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스스로 다스림의 한해를 시작하며

 

 

2009년은 잔인하게 시작되었다. 시민 5명과 경찰 1명이 불에 타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한국사회가 웬만큼 발전과 진보를 이뤘다고 자족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뒷덜미를 잡는 야만적 사건이 일어나곤 했지만, 용산 참사는 여느 사건과 다르게 느껴진다.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해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만큼은 없으리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기초가 억압적 국가기구의 민주화에 있음을 생각할 때,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 징표가 아닐 수 없다.

건설자본 중심의 재개발방식이 가진 제도적 폭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철거민에 대한 용역업체의 적나라한 물리적 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부유층은 물론 중간계층까지 부동산개발 열풍에 휩쓸리는 바람에 철거민들의 고통은 의당 받아야 할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는 그 이상인 면이 있다. 참사가 일어난 용산 제4지구 재개발지역은 올해 2월에 착공이 예정된 곳이었다. 그전에 철거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용역업체는 지체보상금을 토해내야 할 처지였다. 이 때문에 철거가 무리하게 강행되었고 주민의 저항 역시 그만큼 격렬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저항하는 철거민을 진압하는 데 경찰이 적극 나섰다는 것이다. 토지와 도시공간이라는 공유자산을 사적 이윤창출의 근원으로 전환하는 건설자본의 이익추구는 그런 공유자산을 팔아넘기는 국가권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용산 참사는 자본과 국가권력이 결탁의 정도를 넘어 한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생각해보면 이명박정부가 벌인 일들은 모두 사회적 공유자산을 팔아치우는 짓과 관련된 것들이다. 땅 위의 수직공간 전부를 사유화할 수 있게 해준 제2롯데월드 건설허가가 용산 재개발사업과 곧바로 연결되는 사례라면, 몇몇 수출중심 대기업의 이익에 편향된 한미FTA 체결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은 국민의 건강을 상업적 이익에 종속시킨 것이었다. 4대강 정비사업으로 포장지만 바꾼 대운하사업 또한 하천과 그 인근지역 전체를 이윤의 대상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이며, 공유자산인 주파수 대역을 상업화하려는 방송 민영화 역시 그러하다.

이전에는 상품이 아니었고 상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공공재를 시장으로 쓸어넣는 시장만능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야경국가를 지향한다. 하지만 감세를 지향하는 이 야경국가는 철권을 휘두르는 경찰국가로 쉽게 이행될 수 있다. 사회적 공론과의 연계가 끊어져 도구화된 ‘법치’가 유일한 정당화 원리로 주장되는 경찰국가로의 이행이 최근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의 행동에서처럼 잘 드러난 적은 없다. 5공화국 이전으로 후퇴한 듯한 기득권층의 행태에서 그들이 공공재 약탈과 공직 사냥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최소한의 공적 감수성마저 내팽개쳤음을 목격하게 된다. 최근 고려대의 입시 논란이나 보수언론의 논조를 보면 기득권층에 어떤 후안무치의 분위기마저 흐르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런 유례없이 공격적인 시장화는 오래전 폴라니(K. Polanyi)가 말했던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촉발했다. 양상은 다르지만 촛불항쟁에서 방송파업 그리고 용산 철거민들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성원들은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에 나섰다. 금융부문에서 실물부문으로 번져간 경제위기는 저임금과 실업의 위기에 내몰린 대중 그리고 아예 취직조차 못해 고통을 겪는 청년들을 그 운동 속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이 운동은 촛불항쟁처럼 승화된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거기엔 낡은 가치나 작은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상처입은 자들의 분노가 여과없이 표출되기도 할 것이다. 기득권층은 그런 점을 집요하게 부각함으로써 운동의 정당성을 침식하려 들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한편으로 그것이 과도한 시장화라는 가해행위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것임을 분명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 속에서도 부단한 자기정화 노력을 거듭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그럴 때에만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지혜롭게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으며, 자기통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대한민국의 통치, 그러니까 ‘나라 다스리기’는 고장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하지만 다음 선거를 기다려 이를 정정하기에는 상황이 엄중하다. 고장이 파괴를 부름으로써 많은 것들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에 이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기통치, 곧 ‘스스로 다스림’의 길에 나서야 할 때다.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정성스레 보살피고 관리하는 것이고, 잘못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다친 것을 낫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분노와 아픔과 배고픔을 다스려야 한다. 또한 그렇게 우리들의 사회, 경제, 정부를 스스로 살피고 헤아려 다스려야 한다.

