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시와 시대, 그리고 인간
『만인보』론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보들레르와 근대」 「李箱과 식민지근대」 「기형도와 1980년대」 「세계문학에 대한 단상」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1. 머리말
지금까지 나온 고은(高銀)의 『만인보(萬人譜)』(창비 1986~2004)는 20권, 총 2474편이다.1 한국 근대시사 초유의 분량도 분량이지만 아직 완간되지 않았다고 하니, ‘『만인보』론’은 섣부른 제목인지도 모르겠다. 말의 경제는 물론 판단의 유보가 어느정도 따르는 것도 불가피하다.
돌이켜보건대 『세계의 문학』(1986년 봄호)에 물경 51편이 처음으로 게재되고 바로 그해 11월에 전작간행 형식으로 첫 세 권이 묶여 나왔을 때, 『만인보』에 대한 평자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고무적이었다. 70년대 이래 민족문학의 전위에서 활동해온 시인이 봇물 터뜨리듯 쏟아낸 뭇사람의 생생한 초상들을 민족문학의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는 일종의 ‘보증’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면,2 “이제 우리도 큰 시인을 하나 갖게 되었구나 하는 감격”을 평문으로 피력한 것이다.3 물론 그때도 (우려 섞인)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4 『만인보』가 9권까지 씌어지고 시인의 회갑 기념 논저인 『고은 문학의 세계』(창작과비평사 1993)가 발간된 싯점에도 시단(詩壇)의 ‘합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12년이 지나고 열한 권이 더 씌어진 지금, 그때의 보증과 감격은 어느 정도나 유효하며, 80년대의 『만인보』 그 아홉 권의 시적 성취가 90년대 이후 출간된 작품에서 과연 얼마나 깊고 넓게 이어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1980년대와는 격세지감을 안겨주는 오늘의 문화환경에서 그간 평자들의 평가에 공감하면서도 고은의 ‘만인들’이 박물관의 박제품 신세를 면할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을 떨치지 못한 필자뿐만 아니라 『만인보』를 흥겹게 따라 읽은 독자들도, 그런 의문은 한번쯤 품었을 법하다.
2.『만인보』 개관
거의 20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발행된 『만인보』 스무 권을 개관해보면, 10권에서 가장 큰 분기를 이루고 16권에 와서 이전과는 또 좀 다른 흐름을 형성하는 것 같다. 1~9권까지는 1930~40년대를 배경으로 저자의 ‘기초환경’이 다뤄졌는데, 10권부터 1970년대로 훌쩍 건너뛴다. 그런 10~15권은 민족문학의 구심력이 한창이던 1980년대가 지나고 그 위기가 ‘상식화’된 1990년대 후반, 즉 민족문학의 진영은 물론 그 개념까지도 실질적으로 해체된 상황에서 출간된다.
1950년 한국동란의 참상을 주로 다룬 16~20권이 나온 것은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고 3년이 지난 다음이다. 알다시피 1980~90년대는 세계사적으로 시대의 맥박이 유달리 가쁘게 뛴 시대이고, 그와 연동한 한반도 정치현실도 급격한 (때로는 아찔한) 국면변화를 거쳤다. 바로 그 20년을 통과하여 우리 당대에 걸쳐 있는 『만인보』는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씌어진 단일 텍스트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국면에 대응한 작품‘들’의 성격도 아울러 띠기 때문에, 해당 시대를 염두에 두고 묶음별로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뜻에서 1~9권과 10~15권을 각각 1980년대 『만인보』와 1990년대 『만인보』로 분류해볼 수 있겠다. 그럴 경우 2004년의 16~20권은 어디에 더 가까운가, 또는 80년대 및 90년대 모두와 얼마나 창조적으로 결별했는가 하는 물음도 부수적으로 생긴다. 80년대 『만인보』의 성취는 인간의 약분불가한 개별성을 이념적 도상(圖像)으로 흡수한 당대 민족·민중문학의 허와 실을 비판적으로 따져보게 하는 데 있지 않은가 한다. 90년대 『만인보』는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에 음양으로 저항한 시대적 인물들을 ‘만인’의 주인공으로 채택함으로써 세기말 소위 포스트 담론들의 부황든 실상을 되짚어보도록 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두 『만인보』가 시대의 대세에 대한 ‘응전’의 성격이 강하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6·25전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16~20권을 남북의 평화공존 가능성이 새롭게 열린―그 점에서 80년대 및 90년대와도 확연히 다른―2000년대의 상황에 비추어보는 동시에 그것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시적 성취도 엄밀하게 가늠해야 할 것이다. 물론 『만인보』 16~20권이 앞의 두 『만인보』와 다른 수준의 시적 지평을 실제로 열었는가도 앞으로 논하겠지만, 이 대목에서 일단 ‘제3의 『만인보』’라는 화두를 걸어볼 만하다.
