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시민의회,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길
오현철 吳泫哲
전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정치학. 저서 『시민불복종』『전환시대의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음. ohyunchul@jbnu.ac.kr
1. 시민의 집단적 의사결정이 정당성의 원천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선거에서 선출된 엘리트의 통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간주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미국의 정치제도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들은 선거로 선출된 자신들을 ‘자연적 귀족’으로 간주했다. 이 단어는 조상 덕에 권력을 차지하는 영국 귀족과 달리 자신들에게는 자연이 준 선물인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을 담고 있다. 선출된 귀족들의 통치를 당연시하는 현대적 관점을 ‘정치적 노동분업’ 테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테제는 사회가 분화되고 전문화될수록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는 전문 정치인에게 맡기고 일반인은 생업에 전념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철학의 대가인 하버마스(J. Habermas)의 토의민주주의이론(심의민주주의나 숙의민주주의로도 알려져 있다)은 ‘국가의 법률이나 정책은 그것에 의해 영향받는 모든 사람들의 이성적 토의에 의해 결정된 경우에만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바는 선출된 정치인들이 국가정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책이건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토론하고 결정한 내용에 부합하는 것만 정당하다는 뜻이다.1 예를 들면 4대강을 보로 막아 호수로 만드는 것, 그리고 핵발전소를 건설하거나 폐기하는 것같이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을 정부가 결정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거나 들었어도 무시한다면 그 결정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4대강사업이나 노후한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는 것처럼 국민들의 이익에 상충하는 정책이 결정되는 원인을 ‘주인-대리인의 딜레마’에서 찾을 수 있다. ‘주인-대리인의 딜레마’ 개념은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데,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대리인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주인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현상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러한 딜레마는 거의 모든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관찰되는 현상으로,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시민을 정치과정에서 배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이 법정과 민회에 참여하여 도시국가의 공적인 사안을 결정했다.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의회는 전체 시민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의 결정에는 ‘주인-대리인의 딜레마’가 없었다. 국민주권이란 이처럼 국가의 법률과 정책 혹은 중요한 정치적 판단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의 국민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무늬만 주권자이고, 대리인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주권적 사안을 대신 결정한다.
대의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지탱해주는 ‘국민이 주권자’라는 믿음은 기만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의민주주의의 시민은 공적 사안을 집단적으로 함께 결정하는 아테네 시민의 권력을 박탈당하고 선거에서 한표를 행사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스스로 국가를 위한 이성적 결정을 내리는 대신 결정권력을 행사할 유력한 대리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투표권을 행사한다. 선거에서 유권자는 개인으로 흩어지고 파편화되어 지역에 묶이거나 정당에 귀의하거나 대통령 후보의 극성팬이 된다. 시민의 집단적 의사결정이 정치과정에서 배제되자 미국의 민주주의는 로비스트와 이익단체들이 주도하는 금권정치로 변질되었고, 한국에서는 그보다 더 열악한 적대정치가 일상화되었으며 나라 전체는 ‘헬조선’이 되었다.
2. 시민의 집단적 결정이 세상을 바꾼다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을 원한다면 시민의 집단적 의사결정 권한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핵발전소를 계속 건설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를 전문성을 핑계로 원전 관계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 전체가 참여하여 결정해야 한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민참여 토의기구들은 풍부한 정보를 제공받아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토론한 후에 집단적으로 의사결정하는 능동적인 정치행위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 결과들을 보면 토론하는 시민의 결정은 ‘자연적 귀족’들의 결정보다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다.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개개인의 시민이 전문가 한 사람보다 전문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시민 다수가 모여서 지혜를 모으면 전문가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희곡을 보고 전문가가 쓴 비평도 좋지만 시민 100명이 쓴 비평 100개를 모은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파티를 할 때에도 요리사 한명이 만든 100가지 음식보다 파티에 참석하는 100명이 각자 만든 음식을 갖고 와서 즐기는 방법이 더 좋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소수 전문가의 전문성보다 시민들의 집합지성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므로, 전문성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전문가의 전문성을 토대로 시민들이 생활지식을 결합해 판단하는 것이다. 어느 구두장이가 좋은 구두장이인지 알려면 구두장이들이 만든 신발을 내가 신어보면 된다. 어떤 신발이 내 발에 잘 맞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2
시민들의 집단적 의사결정은 구두장이의 구두를 시민이 직접 신어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토의포럼에 참여한 시민들이 해당 이슈에 대해서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질문하고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토론해 결정한다. 집단적 의사결정을 위해서 전 국민이 한자리에 모여서 토론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토의포럼을 활용할 수 있다. 토의민주주의에서는 전 국민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한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나타내는 소세계(microcosm)를 통계학적으로 구성해 토의하게 한다. 전체 국민이 참여하는 토론이 지역, 연령, 성, 지식, 재산 등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소세계는 규모가 작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기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다.
토의민주주의 관점이 널리 수용되면서 시민들의 집단적 토의에 의해 중요 법률과 정책을 결정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무수히 많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례들을 거론하면, 편견을 교정하고 집단적으로 대안을 마련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 국민에게 주권을 돌려주는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 과학기술과 관련해 인지적 불확실성을 내포한 문제를 다루는 합의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