이 다스림의 길은 못난 정부와의 파국적인 대결의 길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 사회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이룩한 민주주의의 미흡함에 실망하여 도리어 민주주의로부터 뒷걸음쳤다. 지금 그런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파국적 대결의 길에 나선다면, 그것은 또다른 방식으로 민주주의로부터 뒷걸음치는 것이 될 위험이 있다. 하나의 잘못이 유도하는 다른 잘못의 가능성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다스림의 길이거니와, 절실한 것은 유례없는 시민참여의 활성화이다. “시민사회가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거버넌스의 일부를 담당할 만한 책임성과 전문성을 함양하면서, 정당·사회단체·노동조합·종교계 들이 연대하여 입법부의 활성화,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건전성 등을 확보할 범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백낙청 「거버넌스에 관하여」, 창비주간논평 2008.12.30) 오바마 정부의 출범으로 북미관계 개선의 전망이 밝은 이때, 시운에 역행하는 이명박정부로 인해 교착을 넘어 대결의 위험마저 어른거리는 남북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 또한 이런 다스림의 중요한 영역이다. 걱정없이 꽃게철을 맞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스스로 다스리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극진함임을 마음에 새기자.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더이상 지배적 질서로 작동하지 않게 됐지만, 그로 인해 열린 공간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한 상태다. 이번호 특집 ‘신자유주의를 넘어 어디로?’는 이 공간을 채워나갈 새로운 지구적 질서의 모형을 탐색하고자 했다. 새로운 질서가 어떤 것이 되느냐가 향후 몇십년간 인류의 삶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임을 생각하면 이 과제의 중차대함은 두말할 나위 없으며,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가능한 실천이 무엇인지 찾아나가는 것 또한 그러하다. 첫 글은 브루스 커밍스와 백낙청의 대화로 꾸몄는데, 신자유주의 몰락의 경과를 짚으며 그것을 최근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고찰한다. 두 석학은 민주화 이전으로 우리 사회를 되돌리려는 이명박정부의 시도가 짜낸 치약을 다시 튜브에 밀어넣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시도라는 점에 인식을 함께하며, 오바마 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진보적인 시민사회간 연대를 모색한다.

다음으로 최태욱은 지역협력체와 그런 협력체간의 협의구조 속에서 더 민주적인 지구적 거버넌스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런 지구적 거버넌스 형성의 핵심고리는 당연히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이다. 그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추진되고 있는 다양한 동아시아의 지역협력 사례들을 소상히 살피며, 한반도의 평화와 분단체제 극복이 동아시아와 전지구로 이어지는 새로운 질서의 핵심고리임을 밝힌다.

이어지는 임원혁과 하가 켄이찌의 글은 세계적 차원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를 변형해왔고 향후 전망은 어떤지 분석한다. 임원혁이 지적하듯 자본의 권력을 확대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인만큼, 그 폐해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힘이 존속하는 한 신자유주의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성공’한 것은 그것이 대중의 상식적 지식으로까지 침투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가 켄이찌가 역설하듯이 신자유주의의 주술을 떨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의 언어’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그 너머를 향한 모색을 끈기있게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이번 특집의 문제의식과 이어지는 글 세편이 ‘논단과 현장’에 실렸다. 먼저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 20주년을 맞아 쓴 이승환의 글이 남북관계가 정면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각별하게 다가온다. 방북의 결실인 ‘4·2공동성명’이 6·15공동선언의 전편임을 일깨우며 남북관계 복원을 위해 민간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자간 협력을 내세운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후 벌어진 군비경쟁 약화의 틈새를 이용해 동북아 평화군축을 추진하는 시민사회의 국제적 연대운동을 전망한 정욱식의 실천적 보고서도 눈길을 끈다. 또한 10년 전 ‘소국주의’에 주목한 글을 본지에 발표한 바 있는 최원식은 그로부터 더 나아가 소국주의를 중형국가론에 접목하고자 시도한다. 동아시아의 사상적 광맥에서 소국주의의 유산을 캐내는 그의 작업은 시의에 맞는 발전전략을 위한 새로운 사유의 틀과 더불어 인문학적 글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번호 문학평론란도 다채롭다. 이장욱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지난호 특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오늘날 시와 정치의 관계를 다시 묻는데, ‘새로움’이라는 가치가 처한 현대적 조건과 전위의 정치성이 핵심적인 주제다. 손정수는 창비 안팎의 비판을 되짚으며 지난 특집이 과연 창비와 한국문학의 문제를 점검하는 데 효과적이었는지를 신랄하게 따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동엽 시인의 40주기를 맞아 마련된 평론에서 오창은은 ‘비체제적 상상력’과 ‘민주주의적 생명존중사상’을 핵심어로 삼아 신동엽의 문학과 1960년대를 재구성한다. 그밖에 1929년에 출간된 프롤레타리아문학 작가의 장편소설 『게 공선』이 최근 일본에서 베스트쎌러가 된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한 노마 필드의 문학시평은 이 시대의 사회현실에서 문학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창작란에서는 김경욱, 김중혁, 서유미의 감칠맛 나는 소설들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 또한 신경숙에 이어 새로 연재를 시작한 김연수의 장편소설 첫회분에 설레는 마음이다. 작가 특유의 격조있는 서정성과 역사적 상상력의 날개를 활짝 펼쳐 보일 이번 작품이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리라 믿는다. 소중한 시편들을 기고해준 시인 열두분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문학초점과 촌평에 실린 글들은 기획하는 편집진이나 집필해준 분들 모두 각별히 공을 들였는데 이 자리에서 일일이 소개할 수 없어 아쉽다. 한분 한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들이 실렸다. 수상자들에게 축하드리며, 이들 모두 앞으로 우리 문단에 신선한 감수성을 제공하리라 기대한다.

끝으로 편집위원진의 변화에 관해 독자들께 알려드릴 일이 있다. 상임편집위원은 편집위원진 내부에서 돌아가며 맡기로 한 바 있는데, 이번호부터 유희석 백지연 두분이 상임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전에 있던 부주간직을 부활시켜 한기욱 편집위원이 맡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문학부문이 한층 더 활성화되길 기대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새봄에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듯, 새로운 활기가 본지에 충만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金鍾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