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식인 자본주의’의 부상

낸시 프레이저와의 대담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정치철학자, 미국 뉴스쿨 교수.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전진하는 페미니즘』 등의 저서와 『99% 페미니즘 선언』 『거대한 후퇴』 등의 공저서가 있음.

 

마르띤 모스께라 Martín Mosquera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철학 교수.

 

 

미국의 정치이론가 낸시 프레이저는 지난 30년간 좌파 진영에 가장 강력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해왔다. 그 아이디어들은, 프레이저가 페미니즘이 경제 엘리트들과의 유대를 끊고 억압의 근본원인을 타격할 수 있는 노동계급 정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청했던 것과 같이 첨예하게 정치적일 때도 있었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가 의존하는—그렇기에 완전히 종속시킬 수 없는—‘배경조건’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했을 때처럼 때때로 그 아이디어들은 강력하게 이론적이었다.

최근 작업에서 프레이저는 실천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종합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데, 이는 곧 발간될 책에서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로 명명한 임박한 재앙—자본주의가 삶의 모든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자본주의 자체의, 더 중요하게는 우리 자신의 생존조건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코뱅』의 라틴 아메리카판 편집자인 마르띤 모스께라와의 이 대담에서 프레이저는 자신의 관심이 현대 자본주의와 그 위기에 대한 ‘엑스레이’를 제공하는 데 있으며, 이는 활동가들이 정치적으로, 또한 점점 더 커져가는 집단의 일부로서 통일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끔 로드맵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프레이저는 좌파가 지난 몇십년간 더 작고 내부 지향적인 하부 단위로 분화하는 데 골몰한 끝에 이제 통일된 세력에 대한 인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 집단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면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모든 부분들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더 잘 이해해야 한다. 또한 프레이저는 모든 이의 서로 다른 분노가 표출되면서도 함께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공통의 비전을 제시하는 사회주의 의제를 통해 통합되는, 포퓰리즘 스타일의 정치운동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모스께라와의 대담에서 프레이저는 우리가 자본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하지 않을 경우 부상하게 될 미래의 시나리오에 관해서, 그리고 정치적 투쟁을 위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과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모스께라 최근 작업에서 당신은 스스로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개념’이라고 명명한 것을 발전시켜왔다. 자본주의 개념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존 개념들이 너무 협소하게 경제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인가?

 

프레이저 그렇다. 나는 토대-상부구조(base-superstructure) 버전의 맑시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확장된 자본주의 개념을 발전시켜왔다. 토대-상부구조 버전의 맑시즘은 경제 시스템을 사회의 진정한 토대로 보고, 그밖의 모든 것을 그저 ‘상부구조’로 취급한다. 그 모델에서는 인과성이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적 토대에서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로만 흘러간다고 본다. 이는 심대하게 잘못된 생각이다. 나의 대안은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하위시스템과 그 가능성의 필수적인 배경조건—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공공재화 등 비경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자본주의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활동·관계—의 관계성을 새롭게 사유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렇게 되면 토대-상부구조라는 그림이 복잡해진다. 무언가가 필수적인 배경조건이라는 것은 자본주의경제 시스템이 그것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비경제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노동력을 구매해 일하도록 하고, 원자재와 에너지원을 구하고, 상품을 생산해서 이윤을 남겨 팔고, 자본을 축적하는 일 등은 어느 것 하나도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배경조건들은 그 나름의 인과적 중요성을 띤다. 그것들은 그저 ‘부차적인 현상’(epiphenomena)이 아니다.

예컨대 사회적 재생산의 경우를 보자. ‘노동’을 구성하는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 주로 공식적인 경제 바깥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활동 말이다. 새로운 세대를 낳고, 돌보고, 사회화하고, 교육하는 일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다음 날 일로 복귀하기 위해 먹고, 씻고, 입고, 쉬어야 하는 성인 노동자의 보급 문제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경제의 작동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런 주장은, 맑시즘적 페미니즘의 한 부류인 이른바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펼친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발전되어왔다. 그 이론은 사회적 재생산이 틀어지면 경제적 생산이 실로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본 축적은 친족관계, 출생률, 사망률 등등의 것에 제약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벌써 일방향적인 인과관계보다 복잡한 그림을 갖게 되었다.

