 아니면 지나친 성적 표현의 방종한 배설을 해방된 시로 생각한다거나 생명사상에 대한 시를 쓰려면 꼭 자연을 노래한다든가 하는 구태의연한 규범들이 조금의 반성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오늘날의 우리 시단은 이상하게도 젊은 시인들이 늙은 시를 쓰고 있고, 나이든 시인들이 젊은 시를 쓰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천양희·오규원·오탁번·최승호·김혜순·임영조·허만하·최정례·문정희 등이 탄력성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신선하고도 역동적인 젊은 시를 쓰고 있다면, 젊은 시단의 주류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서정시 계열의 시인들은 언어의 기교면에서 어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시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강렬한 시정신, 전복적인 시각, 생동하는 언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학적 기능만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시는 현대시사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상당히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우리 주류시단의 지나친 서정화 경향이라는 대세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서정시란 가장 늙은 시이면서도 가장 젊은 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서정시편들은 젊다거나, 그렇기에 모반의 열정이 있다거나, 전대(前代)로부터 받은 문학적 규범 안에 무언가 자신의 새로운 지문과 뜨거운 숨결을 새긴다는 면에서는 아직 뭔가가 미흡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미학적 둥지의 범주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언어의 다원적 기능을 고려하기보다는 미학적 기능 한가지만에 배타적으로 골몰하기 때문이다.    

시작품이 단지 미학적 기능만을 내포한다고 보는 것은 단원론적 관점일 뿐이다. 하나의 시 텍스트는 지배소로서의 미학적 기능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양한 언어적 기능들의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지시적(referential) 기능, 표현적(expressive) 혹은 감정표시적(emotive) 기능, 능동적(conative) 기능,

  1. Roman Jacobson, The Dominant, Twentieth-Century Literary Theory (St. Martin’s Press 1997) 6〜7면.
  2. 테렌스 호옥스, 오원교 옮김 『구조주의와 기호학』(신아사 1982) 152〜53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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