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숨을 쉴 수 없어”
체제적 인종주의와 미국문학의 현장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1세기의 한반도 구상』(공저), 역서 『필경사 바틀비』 『우리 집에 불났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공역) 등이 있음.
kiwookh@gmail.com
플로이드의 죽음이 촉발한 것
2020년 5월 25일,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충격적인 죽음에 항의하여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된 데는 백인 경찰 데릭 쇼빈(Derek Chauvin)에게 짓눌려 죽어가는 플로이드의 모습이 현재 흑인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쇼빈은 수갑을 채우고 바닥에 눕힌 플로이드의 목을 총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짓눌렀는데, 미동조차 없어진 뒤로도 2분 53초간 더 눌렀다. 20달러짜리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체포된 플로이드는 경찰 검문을 받을 때부터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숨을 쉴 수 없어요”(I can’t breathe)라는 말을 스무차례 이상 되풀이했고 “엄마, 사랑해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나 죽어요”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1
이 사건을 통해 충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노예해방(1863년) 이래 150년, 시민권 쟁취(1965년)로부터 50년이 지났고, 게다가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8년 집권을 거쳤음에도 현재 대다수 흑인들의 삶은 참담하고 그들을 대하는 공권력의 태도 역시 더없이 가혹하다는 것이다. 이번 시위에서 두각을 나타낸 운동단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이하 BLM)와 운동연합체인 ‘흑인생명운동’(Movement for Black Lives, 이하 M4BL)은 모두 오바마 시절에 결성된 것이고, 그 명칭이 일러주듯 흑인의 생명 보호를 일차적인 목표로 내걸었다.2
플로이드뿐 아니라 근년에 터무니없는 이유로 죽은 상당수 흑인들의 마지막 장면에는 그들이 아메리카 땅에서 겪은 온갖 형태의 차별과 냉대, 모멸과 예속이 응축된 듯하다. 가깝게는 1950~60년대 시민권운동 당시 인종격리와 차별에 저항하며 평등한 시민권을 요구한 흑인들로부터 멀리는 노예제 시대 백인 주인의 어떤 처벌에도 복종해야 했던 흑인 노예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초반 남부에서 북부 대도시로 이주하여 백인 주류 사회의 또다른 형태의 차별과 착취에 시달리던 흑인 노동자, 빈민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특이한 것은 최근 죽임을 당한 흑인들의 삶과 죽음이 짐 크로우(Jim Crow)3 시대나 시민권운동 시기보다 오히려 남북전쟁 이전의 노예들의 모습에 더 가까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실 플로이드 살해사건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경찰폭력의 야만성보다 그런 야만적 폭력을 공권력의 이름으로 버젓이 행사하는 방식이다. 경찰은 만약 혐의자가 백인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과도한 폭력을 가난한 흑인들에게 행사했다. 백주의 거리에서 행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천연덕스럽게 자행된 공권력의 이런 폭력행위는 제도적인 지지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플로이드 죽음 이래 ‘체제적 인종주의’(systemic racism)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의들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체제적 인종주의’ 철폐/극복의 주장에서 ‘체제’를 어떤 범위와 차원으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문제의 틀과 해결책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체제’를 법무부와 경찰국, 사법제도처럼 국가기구의 부분적인 제도와 관행에 한정한다면 경찰폭력과 부당한 형사법 제도를 고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 제도와 관행이 개선된다고 해서 미국사회에서 인종주의가 종식될 가능성은 없다. 인종주의의 뿌리는 미국이라는 다인종 국가의 여러 사회적 관계 안에 속속들이 뻗어 있고, 사실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밑바탕에까지 닿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체제로 시작했고 북부 산업지역의 공장제 임금노동 외에도 흑인 노예제를 주요하게 활용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서는 또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는데, 노예화하는 대신 학살하거나 인디언 보호구역에 가두어놓는 ‘정착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를 택했다. 미국의 백인 지배세력은 두 인종에 대해 다른 방식의 지배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 글은 이런 논점들을 염두에 두고 플로이드 항의시위를 계기로 제기된 인종주의 극복의 과제를 ‘체제적’ 관점에서 짚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아메리카 땅에서 흑인 삶의 조건과 인종주의 문제를 천착한 몇몇 문학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종주의 극복의 과제를 인종 간 평등과 정의, 시민권과 선거제도 등을 기준으로 사회정치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노예화와 인종적 격리·차별이 개별 흑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어떻게 와닿았는가를 살펴보는 가운데 인종주의의 본질적 면모를 탐구하는 데는 문학 텍스트 논의가 요긴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차원에서 플로이드가 죽어가며 되풀이한 ‘숨을 쉴 수 없어요’라는 말이 노예제 때부터 지금까지 흑인들 대다수에게 절절히 닿는 언어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이 코로나19와 기후위기 시대에 갖는 특별한 호소력도 상기하게 된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거나 그 때문에 실직한 사람들—흑인들이 인구비례 다수인—에게도 플로이드의 마지막 말은 더없이 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자본주의 말기로 가면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 상당수가 착취당할 뿐 아니라 ‘불완전 고용’(underemployment) 상태에 놓이고 여차하면 ‘폐기처분’되기도 하니, 생존의 위기에 몰린 이들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 이것이 아마도 이번 플로이드 항의시위에 전지구적으로 다양한 인종이 참여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노예로 산다는 것