자연 혹은 생태 배경조건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주장을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은 생산이 의존하는 물질들, 즉 원자재, 에너지원, 폐기물 처리 공간의 확보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런 조건이 위태로워지면 역시 일을 망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그런 상황의 흥미로운 한 사례를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어떤 면에서는 생태적 기능장애 현상이다. 이 바이러스는 아마도 기후변화와 ‘개발’이 야기한 생물종 이동의 결과로서, 천산갑(pangolin)일 것 같은 매개 종을 거쳐 박쥐로부터 우리에게 옮겨지는 인수공통감염을 통해 인간에 대한 위협으로 부상했다. 그 결과 전체 경제 시스템이 엄청나게 수축되었다. 코로나19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과관계의 정말로 훌륭한 사례다.

 

모스께라 당신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어느정도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배경조건을 활용하고 또 거기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완벽하게 자율적인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역들이 비교적 상호 독립적이더라도 경제 시스템은 여전히 다른 영역에 작용하고 그 영역들을 변형시킬 수 있다. 자연 같은 외부의 영역을 조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특이성 아닌가?

 

프레이저 확실히 자본주의경제에는 대단한 인과적 역동성을 낳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바로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하려 하는 절대적인 강박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경제는 누군가 꽤 큰 돈을 벌고 나서 아름다운 저택으로 물러나 삶을 즐기며 번 돈을 다 쓸 수 있는 식의 경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점점 더 많은 잉여가치, 점점 더 많은 이윤, 점점 더 커져가는 자본을 낳는 것을 목표로 재투자하려는 강박이 존재한다. 그것은 강력한 힘으로서, 자본의 소유자가 한계를 밀어붙이고 비경제적인 조건을 자신의 의지대로 굴절시키도록 이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는 그들의 능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 능력은 반작용(pushback)에 놓여 있고, 자기 스스로의 일정에 맞춰 자신의 속도대로 움직이는 자연도 그에 포함된다. 생태적 재생산의 시간성은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 그러니 ‘비경제적’이라고 상정되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팽창 충동은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강박이며, 시스템 자체에 내장된 것이다. 그 충동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개별 인간의 의지보다 훨씬 강력하며, 자본의 가치를 확장하도록 동기화되어 있어서, 말하자면 ‘자본의 의지’를 관철한다. 그 충동은 너무나 강력해서 자본의 배경조건(가족, 자연, 국가 형태 등)을 변형시키고야 말지만, 방금 말했듯이 어떤 한계 내에서 그러하다. 내가 짚고 싶은 것은 맑스주의자들이 축적 동학의 힘과 조형 능력에 대한 생각을 고수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지만, 그런 생각을 토대-상부구조라는 인과성 구도로 치환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배경조건은 그 나름의 재생산 문법과 시간성을 가지며 또한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고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비경제적인’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반작용이 존재한다.

 

모스께라 당신이 지적하다시피 코로나 위기는 이같은 외부요인들이 자본주의와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해서, 당신이 ‘다차원적’이라고 묘사하는 종류의 자본주의 위기로 이어진 하나의 극적인 예이다. 다른 곳에서 당신은 적어도 2008년부터는 현재의 금융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았으며 아마도 최종적일지 모를 그 위기는 종국에는 다른 자본주의 축적형태로의 역사적 이행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프레이저 나는 당신이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에 이미 내포된 몇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선 우리는 부분적 위기와 일반적 위기를 구분해야만 한다. 부분적 위기는 특정한 자본주의 축적체제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명백히 작동불능 상태인 주요한 영역이 하나 있다 해도 다른 영역은 대체로 괜찮은 상황을 뜻한다. 우리는 종종 경제위기를 이런 부분적인 위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들은 사회의 오직 한 영역에만 해당되는 그런 부분적 위기의 숱한 사례들을 들 수 있다. 이는 전체 사회질서와 관련된 일반적 위기와는 다르다. 일반적 위기라는 개념은 몇몇 주요한 영역의 작동불능 상태 혹은 막다른 곤경이 중첩되거나 수렴되는 것을 뜻한다. 단지 사회의 한 부문이 아니라 주요한 부문들 전부 혹은 거의 전부가 위기에 빠져 서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1930년대의 경우가 그랬다.

