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시대의 염의(殮衣)를 마름질하는 손

고정희론

 

 

나희덕­ 羅喜德

시인.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등이 있음. poempoet@netian.com

 

 

 

고정희(高靜熙, 1948〜91) 시인은 첫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낸 1979년부터 1991년 지리산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11권의 시집(유고시집 포함)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그 시집들을 읽으면서 우선 그 왕성한 창작열과 실험정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80년대를 온몸으로 돌파해낸 정신의 족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황무지와 같았던 여성시의 영역을 개척한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90년대 이후 여성시의 개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서정시의 좁은 틀을 과감하게 부수고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부정의 현실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 금기시되던 시적 언술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고정희 시인은 그 선구적인 역할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고정희에 대한 평가는 기독교 시인이라는 종교적 범주 안에서, 또는 생경하게 목소리만 높은 페미니스트나 민중주의자로 단순화되고 일면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의 기반이나 객관적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대시사를 소재나 주제 중심으로 분류해온 도식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고정희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기독교’ ‘민중’ ‘여성’이라는 화두는 그대로 80년대 이래 한국 현대시가 통과해온 주요한 필터에 해당한다. 그러나 파편화된 상태를 넘어서 그 문제들을 통합해내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정희를 현싯점에서 새롭게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통합이 얼마나 절실하면서도 어려운 과제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세 층위는 서로 연결되거나 친연성을 가지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각기 다른 세계관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조화보다는 충돌을 일으킬 때가 더 많다. 그런데 고정희의 시는 어느 한 범주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그 거대한 축들 사이의 충돌과 긴장을 정신의 고유한 동력으로 삼고 있다. 그의 시가 몇개의 수식어로 쉽게 포괄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한 문화적 토양과 시적 형식을 지니는 것도 여기서 비롯한다. 따라서 고정희의 시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세 층위들간의 갈등양상과 그것이 통합·변화되어가는 역동적 과정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글에서는 특히 그 역동적 과정을 관류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고정희 시의 존재기반을 밝혀보려고 한다. 고정희에게 죽음은 종교적인 문제이자 사회·역사적인 문제였고, 또한 여성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첫시집의 첫시에서부터 마지막 시집의 마지막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죽음의 그림자들로 미만(彌滿)해 있다. 죽음에 대한 집요한 의식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향한 때이른 걸음을 내딛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개인적 운명에 대한 예언을 넘어서 시대적인 죽음을 현시하고 있다. 아울러 시대의 죽음을 정화하고 치유하기 위한 제의로서의 시적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 그가 짧은 생을 다해 마련하고 닦았던 “보속(補贖)의 거울”(「사십대」)은 이제 그 ‘살아 있는 죽음’을 통해 오늘의 ‘죽어 있는 삶’을 비추어주고 있다.

 

 

1. 아우슈비츠, 낙원 밖의 삶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배재서관 1979)와 『실락원 기행』(인문당 1981)과 같은 고정희의 초기시는 단순히 성서의 비유나 어법만을 차용하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실을 어둠으로 가득 찬 ‘실낙원’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 어둠을 밝힐 “찬란한 빛의 임재”(「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 또는 낙원의 복원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에덴은 여전히 불꽃에 싸이고/당신들 영혼은 江岸에 갇혔다”(「살풀이」)라든가 “우리는 영원히 낙원 밖을 떠돌며/일생을 두고 칼 아래 붙박여/검불 같은 목숨 한쪽 버티는 거야/버티다 버티다 사라지는 거야”(「巡禮記 4」) 등의 구절에서도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자의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잠기고

어둠속에 떠도는 하나님의 불칼 아래

독 묻은 열쇠 하나 빛나고 있었지

외로울 때 만지고 말

독 묻은 열쇠 하나

수천년 낙원 밖에 기다리고 있었지

─「失樂園 記行 2」 부분

 

보세요. 일렬횡대로 서서 유태인의 고아들이 가고 있어요. 아우슈비츠로 가고 있어요. 노래를 부르며 가는 고아들은 아우슈비츠로 가는 고아들은 히틀러의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행복한 꿈에 젖어 가고 있어요. 고요히 제 몫의 삶 빛내는 햇살처럼 행복한 꿈에 출렁이며 가는 고아들, 조금만 더 가면 홍해를 건너고 조금만 더 가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꿈, 꿈 같은 궁전으로 들어가는 꿈, 하느님의 축제에 들어가는 꿈을 꾸는 고아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가고 있어요.

 

조금만 더 가면 홍해를 건너요

조금만 더 가면 천국으로 들어가요

조금만 더 가면 아으,

하느님의 축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迷宮의 봄 6」 부분

 

인용한 두 시는 낙원 자체를 노래하기보다는 그 낙원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삶이 결국 죽음을 향한 행진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어둠속에 떠도는 하나님의 불칼 아래/독 묻은 열쇠 하나 빛나고 있”다 해도 그 열쇠를 집는 순간 낙원으로 가는 길은 끊어져버릴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시에서는 홍해를 건너 천국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아우슈비츠로 가는 고아들”에 비유하면서 섬뜩한 살육의 현장을 죽음의 카니발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비관적인 세계인식을 보이는 한편 고정희 시에는 특유의 건강성 또는 낙관성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메시아주의와 관계가 깊다.

실낙원 이야기는 신의 편에서는 추방의 선포이지만, 인간의 편에서는 탈출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선과 악의 문제만이 아니라, 왜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하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본향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그리고 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등의 문제가 들어 있다. 구약성서의 내용 또한 실낙원과 출애굽이라는 두 사건의 변주라고 볼 수 있는데, 죄의 댓가로 에덴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담과 이브와는 달리 출애굽은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세우기 위한 과정을 의미한다. 인간의 역사는 이처럼 끝없는 탈(脫)과 향(向) 사이의 도정이다.1

고정희 시에 「디아스포라」 연작이 많은 것도 그가 현실을 정신의 가나안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할 광야생활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며, 「迷宮의 봄」 「아우슈비츠」 「失樂園 記行」 「巡禮記」 등의 연작들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며 신의 임재(臨在)를 기다리는 실존적 자세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들에서 기다림의 대상은 ‘그대─어머니─고향─낙원─가나안─하나님’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될 수 있다. 결국 그의 시는 ‘아우슈비츠’와도 같은 현실과 ‘에덴’ 또는 ‘가나안’이라는 이상 사이에서 느끼는 절망을 노래하면서도 그 절망을 극대화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려는 갈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때, 유일신으로서 ‘야훼’를 인정하고 신의 섭리로서 역

  1. 안병무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한국신학연구소 1995) 1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