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시와 언어, 그리고 리얼리즘

 

 

정남영 鄭男泳

문학평론가. 경원대 영문학과 교수.

 

 

오늘날 시는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경제학, 인간과학들

그리고 정신분석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을 수 있다.

─펠릭스 가따리

 

 

1. 현대사회와 ‘사물화’

 

‘21세기 한국문학의 향방’이라는 이 씸포지엄의 큰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과연 어떠한 시대인지를 생각하는 데서 논의를 출발할 수 있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후기자본주의(Late Capitalism), 전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 탈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 매체사회(Media Society), 정보사회(Information Society), 소비사회(Consumer Society), 전자사회(Electronic Society), 하이테크사회(Hightech Society), 디지털 시대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혹은 사회를 지칭하는 명칭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모든 명칭들이 각기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 지구 위에서 영위되는 삶을 장악하는 능력이 더욱 높아졌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자본의 장악능력이 높아졌다는 것은 자본의 총량이 늘었다든가 하는 식의 양(量)적인 기준으로만 측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자본가집단과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결탁 정도가 높아졌다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속적인 민중투쟁의 결과로 정권의 친자본가적 성격의 일부는 현저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자본의 현실장악 능력의 고도화에는 우리의 실존적 삶의 질(質)의 변화가 필수적으로 포함됩니다.1 저는 여기서 프랑스의 철학자 펠릭스 가따리(Félix Guattari)가 ‘비물질적 사물화’(incorporeal reification)라고 부른 것2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비물질적 사물화’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7,80년대에 자본주의의 부정적 효과로서 자주 지적된 ‘사물화’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알다시피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물과 사물의 관계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사물화’가 지칭하는 바입니다. 이것을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사물화’는 가시적이고 물질적 관계만을 승인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물질적’이란 말은 엥겔스가 유물론을 정의할 때 사용한 바와 같은 넓은 의미의 물질성materiality이 아니라 물리·화학·생물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좁은 의미의 물질성corporeality의 형용어로 사용한 것입니다.) 실제 우리의 구체적 실존이 이러한 물질성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기에 사물화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입체적인 다양성과 복합성을 평면적인 단순성으로 환원한 것에 해당합니다.

‘사물화’에 의하여 배제되는 것은, 비물질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관적’이지는 않은 실존영역, 외연 속에서 좌표로 표시될 수 없는 가상적이라고나 할 실존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물질적인 세계 못지않게, 아니 실상은 앞으로 논의될 이유로 인해서 그보다 더욱더 핵심적으로 인간의 구체적 실존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저는 졸고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창작과비평』 1999년 겨울호)에서, 문학작품에 의하여 열리고 인간의 창조적 상호협동에 의하여 유지되는 이러한 실존공간을 ‘만남의 공간’ 혹은 ‘제3의 영역’이라는 용어를 빌려 설명한 바 있습니다.3

‘사물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비물질적 실존공간’ 혹은 ‘제3의 영역’이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먹고사는 문제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강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대체로 동반하는 노동자 의식의 진전과 정치적 힘의 증가는 예의 강압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게 만듭니다. 의식이 깨인 노동자는 더이상 물질적 이익에만 시야를 국한시키지 않고 자신의 ‘비물질적 실존공간’의 풍요화, 즉 문화적 삶의 고양을 추구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은 자본주의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 ‘비물질적 실존공간’을 단순히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곳을 장악해야 할

  1.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말하는 ‘실존’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일단 실존이라는 말로 인간의 실제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차원을 그중 특별하게 우세한(지배적인) 차원을 설정하지 않은 채로 온전하게 지칭하고자 합니다.
  2. “The New Aesthetic Paradigm,” Chaosmosis: An Ethico-Aesthetic Paradigm, trans. Paul Bains and Julian Pefanis (Bloomington &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103면
  3. ‘제3의 영역’과 ‘만남의 장소‘는 영국의 비평가 리비스(F.R. Leavis)의 용어입니다. 옛 영국의 유기체적 공동체에 대한 향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리비스는 ‘탈구조주의’의 대표자로 분류되는 가따리(그리고 그의 공동작업자인 들뢰즈G. Deleuze)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창조성과 관련된 양측의 견해는 서로 매우 중요한 점에서 상통한다는 것이 저의 판단이며, 졸고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에서 이러한 판단을 소략하게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아울러 지적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통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양측의 평가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길게 토를 달기는 어렵지만, 아일랜드의 소설가 조이스(James Joyce)에 대한 평가가 그렇습니다. 들뢰즈·가따리는 조이스를 대체적으로 창조적 생성의 언어를 구현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는 반면에 리비스는 특히 『율리씨즈』(Ulysses) 후의 조이스의 언어실험의 결과를 “허식성”과 “기계적 조작”이 만연된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