나는 우리가 지금 그같은 종류의 일반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우리는 거의 금융 붕괴에 가까웠던 2007~8년의 사태처럼 여러 형태의 경제위기를 목도하고 있다. 우리의 통치자들은 문제를 땜질할 방법을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가 진짜 해결된 것은 아니다. 광범위한 금융화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최근 보고서가 말해주듯이 우리의 경제적 곤경은 굉장히 심각해서 파국적이기까지 한 또다른 위기, 즉 지구온난화와 포개지고 있다. 이 생태위기는 오랜 기간 조짐을 드러내왔고, 이제는 생생하게 감지되고 있다. 그간 온난화의 최악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곳까지 포함하여 점점 전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체감하는 중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또한 존재한다. 그 위기 속에서 아동의 양육, 노인 부양, 교육과 의료 등 인간을 낳고 돌보고 유지하는 우리의 역량은 고갈되거나 위축되고 있다. 국가가 공공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접고 임금 수준이 하락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임금노동에 할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렇듯 시스템이 돌봄노동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고 있다. 그래서 이 부문 역시 특히 팬데믹 상황에서 위기에 빠졌다. 누군가는 코로나가 기존의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엄청나게 악화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공공의료 기반시설과 사회적 서비스에 대한 투자 중단을 포함하여) 사회적 재생산의 기존 위기가 코로나 상황을 엄청나게 악화시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중대한 정치적 위기도 마주하고 있다. 미국 같은 강대국조차도 시스템이 야기하는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어느 면에서 이 위기는 거버넌스의 위기다. 국가는 사실상 모든 규제기구를 장악하고 자신과 부유층을 위한 막대한 감세 조치를 획책해온 거대기업에 제압당해 마비되고 소진된 상태이다. 정부는 수십년간 세입을 빼앗겨서 기반시설이 붕괴되는 걸 방치해왔으며, 개인보호장비(PPE) 같은 핵심적인 공공재의 비축량도 고갈되었다. 국가는 그 속성상 국가의 관할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 그 결과가 구조적 차원의 심각한 거버넌스 위기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정치적 위기 또한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람시적인 의미에서의 헤게모니 위기이다. 기존 정치로부터의 이탈, 즉 신자유주의와 연루되어 추해진 기성 정당과 정치 엘리트로부터의 광범위한 이탈이 발생하고 있으며, 더불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포퓰리즘이 등장하고 있다. 어떤 포퓰리즘은 잠재적으로 해방적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지금 경제적 위기,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생태적 위기, 그리고 양면적인 정치적 위기가 얽힌 다층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모여서 자본주의사회의 일반적 위기를 낳는다. 그 효과는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서, 처음에는 여기에서 다음에는 저기에서 곧이어 또다른 곳에서 터져나온다. 위기의 발발을 수습하려는 모든 노력이 다른 위기를 낳고,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여타 부문과 지역, 인구집단에 고통을 가하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일반적 위기를 생생히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시기에 언제라도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하거나 혁명적 상황이 고조되지는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자본주의 위기는 수십년간 지속될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시즘이 패배하게 되는 20세기 전반기 내내 자유주의-식민주의적 자본주의가 격렬한 일반적 위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역시 그런 긴 고투의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

 

모스께라 확실히 코로나는 우리의 미래 예측 역량을 제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경향에 기반해서 서로 다른 미래 시나리오를 전개해보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파국적인 시나리오를 피하고 보다 해방적인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이끌 방법을 생각하자면 말이다.

 

프레이저 동의한다. 나는 기꺼이 가능한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예측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나는 현재의 위기가 ‘발전적’(developmental) 위기인지 혹은 ‘획기적’(epochal) 위기인지 고려하는 것에서 시작하려 한다. 이것은 빙엄튼 학파(Binghamton school,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 Wallerstein이 주도한 세계체제론을 지칭한다. 월러스틴이 오랜 기간 소장을 맡아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켜온 ‘페르낭 브로델 센터’가 빙엄튼 소재 뉴욕주립대 소속이다—역자 주)에 빚지고 있는 구분이다. 획기적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고, 그 해결책은 시스템의 극복, 다시 말해 비자본주의적이거나 포스트자본주의적인 사회형태로의 교체를 요구한다. 반면 발전적 위기는 자본주의 역사 내에서 특정한 ‘축적체제’나 단계에 국한되며, 달라졌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체제로의 교체를 통해 최소한 잠정적으로는 해결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시스템이 구성하는 상품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 착취와 탈취 간의 경계는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시 설정될 뿐이다.

