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시간의 원근법과 잔여물

박형준·전남진·이원의 최근 시를 중심으로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강사. 평론집 『환각의 칼날』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다양한 시간들의 공존

 

우리 시대의 자연과 문명은 화합이 아닌 일차원적인 ‘합성’의 상태에 있다. 자연과 문명이 기계 인간처럼 합성된 세계에서 오늘의 시인들은 어디에 속해 있어야 할까? 또 시간이 제 운명을 다하기도 전에 미래가 급습해 과거의 생성 속도를 빠르게 하는 시대에 시인들은 어떤 시간을 살아야 할까? 근대의 초기에 뛰어난 선각자들이 간파했듯이, 우리는 ‘근원의 키메라’(니체)가 죽임을 당하고, 자족적 유기체인 자연이 무너져 ‘반자연의 미학’(보들레르)이 예술의 모토가 되었으며, 아우라를 상실한 산업사회에 반발하는 ‘소외된 세계의 재소외’(아도르노)를 통해 진정성에 이르는 기묘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근대는 처음부터 ‘자연’과 ‘과거’를 낡고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근대의 터전은 파괴된 자연 위에 마련되었고, 근대의 정당성은 미래의 환상으로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에 대한 반성이 가속화되는 지금도, 자연과 과거는 여전히 부정적인 대상으로 분류된다. 다시 찾고 싶은 아름다운 세계이지만, 분별없이(?) 그리워해서는 안되는 것. 문명과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지만, 망각의 도피처가 될 가능성이 있어 위험한(?) 것. 자연과 과거에 대한 선입관은 어느정도 고정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차원이 다를 뿐 문명과 현재 역시 우리에게는 부정의 대상이다.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문명과 인간을 분절하고 소외시키는 시간을 승인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근대세계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분리함으로써 존재를 이중으로 분열시켜왔다. 오늘날 시인들이 끊임없이 근원을 갈구하는 것은, 근대문명이 선천적으로 근원의 결핍을 안고 있는 강박의 문명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공간의 분할과 합성이 근대세계의 중요한 특징임을 감안할 때,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비동시적인 시간의 공존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흥미롭다. 거창하게 말하면, 이는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근대의 단계를 시사하는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젊은 시인들이 그리는 다양한 시간은 마치 시간의 역사적 단면을 한곳에 펼쳐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이질적인 가치가 범람하는 시대에 젊은 시인들은 사실상 하나의 시대감각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이들의 시에 다양한 시간이 혼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인 셈이다. 비동시적 시간의 공존은 두 가지 배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근대의 가속도가 몇 세대를 압축할 정도에 이르러 그 중첩이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영되었다는 것. 역사적으로 전개된 시간이 한 지점에 집결하는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변화속도가 빨라지면서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다. 둘째, 90년대 이후 문학의 다원화로 우리 시가 다양한 시간의 스펙트럼을 갖게 되었다는 것. 시간의 스펙트럼은 시간의 차원을 넘어 시인의 세계관과 감각 및 가치의 다양성을 포괄한다. 시인들은 이제 자신이 존재할 시간을 ‘선택’함으로써 시적 지향과 미학적 입지를 드러내는 중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박형준·전남진·이원의 최근 시들은 젊은 시인들의 다채로운 시간 유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어린시절과 전설 속의 시간이 살아숨쉬는 박형준의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일상적인 현재의 시간이 빽빽이 꽂혀 있는 전남진의 『나는 궁금하다』, 해체되고 가공된 미래의 시간이 스멀거리는 이원의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현재 우리 시가 소유한 폭넓은 시간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세 시인들은 안주할 수 있는 진정한 시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편입된 삶의 풍경을 그리면서, 시의 기본 코드인 자연과 문명, 생활세계와 바깥세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개성적인 방식으로 조합해낸다. 이들의 시가 한곳에 모여 있는 풍경은 하나의 거대한 ‘시간의 박물관’을 형성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속으로 풍성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준다.

 

 

2. 오래된 시간의 성(城)—박형준

 

지금 우리 시단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미학적인 열망이 번성하고 있다. 경험적 현실과 일상의 감각보다는 자연과 내면을 우위에 두는 시인들은 미묘한 시세계를 빚어낸다. 각기 성향은 다르지만, 장석남·나희덕·박형준·안도현·고두현·고창환·문태준·권혁웅·김선우 등의 시인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굳은 감각의 각질을 벗겨 새살이 돋게 하는 ‘감각의 박피술’이나, 기억의 내용물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기억의 응고술’을 활용한다. 미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하나의 경향이 된 것은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비판적인 시선이 좀더 우세한 듯하다. “초월적 순결에 감염”되어 “반성 없이 비만해져가는 우리 시단의 지나친 서정화 경향”을 질책하고(김승희), “삶의 경험적 실감보다는 섬세한 상상적 미감을 줄곧 택하”는 시인들의 태도와 “우리 시에 만연해 있는 자연 과잉, 유년(기억) 편향에 대한 근원적이고 비판적인 검토”를 제안하는(유성호) 것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진지한 성찰과 비판정신이 돋보이는 이 견해들은 문제의 본질을 날카롭게 간파하면서 경청할 만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연과 과거의 시간이 갖는 시적 의미에 대해서는 더 숙고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자연의 미학이 중심 담론이 된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배경에 있다.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현실 속에서 시인들은 ‘미적인 것’을 하나의 출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현실의 공허함에서 촉발된 미학적 열망은 자연과 과거의 삶에 대한 그리움과 연결되며, 이때 문학적 진정성은 현실적·윤리적 규범이 아닌 미학적 규범이 된다. 오늘날의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창조적인 반미학의 정신이나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현실대응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연을 노래하는 일이 반드시 이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문명과 현재의 경험된 과거이자, 시인이 꿈꾸는 당위적 미래이기 때문이다. 과거형이나 미래형으로만 존재하는 세계가 시인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될 때, 기억과 상상의 행위는 현재를 극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하나의 미학적 실천이 된다. 이는 자연을 노래하는 모든 시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함이 아니다. 현재 자연이 처해 있는 특이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시대 ‘자연의 미학’은 자연의 실물이 이미 파괴되었기에 그 자체로 ‘반자연의 미학’의 성격을 띠게 된다. 자연이 곧 반자연이 되는 역설은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거나 황폐한 자연을 노래하거나 똑같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진정으로 자연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 역설의 운명을 껴안는 일이며, 매순간 기억 속의 자연과 현재의 자연 사이에 있는 격차를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일이 된다. 문제는 미(美)에 도취되거나 자연을 미학화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으며, 시인이 이 역설의 운명을 얼마나 성실하게 감당하는가에 있다. 이 성실성이 아름다운 시어나 초월적인 시간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한편의 시에서 자연과 과거가 어떤 문맥에서 소환되고, 그 재문맥화에 따른 잔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항목들이 얼마나 깊이 인식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시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의 문제점을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배후와 맥락을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배경에서, 박형준(朴瑩浚)이 최근에 펴낸 시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작과비평사 2002)는 ‘자연의 미학’을 전면에 내세운 문제적인 텍스트가 된다. 소멸의 문제를 깊이 천착해온 박형준은 지나간 시간들을 현재로 불러들여서 서로 접목시키며, 의식 속의 자연의 풍경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는 ‘시간의 주술사’처럼 “기억이 없는 곳”(「城에서 1」)까지 손길을 뻗쳐 ‘시간의 성(城)’을 축조한다. 이 성에는 해당화와 백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