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변화하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민중운동

 

슬럼투성이 지구

도시의 슬럼화와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

 

 

마이크 데이비스 Mike Davis

1946년 캘리포니아주 쌘 버너디노 출생. 정육노조의 장학금으로 대학에 들어감. 이후 민권운동, 반전운동, 노동운동에 참여. 1980년 New Left Review지의 편집진에 합류. 현재 어바인 소재 캘리포니아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Prisoners of the American Dream, 창작과비평사 1994)이 국내에 번역됨. 이 글의 원제는 “Planet of Slums: Urban Involution and the Informal Proletariat”이며 New Left Review 26호(2004년 3-4월호)에 실림. miked@uci.edu

ⓒ Mike Davis 2004 / 한국어판 ⓒ (주)창비 2004

 

 

내년 어느날엔가 나이지리아 라고스의 슬럼 아제군레(Ajegunle)에서 아이 하나가 태어날 것이고, 청년 하나가 인도네시아 자바 서부의 고향마을을 떠나 휘황찬란한 자카르타로 상경할 것이며, 농부 하나가 가난에 몰린 가족을 이끌고 뻬루 리마의 무수한, ‘젊은 마을’(pueblo joven)로 이주할 것이다.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모이면 인류 역사의 분수령이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상에서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보다 많아지는 것이다. 제3세계 인구조사의 부정확성을 감안하면 이 세기적 전환은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다.

지구의 도시화는 ‘로마클럽’(1968년 서유럽의 정계·재계·학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로마에서 결성한 국제적인 미래연구기관―옮긴이)이 멜서스(T. Malthus)식 발상의 악명높은 1972년 보고서 『성장의 한계』(Limits of Growth)에서 처음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1950년 전세계에서 인구가 100만명이 넘는 도시는 86개였다. 지금은 400개이며, 2015년에는 550개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도시는 1950년 이후 전지구적 인구폭발로 늘어난 인구의 약 2/3를 흡수했다. 지금도 도시인구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과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로 매주 100만명씩 증가하고 있다. 현재의 도시인구(32억)는 1960년의 전세계 총인구보다 많다. 한편, 전세계 총 농촌인구는 한때 최대치(32억)에 도달했다가 2020년을 기점으로 줄어들 것이다. 결국 앞으로 세계에서 인구가 늘어날 곳은 도시로 ‘국한’될 것이며, 세계인구는 2050년에 100억이라는 최대치에 도달할 것이 예상된다.1

 

 

1. 도시의 갱년기

메트로폴리스의 영웅, 식민지 개척자, 희생자는 어디에 있는가?

―브레히트 『일기』(1921)

 

이렇게 증가하는 인구의 95%는 개발도상국 도시지역에 집중될 것이며, 다음 세대의 개발도상국 도시인구는 두배로 늘어 거의 40억에 육박할 것이다.2 (사실 중국과 인도와 브라질의 도시인구를 합하면, 이미 유럽 및 북아메리카 인구와 맞먹는다.)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인구 800만 이상의 거대도시(megacity), 나아가 주민 2000만―이는 프랑스혁명 당시 전세계 도시인구의 추정치이다―이 넘는 초거대도시(hypercity)가 여기저기 솟아나는 장관이 연출될 것이다.3

1995년에 인구 2000만을 확실히 넘는 도시는 토오꾜오밖에 없었다. 『극동경제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에 따르면, 2025년이 되면 그 정도 규모의 대도시권은 아시아에만―자카르타(2490만명), 방글라데시의 다카(2500만명), 파키스탄의 카라치(2650만명)를 포함해―10개 내지 11개가 생겨날 것이다. 샹하이와 뭄바이(봄베이)도 거론된다. 마오(毛)주의에 입각한 의도적인 도시화 억제정책으로 수십년간 성장이 동결됐던 샹하이는 양쯔강 어귀의 거대한 메트로 지대에 무려 2700만명의 주민이 살게 될 수도 있다. 뭄바이는 인구 3300만명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런 어마어마한 빈곤집중을 생명체와 자연환경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거대도시가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라면, 인구증가분의 3/4을 수용하게 될 지역은 희미하게 빛나는 2등성의 도시와 중소도시 지역이다. 그런데 유엔 조사관들이 강조한 것처럼, “이런 지역의 주민에게 편의시설이나 공공써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도시계획은 거의 혹은 전혀 세워지지 않고 있다.”4 중국에서 공식 집계된 도시 수는 1978년 이후 193개에서 640개로 급증했다.(1997년 공식집계로는 중국의 43%가 도시지역이다.) 그러나 대형 메트로폴리스의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도시인구 분담률은 사실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1979년 시장개혁으로 인해 남아도는 농촌 노동력의 대다수를 흡수한 곳은 오히려 중소도시, 그리고 최근에는 ‘도시화되고 있는’ 마을이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다. 라고스를 비롯한 몇몇 초대형 도시가 초신성같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편(라고스 인구는 1950년 30만에서 오늘날 1000만으로 증가했다), 부르키나파소의 와가두구, 모리타니의 누악쇼트, 카메룬의 두알라, 마다가스카르의 안타나나리보, 말리의 바마코 등 수십개의 작은 마을과 오아시스가 쌘프란씨스코나 맨체스터보다 더 큰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도 예외는 아니다. 1등성도시들이 오랫동안 성장을 독점해왔지만, 이제는 멕시코의 띠후아나, 브라질의 꾸리띠바, 칠레의 떼무꼬, 브라질의 쌀바도르·벨렘 등 2등급 도시들이 급성장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는 지역은 10만명에서 50만명이 거주하는 도시이다.”5

