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식물적 주체성과 공동체적 상상력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소설의 궤적과 의의
신샛별
문학평론가. 최근 평론으로 「부모의 자리에 서서: 최근 소설이 ‘세월호’를 사유하는 방식」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1. 인간의 추락과 소설의 고통
‘짐승’이 인간에 대한 도덕적 판정의 표현으로 기능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짐승’은 함량 미달의 비열하고 저급한 인간을 에둘러 비난하는 욕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고자 하는 시대에, 벌 수만 있다면야 개가 된들 어떠냐고 생각하는 시대에, ‘짐승’은 그리 모욕적인 말로 들리지 않는다. 1970년대 후반 박완서(朴婉緖)는 『도시의 흉년』(1979)에서 한국전쟁 이후 물질적 만족에만 급급하게 된 한국인의 모습이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먹는다’는 말에 꼭 들어맞는다고 쓴 적이 있다. 기실 경제성장은 유사 이래 일관된 국가적 목표였고, 생존을 유일의 과제로 여기고 살아온 한국인의 정신을 잠식한 불안과 공포의 수준은 여전히 전시(戰時)에 육박한다. 아이러니하지만 한국인에게 ‘짐승’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써야만 하는 가면이었다고 이해해볼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제때에 벗지 못한 그 가면은 어느새 본연의 얼굴이 되었고, 최근 청년세대의 실감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의 얼굴은 점점 더 흉측해지고 있는 듯하다. ‘개’처럼 성실히 일해볼 기회도 얻기 어려운 그들은 스스로를 짐승보다 못한 ‘벌레’로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일베충, 사시(사법고시)충, 의전(의학전문대학원)충, 한남(한국남자)충, 노인충, 진지충 등 ‘충(蟲)’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서로를 명명하고 사회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동물화를 넘어 더 하찮은 벌레화가 진행되고 있다”1)는 참혹한 진단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학적 징후(sign)의 진단은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요긴할지언정 예방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2)
학문이 의사처럼 사회적 징후를 관찰하고 진단할 때, 문학은 환자로서 최선을 다해 사회를 ‘앓는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에 앞서 ‘이 세상’을 가능한 한 넓고 깊게 경험해보려 애쓰는 문학은 경미하거나 부분적인 증상(symptom)으로만 파악되는 ‘다음 세상’을 먼저 앓아버린다.3) 그럴 때 문학은 글이 아니라 차라리 몸이고자 한다. 2008년 발표된 「벌레들」이라는 단편소설에서 김애란(金愛爛)은 가난한 신혼부부의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끝없이 출몰하는 벌레에 대한 혐오와 망상으로 상징화해 보여주었는데, 이 소설의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임신 중이던 화자는 거대한 쓰레기더미의 풀숲에서 재앙처럼 쏟아져나오는 벌레들 사이를 빠져나오지 못한 채 괴로워하며 출산의 순간을 맞는다. 요컨대 출산 직전인 그녀의 몸에는 벌레의 처지와 같은 누추한 삶의 조건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 결론에 다다른 청년세대의 절망과, 태어나면서부터 벌레의 행렬에 불가항력적으로 동참하게 될 미래 아이들의 비극적 운명이 포개져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증상에 기민하게 반응해온 작가 특유의 예감으로 끝났다면 좋았겠으나, 2014년의 우리는 충분히 인간적으로 존중받지 못한 아이들의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을 황망하게 지켜보았고, 2016년의 우리는 ‘벌레’라는 말로 타인을 비하하고 자신의 처지를 자학적으로 표현하는 청년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분명 추락하고 있다.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벌레로, 그리고 또 무언가로.
이토록 참담하게 추락해가는 와중에 한강(韓江)의 소설을 재독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절실한 일이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채식주의자』(창비 2007)와 『소년이 온다』(창비 2014)4)는 ‘인간’과 ‘비(非)인간’ 혹은 ‘반(反)인간’의 경계를 흐리면서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차별과 배제, 폭력과 학살 위에 제 입지를 다져왔는가를 보여주는데, 그럼으로써 그의 소설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의 가치를 근원적인 차원에서 의문에 부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답게 죽는 것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각도의 고민과 노력을 해왔고 또 그것이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휴머니스트들에게 한강의 소설은 일면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종종 짐승이나 벌레, 심지어 괴물에 가까워지고 자유, 평화, 공존 같은 재래의 휴머니즘적 가치들은 실감 없이 부유하는 기표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이 전달하는 고통은 앞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 세상의 증상을 미리 앓아본’ 결과로 생겨난 것들이다. 한강의 소설을 통해 앓아냈으므로 비로소 알게 된 것들과 더불어 우리는 추락 중인 인간을 구원할 특별한 상상력 하나를 얻게 된다.
2. 식물적 주체성의 몇가지 층위
한강의 소설들은 물리적인 강제와 압박뿐 아니라 언어, 시선, 인식, 사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느끼고 생각하고 보여주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한강이 발견한 매우 ‘인간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가시적·비가시적 폭력의 현장들은 ‘인간성’에 대한 안일한 기대와 희망을 무력하게 만들고, 삶의 방식의 총체적 변화를 요청한다. 특히 『채식주의자』는 인간성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성을 가부장적 가족제도, 육식문화, 정신병원 등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부터 추출해냄으로써 ‘우리 안의 타자’의 존재를 문면에 드러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와 관련해 남성/여성, 서양/동양, 정신/신체, 정상/비정상 등의 이분법적 구도하에서 이성(理性) 중심의 인간 개념을 형성·발전시켜온 휴머니즘적 전통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고 그에 대한 철학적 검토와 대응이 이른바 ‘포스트휴머니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에 『채식주의자』가 세계적인 주목과 호평을 받은 것은 시사적이다.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 테러, 홀로코스트 등의 사건들은 은폐 또는 잠재돼 있던 인간 내부의 동물성이 외부로 표출된 극적 계기였고,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인간의 동물성은 숨기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생존과 경쟁에 적합하고 필요한 가치 또는 목표로 조정되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식의, 우리 시대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의 논리들이 대개 동물적 주체성의 강화를 촉구하는 것은 이러한 시류의 반영일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내장하고 있는 인간학은 그 자체로도 탐구할 가치가 있지만, 동물적 주체성의 전면적 출현을 겪으면서 더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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