플로이드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미국 흑인문학, 특히 ‘노예 이야기’(slave narrative)라 불리는 자전적 서사장르의 잔인한 폭력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장르의 고전인 『미국인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 이야기』(1845, 이하 더글러스 자서전)4의 여러 폭력 장면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어린 화자가 처음으로 목격하는 채찍질 장면(1장)이다. 더글러스는 유아기 때부터 자신의 주인인 앤서니 선장—그는 그 지역의 최대 농장주이자 노예주인 로이드 대령 농장의 서기이자 총감독이다—의 가족이 사는 로이드 대농장의 외곽에서 외할머니의 손에 컸기 때문에 자신이 일곱살 때 죽은 어머니와는 평생 네댓번 보았을 뿐이다.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자신의 주인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이다. 노예의 생부가 노예주인 경우는 실로 허다했다.5
어린 더글러스는 주인집에 와서 산 이후 새벽녘에 헤스터 이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비명”(heart-rending shrieks) 소리에 깨어나곤 했는데, 이모가 채찍질당하는 장면을 이렇게 서술한다.
그[앤서니 선장]는 헤스터 이모에게 채찍질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를 부엌으로 데려가, 목에서 허리까지 발가벗겨 목과 어깨와 등이 완전히 드러나게 했다. (…) 그는 그녀의 양손을 교차시킨 후, 튼튼한 밧줄로 양손을 묶고, 그런 용도로 들보에 설치한 커다란 갈고리 밑의 스툴 의자로 그녀를 끌어갔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올라가게 하고 그녀의 손을 갈고리에 묶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흉측한 의도에 맞춰 똑바로 섰다. 그녀의 팔은 최대한으로 뻗쳐졌고 그녀는 발가락 끝으로 겨우 섰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자, 이 **년, 내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겠어!”라고 말했고, 소매를 걷어붙인 후 무거운 소가죽으로 가격하기 시작했으며, (그녀에게선 가슴 찢어지는 비명이, 그로부턴 무시무시한 욕설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 곧 따뜻하고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무섭고 공포에 질려 옷장 속에 숨었으며, 그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끝난 지 한참 지나도록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음 차례는 내가 될 줄 알았다.(42~43면)
이모가 채찍 맞는 이 광경은 선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읽기 불편하지만, 노예제의 폭력적 현실을 논하려면 건너뛰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노예제를 포함한 인종주의에는 인종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성적인 폭력도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더글러스가 “내가 뭔가를 기억하는 한 그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장면이 인종적이자 성적인 폭력의 현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내가 곧 통과하게 될 노예제라는 지옥의 입구, 피로 얼룩진 관문”이라고 평하는데, 이 표현에서 암시되듯—자신이 채찍질당할 때가 아니라—이모가 채찍질당하는 광경을 최초로 목격한 것이 어린 화자에게는 일종의 노예제 ‘입문’ 경험이었던 것이다.(42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화자 자신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이 대목에서 ‘노예 됨’의 관건적인 특징 몇가지는 짚을 수 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다른 사람(주인)에게 넘겨주고 그 사람의 처분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노예 됨의 전제조건이라면 노예화된 몸의 두드러진 특징은 고통과 공포, 그리고 수치, 특히 성적인 수치가 아닐까 싶다. 이 세 요소의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고, 당사자(이모)와 목격자(더글러스)의 느낌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린 화자가 “그 광경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종이에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42면)이라고 했듯이 세 요소가 뒤섞이면서 형언하기 힘든 정동을 자아낸다. 그런 가운데 확실하게 감지되는 것은 노예제하에서 절대 권력자인 백인 주인이 흑인 여성 노예를 신체적·정신적으로 최대한 학대하려는 의지를 관철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통과 공포뿐 아니라 성적인 수치심까지 동원한다는 것이다.
플로이드가 짓눌림을 당하는 모습에서 꼼짝없이 채찍질당하는 흑인 노예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양자가 엄연히 다른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노예화된 몸의 두드러진 특징인 고통과 공포, 수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경찰은 수갑을 채워 플로이드를 꼼짝 못하게 해놓은 상태에서 땅바닥에 쓰러뜨리고는,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무릎으로 그의 목을 짓눌렀는데, 9분 가까이 계속된 이 동작은 신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