80년대〓이념, 90년대〓탈이념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두 『만인보』의 면모가 작품 차원에서도 조건없이 긍정할 만한 것인지 하는 의문도 바로 그 화두에서 생긴다. 『만인보』 비평에 관한 한, 시대의 대세를 거스르는 시의 비판적 성찰기능이 시적 성취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물음은 자주 잊혀질뿐더러, 그 둘을 혼동하는 논자도 적지 않다. 현재 시단의 편향, 즉 민족·민중을 내세우는 시각 및 그와 대척점에 선 개인과 자유주의를 시적 성취의 명시적·암묵적 판단기준으로 삼는 태도도 그런 물음의 결핍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원균(韓元均)의 학술 저작에서 80년대와 90년대 『만인보』가 분별되지 않고 한 덩어리로 취급된 것도 그런 기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5 알다시피 전자는 80년대의 (이제는 냉정하게 분별해야 할) 대표적인 유산이요, 후자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90년대 이후 득세한 (지금은 저항해야 마땅한) 관점이다. 특정한 관점이나 이론을 앞세워 입맛대로 요리하는 비평계의 병통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고은은 가령 모더니스트로 통하는 기형도(奇亨度)와는 다른 이유로―상찬이든 비난이든―상투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초기의 탐미주의·허무주의에서 70년대 민족민중운동으로 일대 전환으로 이루고 외세와 분단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를 멈추지 않는 시인의 ‘확신범’으로서의 행보에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한 『만인보』 곳곳에 숨쉬고 있는 실존 역사인물들의―그 탁발한 자취를 칭송하고 과오를 징치(懲治)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을 일깨우는―묘사방식에서 단적으로 확인되는 것처럼 민족주의나 자유주의를 들먹이는 비평들의 근거가 전혀 없달 수도 없다.
그러나 (특히 80년대) 『만인보』의 시적 성취나 한계를 민족주의 내지는 자유주의 담론틀로 환원하여 평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80년대 일부 진보진영의 낯익은 구습과 그에 대한 90년대의 세기말적 반동 모두를 되풀이하는 꼴이다. 형사(形似)와 신운(神韻) 모두를 살림으로써 그런 구습과 반동을 반성하게 하는 적지 않은 시들이 『만인보』에 있거니와, 이념의 이름으로 개인을 주눅들게 했던 80년대와 개인의 이름으로 역사를 부정하기 일쑤였던 90년대의 무수한 작품들 가운데 근대적 자유의 비원(悲願)을 품은 비루한 존재들에게 인간적 존엄을 제대로 부여한 경우가 얼마나 될지도 냉철하게 따져볼 일이다.
- 1~3권(303편, 1986), 4~6권(327편, 1988), 7~9권(397편, 1989), 10~12권(345편, 1996), 13~15권(383편, 1997), 16~20권(719편, 2004). ↩
- 백낙청 「통일운동과 문학」 및 「『만인보』에 관하여」 참조. 각각 『민족문학의 새 단계』, 창작과비평사 1990, 102~106면, 268~73면. ↩
- 김영무 「고은의 시 II」, 『시의 언어와 삶의 언어』, 창작과비평사 1990, 148면. ↩
- 김흥규 「個體와 歷史」, 『세계의 문학』 1987년 봄호 346~47면; 임우기 「이야기꾼으로서의 시인」, 『살림의 문학』, 문학과지성사 1990, 255~56면 참조. ↩
- 한원균 『高銀詩의 美學』,한길사 2001, 138~52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