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시적 시민성의 범주론

감정, 의문, 행위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정확한 사랑의 실험』 등이 있음.

poetica7@hanmail.net

 

 

1. 시의 목소리

 

앨버트 O. 허시먼(Albert O. Hirschman)에 따르면 퇴보하거나 일탈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는 세가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다. 이탈(exit), 항의(voice), 충성(loyalty).1 예컨대 기업에 문제가 있을 때 소비자는 다른 기업의 상품을 선택할 수 있고(이탈), 조직에 문제가 있을 때 구성원들은 집단성명 등으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항의), 이런 방식이 오히려 상황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면 상부의 자발적 조치를 믿고 기다릴 수도 있다(충성). 40년 뒤 미디어 이론가 닉 콜드리(Nick Couldry)는 ‘항의’라는 의미로 사용된 개념 ‘목소리’를 허시먼에게서 가져와 그것의 속성과 가치를 일반화했다. 목소리란 개인이 자기 삶을 서사화하고 이를 표명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개념이며 이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 중 하나라고 말이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는 시장 시스템의 효율성이라는 교리로 개인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목소리의 중요성을(‘가치’로서의 목소리) 목소리로 표현하는(‘과정’으로서의 목소리) 일이라는 것이다.2 이탈할 수도 충성할 수도 없는 세계를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에게 항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형식이 된다.

과연 목소리가 무기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목소리가 ‘과정’이자 ‘가치’라고 말하는 논법은 시라는 장르의 자존심을 북돋우는 바가 있다. 시야말로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어쩔 수 없이 시인의 목소리이지만 주어의 자리는 열려 있다. 이 선택의 여지가 그대로 시의 정치적 가능성이다. 정치는 집합적 주체성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정치적이길 원하는 시는 ‘나’와 ‘우리’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를 지향하는 ‘나’의 목소리로 말하게 된다. 돌아보면 ‘우리’로의 확산과 ‘나’로의 회귀가 반복되는 것이 시사(詩史)의 양상이다. 80년대의 ‘우리’를 반성하면서 90년대의 주어는 ‘나’가 되었고, 90년대의 ‘나’를 지루해하면서 2000년대의 주어는 ‘나 아닌 나’가 되려고 했다. 2009년을 기점으로 다시 우리의 시대가 된다. 용산참사 이후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되지 말자고 말하는 우리였다. 그래서 시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면서도 미학적 퇴행을 견제하려 했다. 세월호참사 이후의 ‘우리’는 감히 우리가 될 수 없음을 괴로워하는 우리였다. 그래서 윤리적 오만을 경계하며 재현의 한계를 성찰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되지 말자고,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그런 뜻을 함께하는 동안에는 ‘우리’다. 두번의 참사를 거치면서 재형성되기 시작한 ‘우리’가 마침내 촛불혁명을 통해 완성됐다고 말할 수 있으면 간단하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사실과 달라서 그럴 수가 없다. 촛불혁명 전후로,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과 안희정 재판 등을 겪으면서, ‘우리’라는 이상은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3임이 드러났다. 이제 함부로 ‘우리’를 말하는 것은 태만이거나 위선이 되었다. 독일어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을 구별하는데, 상대적으로 전자가 능동적이고 공유 가능한 것이라면, 후자는 피동적이고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구별이 없는 영어는 이를 각각 ‘experience’와 ‘lived experience’로 옮긴다.4 후자에 추가된 ‘lived’라는 단어는 말하자면 우리(시민)라는 개념을 가르는 날카로운 균열의 선과 같다. 물론 그 균열은 근래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발견된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적 ‘경험’은 특정 정체성으로 살아낸 ‘체험’을 덮어쓰지 못한다. 전자가 있어 오히려 후자가 더 또렷해지는 결과가 발생했으니 이 모든 사태는 실패가 아니라 차라리 성공이다.