그런 구분은 이런저런 형태로 자본주의의 모든 단계에 존재하지만 모순의 지점이기도 하다. 각각의 모순은 조만간 문제를 유발하게 되어 있는 (경제적·생태적·사회적 혹은 정치적) 위기의 경향을 품고 있다. 기존 체제는 한동안 그 모순들을 누그러뜨리거나 회피해낼 수 있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마침내 그 모순이 명명백백하게 폭발하여 체제가 가시적인 위기 단계로 진입하면, 긴박한 해결책의 모색과 더불어 그 해결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맹렬한 투쟁이 촉발된다. 그러나 그런 투쟁을 겪고 있는 이들은 투쟁의 결과가 자본주의 내의 새로운 체제인지 아니면 포스트자본주의적인 대안인지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그것은 사후적으로만,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되고서야 분명해진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모든 일반적 위기는 ‘그저’ 발전적 위기인 것으로 드러났다. 상업 단계에서의 일반적 위기는 19세기의 자유주의-식민주의 체제로 이어졌고, 이 새로운 체제의 위기는 다시 20세기 중반 국가관리 체제로 이어졌다. 그리고 국가관리 체제는 현 시기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길을 내주었다. 각각의 경우에 새로운 체제는 이전 체제의 발전적 위기를 잠정적으로 해결했지만 끝내는 스스로의 위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각각의 경우에 다수의 사회적 행위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위기가 획기적 위기이며 자본주의를 폐지할 때에야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시스템의 창의성,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그 능력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이같은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 위기의 어떤 측면들은 금융화된 체제의 특정한 것으로서 발전적 위기일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현재 위기의 모든 측면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 싶다. 무엇보다 이 위기의 생태적 측면 때문에, 나는 우리가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극복이라는 해결책이 요구되는, 무언가 다른 진정한 획기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몇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 여기에는 전지구적인 민주적 생태사회주의 같은 바람직한 것도 포함된다. 물론 그런 사회가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그 사회에서 ‘가치법칙’(law of value)이 폐지되고, 착취와 탈취가 종식되며, 인간사회와 비인간 자연, 상품 생산과 돌봄,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그리고 민주적 계획과 시장 간의 관계가 재발명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이같은 전망은 가능성의 스펙트럼에서 ‘좋은’ 극단이다. 반대편 끝에는 자본주의는 아니되 실로 끔찍한 결말, 서로 적대하는 독재자들 혹은 전지구적인 권위주의체제하에서의 막대한 사회적 퇴행의 가능성이 있다. 물론 위기는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 거의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사회가 스스로를 파괴하는(self-cannibalization) 난장판 속에서 위기가 지속되는 제3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앞서 밝혔듯이 나는 여기서 예측을 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선택지가 위와 같다면 우리는 첫번째 시나리오를 위해 미친 듯이 투쟁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생태사회로의 전환이라는 기획을 뒷받침할, 잠재적인 모든 해방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새로운 반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최근 글(“Climates of Capital,” New Left Review 2021년 1~2월호)에서, 나는 그 전략을 개관하고 그 뒤에 자리 잡은 생각을 설명하려 했다. 내 생각은, 그런 기획은 반자본주의적이고 횡단환경적인(transenvironmental, 정치·문화 등 모든 의제와 연결되고 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환경 의제를 강조하는 용어—역자 주) 성격으로 고안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 기획은 자본주의가 생태위기를 초래하는 구조적 경향성을 내장하고 있으며 기후변화의 주요한 사회역사적 동인이라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의 생태적 모순이 여타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모순들과 불가분으로 엮여 있고 그것들과 떼어내서 따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또한 횡단환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녹색운동가들은 노동권, 생계, 식량 안전 그리고 돌봄노동의 재평가와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공공투자를 위해 싸우는 이들, 이민자의 추방과 배제, 토지의 몰수, 권위주의와 인종주의적·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들과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와 같은 횡단환경적 연합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모든 사회적 문제가 단일한 사회 시스템, 즉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편리한’ 사실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연합 내 다양한 파트너들의 공동의 적이자 다양한 정치활동의 공통 초점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반자본주의 입장을 채택한다면 현재 분열되어 있는 생태정치의 조류들은 세력을 규합할 수 있고 ‘비환경적’ 사회운동과도 연대할 수 있다. 나는 이즈음 자주 갈등하는 탈성장운동, 환경정의운동, 그린뉴딜을 떠올리는 중이다. 내가 볼 때 이 각각의 운동에는 진정한 통찰력도 있지만 활동을 저해하는 맹점도 있다. 이 운동의 분파들이 횡단환경적·반자본주의적인 반헤게모니 블록에 자리하게 된다면, 통찰은 증폭되면서 맹점은 교정되리라고 장담한다. 그럴 때 그린뉴딜 같은 특정한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기보다는, ‘민주적 생태사회주의’(democratic ecosocialism)라고 부를 수 있는 더욱 급진적인 변혁 도정에서의 (뜨로쯔끼주의적인 정식을 빌리자면) ‘사회주의 이행 전략’으로 보일 것이다.

