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스키조와 아나키
2000년대 한국 시의 정치학을 위한 단상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아포리아의 제국」 「당신의 ×, 그것은 에티카」 등이 있음. poetica7@hanmail.net
시적 정치학의 두 층위
다시 읽는 김수영(金洙暎)의 시론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가 시학과 정치학과 윤리학을 별다른 배려 없이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연록 「시여, 침을 뱉어라」(1968)에서, ‘형식’과 ‘내용’에 관한 시학적 해설은 돌연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관한 정치적 논설로 비약하고, 그것은 서로 먼저 침을 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모멸시대의 윤리학으로 도약한다. 그의 저 유명한 ‘온몸’의 시학은 형식의 ‘예술성’과 내용의 ‘현실성’혹은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분열을 강요했던 외부의 억압을 돌파하여 그 간극들을 끝내 합치기 위한 모험이었고, 무의식(형식)과 의식(내용)의 일치를 추구하는 윤리적 행위에의 호소였다. 시학, 정치학, 윤리학의 영역에서 끝내 완강했던 모종의 간극을 그는 봉합하지 않았고, 세 영역이 한몸이라는 진실을 훼손 없이 전달하기 위해 그 진실의 난맥을 정리하지 않았다. 간극이 초래하는 긴장과 난맥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그대로 그의 전언이었다. 시학과 정치학과 윤리학이 형성하는 삼각형 중에서 특정한 면만을 보기로 작정한 독자에게 그의 글은 기꺼이 명료해질 테지만, 아마도 그때의 김수영은 더이상 김수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 김수영의 시적 성공이 바로 저 ‘간극’과 ‘난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후기 걸작인 「꽃잎 2」와 「풀」을 감싸고 있는 미묘한 긴장은 ‘꽃잎’과 ‘풀’이라는 기표가 끝내 저 자신의 이타카(Ithaca)인 안온한 ‘상징’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데서 발원한다. 저 기표들은 기의와 만날 듯 만나지 못하면서 떠다니는데, 이 기표와 기의의 간극 속에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간극이 음화(陰畵)로 새겨진다. 누군가가 부주의하게도 ‘꽃잎’은 ‘시(詩)’를 상징하고 ‘풀’은 민중을 상징한다고 공표하는 순간 저 긴장의 세계가 허망하게 붕괴하고 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난맥은 미학, 정치학, 윤리학이 동시에 뒤엉키면서 만들어내는 난맥이다. 그 셋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수술은 미숙아를 낳는다. 남는 것은 미학적으로 거칠고 정치적으로 모호하며 윤리적으로 나약한 시다. 말하자면 김수영의 힘은 그의 삼각형이 형성하는 어떤 절합(節合) 구도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는 예의 강연록의 부제를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라고 달아야만 했다. 그의 힘은 표면적인 ‘전언’의 힘이 아니라 특정한 구도를 형성하는 그 ‘존재(있음)’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와 같은 긴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강연록보다 1년 앞선 한 글에서 “외부와 내부는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서 합치되는 것이다”1라고 쓰면서 ‘온몸’시학을 예고했다. 외부와 내부는 똑같은 것이라는 김수영의 당위명제는 당시에 강력한 윤리적 자극을 내장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말을 사실명제로 바꿔서 반복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외부와 내부는 실제로 똑같다. 억압과 금기가 헐거워진 곳에서 “죽음에서 합치되는”경지는 실종된다.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모멸의 제스처도 진정성을 갖기 어렵다. 외부와 내부는 같고, 우리에겐 쓰지 못할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온몸’의 역동성을 무력화시키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는 결국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시대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에서 대문자 정치는 끝났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작동(work)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문자 정치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시들은 이상하게도 미학적으로 퇴행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능한가? 오늘날 가능한 것은 금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 대한 거절일 것이다. 이제 권력은 ‘하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고 ‘하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금지하는 아버지가 폐위된 이후에야 우리는 향유(jouissance)를 권하는 아버지의 심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 ‘외설적인 아버지’(지젝)의 가장 확실한 업적으로 보이는 것은 완강한 자기동일성으로 무장한 집단주의의 양생술과 전체주의적 쾌락을 조직하는 씨스템의 유혹술이다. 강정구, 황우석, 월드컵, 독도 등을 둘러싸고 터져나온 그 자기확신에 찬 목소리들의 일사불란한 의미작용은 ‘욕망의 정치학(미시정치학)’이 작동하는 양상을 매우 불쾌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오늘날 ‘시의 정치’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저 동일성과 전체성의 전장(戰場)일 것이다. 차이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 생체 정치 등이 운위되고 있고, 과연 차이, 정체성, 몸 등의 주제가 젊은 세대의 시인들에게서 과거와는 다른 감각으로 사유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정치를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정치를 살고 있다. 무슨 뜻인가?
한편의 시는 하나의 국가다. 거기에는 권력을 대리하는 ‘통치’의 심급이 있고 권력이 운용되는 ‘체제’의 심급이 있다. 이는 각각 ‘화자’의 심급과 ‘스타일’의 심급에 상응할 것이다. 한편의 시를 읽는 일은 특정한 ‘통치자(화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특정한 ‘체제(스타일)’의 양상을 확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요컨대 모든 시는 제 나름의 통치론과 체제론을 머금고 있다. 어떤 세대의 시인들은 자명한 일인칭 통치자가 일사불란하게 의미를 생산해내는 체제에 얼마간 지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거의 체질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어떤 통치와 체제의 메커니즘을 한편의 시에 투영하면서 간접적으로 ‘미시정치’에 가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체로 그들은 통치자의 동일성을 휘발시켜버리고 선형적인 의미생산 체제를 교란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국가에 새로운 통치론과 체제론을 도입한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격렬한 질문과 전체로서의 형식에 대한 해방적 교란이 ‘다른
- 김수영 「참여시의 정리」,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03, 39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