문학의 주어는 다시 ‘나’로 되돌아갔다.5 그리고 그것은 가장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목소리’가 되었다. ‘시민’이라는 이름의 ‘우리’에 대한, 이탈할 수도 충성할 수도 없는 그 집단에 대한 항의로서의 목소리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정체성, 즉 자기의 모든 ‘살아진’(lived) 삶의 구체성을 말하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들 덕분에 이제 시민이라는 단어에는 빗금이 쳐졌다. 시민 개념의 내적 비일관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이를 통해 그 개념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씌어져야 하는 것이 된다.6 시를 읽고 논하는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일 수 있을까. 시에서 새로운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나’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를 분별할 수 있게 하는, 예술성과 정치성이 교차하는 시학적 범주를 마련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아직은 막연한 대로 이를 ‘시적 시민성의 범주’라고 명명해보려 한다. 2010년대 초반의 ‘시와 정치’를 주제로 한 논의에서 “시인과 시민 간 연결의 결여 자체를 더 사유했어야 했다”라는 지적은 옳기 때문에 그 ‘연결’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7

 

 

2. 기분과 감정

 

정동(affect), 감정(emotion), 기분(mood)은 어떻게 다르고 시에서 이 셋은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심리학의 고전적 논법은 정동을 자극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라고 규정하고 감정과 기분은 그것이 의식화된 것이라고 본다. 정동이 일차적이고, 감정과 기분은 이차적이라는 것이다. 정동을 특권화하는 논의가 활기를 띠면서 감정과 기분이 부차적인 지위를 갖는 것으로 강등되거나 혹은 정동에 개념적으로 흡수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데8 그와는 달리 감정과 기분의 구별을 특별히 강조하는 사례도 있다.9 감정은 또렷한 대상(원인)을 지시하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흔히 지적되는 사항이다. 대상이 없는 기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경우 기분은 대상이 은폐된 감정일 때가 많다. 특정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감정이 일정 기간 지속되다가 대상과의 관련성이 약화되면 그때부터 기분의 형태로 잔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기분 속에서 대상은 없는 것이 아니라 망각되거나 부인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감정의 시’를 ‘기분의 시’와 개념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 한국시에서 기분의 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느껴지는데, 그 시들은 상투적인 감정을 거부하는 데 성공하지만(그래서 시로서의 가치를 갖지만), 그것이 자신의 상태를 사유해야 하는 부담을 외면한 결과는 아닌지도 따져볼 일이다. 감정이 대상을 갖는다는 것은 감정이 그 대상에 대한 판단을 함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누스바움(M. Nussbaum)은 이런 관점을 ‘인지적/가치평가적 감정이론’이라고 명명하고 또 옹호한다. “감정은 나 자신의 안녕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외적인(즉 통제 불가능한) 것과 관련해 현재의 사태를 등록하는 나만의 방식이다.”10 이런 의미에서 감정은 판단이고, 더 강하게 표현한다면, 일종의 사유다. 감정 자체가 사유라면, 감정에 대한 시는 사유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겠다. 공동체 내부의 감정 구성체를 포착하는 것, 그 속에서 어떤 인지와 판단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 이것은 시인이 할 만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쁜 ‘기분의 시’보다는 좋은 ‘감정의 시’를 살펴보는 것이 생산적이다.

 

  1. 앨버트 O. 허시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강명구 옮김, 나무연필 2016. 197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이탈, 항의, 그리고 충성: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이다.
  2. 닉 콜드리 『왜 목소리가 중요한가』, 이정엽 옮김, 글항아리 2015, 16면.
  3.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306면.
  4.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2020, 181~82면.
  5. 많은 글들이 있지만, 소설에 대해서는 김요섭 「이후의 사람들: 한정현·황정은 소설과 다원화된 세계」를, 시에 대해서는 조대한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이상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를 대표적인 예로 거론할 수 있겠다.
  6. “‘우리’를 다시 쓰는 실천 속에서 다른 무엇과도 교체될 수 없는 그 고유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릴 수 있음”을 제안하는 다음 글의 취지에 공감하며 적은 문장이다. 양경언 「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인용 부분은 37면.
  7. 송종원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21면.
  8. 정동을 둘러싼 논쟁에 뛰어들 계제는 아니지만, 정동의 전(前)언어적 속성을 강조하느라 ‘정동은 정동이다’라는 동어반복에 그치거나 특정 정동을 묘사해야 할 때 다시 감정의 범주에 기대는 사례를 접할 때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체험의 층위에서는 정동과 감정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고 그 둘을 구별하지 않는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입장에 공감하게 된다.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도서출판 여이연 2021, 484~85면.
  9. 한 예로 조직 구성원들의 감정과 기분을 관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영학의 조직행동론 분야 교과서는 대부분 감정과 기분을 구별하는 챕터를 포함하고 있다.
  10. 마사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 1』,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5,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