어느 경우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언제 벌어질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 스스로는 다양한 차원에서 현재 위기의 동학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애쓰고 있다. 나의 목표는 기존 활동가들과 잠재적인 활동가들이 자신의 다양한 관심사를 자리매김할 수 있는 사회적 총체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그들의 관심사는 파편적·분열적으로 머무는 경향이 있다. 나는 다양한 관심사가 전체 그림 안에서 어디서 어떻게 맞물리는지에 관한 인식을 전하는 동시에 각축하는 사회세력 간의 현황을 개관하기를 희망한다. 나의 더 큰 목표는 실천적인 것으로서, 해방적 방식의 위기 해소를 위해 여러 세력들 및 관심사가 가장 효과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방식을 명료하게 밝히는 것이다.

 

모스께라 당신의 이야기는 다소 포퓰리스트적인 전략처럼 들린다. 사회는 원래 파편적인 이해나 관심사로 이루어지기에, 그 다양한 이해들을 하나의 통일된 정치적 주체로 규합하는 것이 정치적 과제가 된다는 생각 말이다. 또한 당신은 과거에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좌파 포퓰리즘의 운동으로서의 실현 가능성이 제한적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더 나은 실적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프레이저 나는 월가 점령시위를 계기로 포퓰리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99퍼센트 대 1퍼센트’라는 수사에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너무나 포퓰리즘적이었다. 그 수사는 계급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정확성과 엄격함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정서적으로 강력했다. 그 언어가 빠르게 미국을 사로잡는 모습은 놀라웠다. 이는 어느정도는 그 표현이 버니 쌘더스(Bernie Sanders)에 의해 엄청나게 증폭되었기 때문이었다. 쌘더스는 ‘시스템’이 ‘억만장자 계급’의 편에서 ‘조작되었다’(rigged)고 말했다. ‘조작되었다’는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런 사실을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놓치지 않았다. 후에 그는 그 말을 자신의 것으로 삼되 의미를 비틀었다.

어쨌든 포퓰리즘 언어가 미국 정치의 장에 폭발적으로 유입된 것은 상당히 극적이었다. 그런 현상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심각한 균열을 예고했으며, 또한 일군의 ‘좌파스러운’(leftish) 진영에서 팽배했던 특수화하는(particularizing) 수사와의 단절을 초래했다. 당시에 그런 진영은 (‘여성’과 같은) 집합적인 정치적 범주들을 더욱더 작은 별개의 범주로 쪼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99퍼센트 대 1퍼센트’라는 말은 더 큰 집단이라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나에게 이런 상황은 미국에서 포괄적인 좌파연합 구축에 대한 관심이 커가는 것을 시사한다. 즉, 현재 상황은 (아마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로 느끼고만 있는) 통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좌파의 파편화된 상태를 극복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치 분석에 대한 갈망이 표출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트럼프가 포퓰리즘 수사를 전유했기에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을 구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두 포퓰리즘 모두 누가 위고 아래인지, 누가 누구의 목을 밟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위계의 지도를 제공한다. 그러나 두 지도의 차이는 분명하다. 좌파 포퓰리즘은 이분법으로써 사회를 두 집단, 즉 방대한 다수와 그들로부터 막대한 부를 빼앗아 축적하는 소수의 과두 엘리트로 나눈다. ‘1퍼센트’에 대항해 ‘99퍼센트’를 동원하는 기획인 것이다. 반면 우파 포퓰리즘의 지도는 삼분화되어, 사회를 세 집단으로 나눈다. 꼭대기에는 ‘피를 빨아먹는’(bloodsucking) 엘리트들이, 그리고 밑바닥에는 ‘기생하는’(freeloading) 하층집단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 끼여 양쪽 모두로부터 먹히는 선량한 ‘사람들’(people)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파 포퓰리즘은 1퍼센트뿐 아니라 이민자, 유색인종, 성소수자 등등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매우 다른 사회상이자 정치 기획이다.