또한 그레고리 굴딘(Gregory Guldin)이 주장한 것처럼,도시화의 개념은 도시―농촌 연속체의 모든 지점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도시화란 도시와 농촌의 구조적 변형을 의미하는 동시에 양자의 상호작용이 증대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굴딘의 중국 남부 연구에 따르면, 시골 자체가 도시화하는 동시에 시골에서 엄청난 규모의 이주민이 발생한다. “시골 마을은 점점 시장과 ‘샹’(鄕, 중국 농촌의 행정단위―옮긴이) 마을을 닮아가고, 지방도시와 중소도시는 점점 대도시를 닮아간다.” 이로 인해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양면적 풍경―일부만 도시화된 시골―이 나타난다. 굴딘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양면적 풍경은 “인류가 정착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의미심장한 경로 (…) 농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양자의 혼합된 형태로, 조밀한 상호교류망이 중심의 대도시와 그 주변의 지역을 연결한다.”6인도네시아에서도 자보타벡(Jabotabek, 자카르타 광역수도권)을 중심으로 중국과 유사한 농촌·도시의 혼종화(hybridization)가 많이 진행된 상태다. 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토지용도 유형을 ‘데소코타’(desokota)라 부르면서, 데소코타가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도시화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도시학자들은 제3세계 도시들이 서로 엮여 특별한 새로운 네트워크, 회랑지대(回廊地帶), 위계구조로 구축되는 과정에 관해 숙고한다. 예컨대, 쥬강(珠江)삼각주(홍콩―꽝져우)와 양쯔강 삼각주(샹하이)는, 뻬이징―톈진 회랑지대로 연결되어 (토오꾜오―오오사까 지역, 라인강 하류 지역, 뉴욕―필라델피아 지역에 비견되는) 도시―공업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로 급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구조물, 가령 “일본·북한에서 자바 서부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도시 회랑지대”의 초기단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샹하이는 토오꾜오·뉴욕·런던과 함께 전지구적 자본과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 ‘세계도시’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질서의 댓가는, 규모와 성격이 다른 여러 도시의 도시내 불평등 및 도시간 불평등의 심화일 것이다. 예컨대, 굴딘은 옛날의 도농간(都農間) 소득 및 개발 격차가 이제 그 못지않게 근본적인, 중소도시와 해안의 초대형도시 사이의 격차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중국의 흥미로운 논의를 인용하고 있다.

 

 

2. 디킨즈 시대로 돌아가다

나는 어둠, 불결함, 전염병, 음란함, 비참함,

때이른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무수한 무리를 보았다.

―디킨즈 「12월의 전망」(1850)

 

제3세계 도시화의 동학(動學)은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도시화를 되풀이하면서 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는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상 최대의 산업혁명은 유럽의 인구 정도를 농촌마을에서 스모그와 마천루의 도시로 옮겨놓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이다. 이로 인해 “수천년간 두드러지게 농촌중심 국가였던 중국이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7 샹하이 ‘세계금융쎈터’의 초대형 유리창은 마오 쩌뚱(毛澤東)은 물론 르꼬르뷔지에(Le Corbusier,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도시설계가―옮긴이)도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도시사회를 곧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도시의 성장에는, 확실한 제조―수출 동력이 있거나 (현재 개발도상국으로 들어오는 총 외국자본의 절반에 이르는) 중국처럼 외국자본의 대거 유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국 이외 지역의 도시화는 산업화와 급격히 분리되고, 심지어 개발 자체와도 분리되었다. 혹자는 이것이 냉혹한 현실―생산증대와 고용증대를 분리하는 씰리콘 자본주의의 본질적 성향―의 한 표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성장 없는 도시화는 기술진보에 따른 철칙이라기보다 전지구적 정치위기―1970년대 후반의 채무위기, 연이어진 1980년대의 IMF 주도 제3세계 경제개편―의 유산이다. 게다가 제3세계 도시화는 실질임금 하락, 물가상승, 도시실업 급증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불황기를 위험천만한 속도(1960년에서 1993년까지 연평균 3.8%)로 달려왔다.

이 ‘뒤틀린’ 도시 붐은 도시의 경기침체라는 부정적 피드백이 시골에서 도시로 향하는 이주의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이주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예측한 기존 경제모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특히 역설적이었다. 코트디부아르, 탄자니아, 가봉 등 경제가 매년 2~5%씩 후퇴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도시는 아직도 연평균 5~8%의 인구증가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비밀의 일부는 바로 IMF였다. IMF가 강요했던 (지금은 WTO가 강요하는) 농업규제 철폐정책과 ‘탈농민화’정책은 도시에서 고용창출이 중단된 후에도 농촌의 잉여인구가 도시의 슬럼으로 몰려가는 대탈주를 가속화시켰다. 도시의 경제성장이 정체하거나 후퇴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것은 몇몇 학자가 ‘과잉도시화’로 명명한 현상의 극단적인 면모이다.8 이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자유질서는 천년 동안 이어져온 도시화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맑스에서 베버에 이르는 고전적 사회이론에 의하면, 앞으로 생겨날 대도시도 맨체스터, 베를린, 시카고가 거쳐간 산업화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 쌍빠울루, 부산, 그리고 최근 시우다드후아레즈(멕시코), 방갈로르(인도), 꽝져우는 대체로 이러한 고전적 궤적을 밟아왔다. 그러나 남(南, 지구상의 빈국들을 가리킴―옮긴이)의 대다수 도시는 빅토리아 시대의 더블린과 흡사하다. 에밋 라킨(Emmet Larkin)이 강조했듯, 당시의 더블린은 “19세기 서구사회에서 만들어진 모든 슬럼권” 중에서도 독특했는데, “더블린의 슬럼은 산업혁명의 산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1800년에서 1850년까지 더블린의 골칫거리는 산업화가 아니라 산업기반의 붕괴였다.”9

콩고의 킨샤사, 수단의 카르툼,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방글라데시의 다카, 뻬루의 리마 역시 수입대체산업의 몰락, 공공부문의 위축, 중산층의 지위 하

  1. 그런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인구는 세배, 인도의 인구는 두배로 늘어날 것이 예상된다.
  2. Global Urban Observatory, Slums of the World: The face of urban poverty in the new millennium?, New York 2003, 10면.
  3. 지구의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정 도시는 크기에서의 한계와 과밀화 현상에 직면해 성장률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런 ‘양극화 역전’의 유명한 사례로 멕시코씨티를 들 수 있다. 1990년대에 멕시코씨티 인구는 2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 인구는 약 1800만명에서 1900만명 정도이다.
  4. UN-Habitat, The Challenge of the Slums: Global Report on Human Settlements 2003, London 2003, 3면.
  5. Miguel Villa and Jorge Rodriguez, “Demographic trends in Latin America’s metropolises, 1950~1990,” in Alan Gilbert(ed.), The MegaCity in Latin America, Tokyo 1996, 33~34면.
  6. Gregory Guldin, What’s a Peasant to Do? Village Becoming Town in Southern China, Boulder, co 2001, 14면, 17면. 또한 Jing Neng Li, “Structural and Spatial Economic changes and their Effects on Recent Urbanization in China,” in Gavin Jones and Pravin Visaria,(eds), Urbanization in Large Developing Countries, Oxford 1997, 44면 참조.
  7. Wang Mengkui, advisor to the State Council, Financial Times 2003년 11월 26일자에서 인용. 1970년대 후반의 시장개혁 이후 거의 3억명의 중국인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것으로 추산된다. 앞으로 몇십년 안에 2억5000만명에서 3억명이 추가로 이동할 것이 예상된다.
  8. 반면에 소련과 마오 시대 중국의 계획경제 시절에는 도시 전입에 제한이 있었고, 따라서 ‘도시화 억제’ 경향이 있었다.
  9. Foreword to Jacinta Prunty, Dublin Slums 1800~1925: A Study in Urban Geography, Dublin 1998, ix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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