두번째 차이는 우파 포퓰리즘은 적들을 특정적이고도 실체적인 용어로 정의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트럼프 지지자들의 어법을 보면 꼭대기에는 ‘국제 유대인-소아성애자 음모집단’이 있고, 밑바닥에는 ‘멕시코 강간범’ 혹은 ‘게으른 흑인’이 있다. 어느 쪽이든 문화적 용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적을 사회 시스템 내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기능적으로 정의하므로, ‘월가’ 혹은 ‘억만장자 계급’이 적이 된다. 물론 ‘월가’가 ‘유대인 은행가’로 바뀌는 것처럼 기능적 용어가 정체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퇴행할 수 있다. 두 포퓰리즘 사이의 절대적인 경계는 존재하지 않기에 좌파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퇴행을 막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이런 차이는 앞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도덕적으로 중요하다. 좌파 포퓰리즘의 이분법적인 ‘기능적’ 사회학이 우파의 삼분법적인 정체성주의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금융은 실제로 방대한 다수를 강탈하지만 ‘하층집단’은 결코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다.

다음 질문은 그렇게 정의된 좌파 포퓰리즘이 승리하고 영향력을 넓히며, 사회 비판을 심화하고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행 가능한 구성이 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좌파 포퓰리즘이 투쟁 과정에서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시스템을 명확히 밝히고, 그 시스템이 정확히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가 또한 물어야 한다. 내 추측은 좌파 포퓰리즘이 계급투쟁에 접근하는 진입점을 제공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좌파 포퓰리즘이,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과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통찰을 낳는 데 성공하리라고는 그만큼 확신하기가 어렵다. 그 마지막 지점에서는 맑스주의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지켜보자.

여기까지 말하기는 했지만, 좌파 포퓰리즘이 우파의 경쟁상대에 비해 지금까지의 성과가 인상적이지 않다는 당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확실히 우파 포퓰리즘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유지하는 데 훨씬 더 성공했다. 이런 상황은 부분적으로는 사민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과 그 지도자들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고 강화하는 데 맡은 추한 역할 때문이다. 미국에는 빌과 힐러리 클린턴(Bill and Hillary Clinton), 영국에는 토니 블레어(Tony Blair), 독일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있었다. 좌파·우파 포퓰리즘 모두 그들이 가져온 재앙에 반응하여 등장했지만, 좌파 포퓰리즘은 그들이 속한 정당들을 버린 노동계급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조차 금융화를 가져온 바로 그 ‘진보적 신자유주의자’와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고투해왔다.

어쨌든 나에게는 다른 가능한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좌파로서는 현재 우파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집단의 마음을 얻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그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 집단 내의 열성적인 인종주의자들에게는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그런 부류가 트럼프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에 투표한 노동계급 집단의 압도적 다수에 해당한다고 상정해서도 안 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한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좌파 포퓰리즘을 통해 그런 투표자들의 상당수를 좌파 쪽으로 되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룰라(Lula da Silva)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같은 인물에게 투표했으며, 그 희망이 좌절되면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사실로서 알고 있다. 좌파 포퓰리즘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그들의 정당한 분노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분노를 낳은, 감춰진 진짜 이유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정확히 누가 무엇을 조작했으며, 왜 경멸받는 하층집단에만 분노하는 것이 막다른 길인지, 그리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정당을 지지해서는 왜 결코 (전지구적인 자본과 금융이라는) 진정한 악당들을 꺾을 수 없는지를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시점에서 최선의 희망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좌파 포퓰리즘이다.

 

모스께라 계급투쟁은 어떻게 그 좌파 포퓰리즘의 사회주의운동으로의 진화 과정에 맞물리게 되나? 어떤 이들은 다층적인 적대관계를 상징적인 ‘민중’으로 통합하려는 포퓰리즘의 주안점이 사회주의 정치와 전적으로 양립 가능하지는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입장은 특히, 노동계급의 힘을 ‘구조적인’ 것으로, 즉 노동자들이 실제적인 정치적 이익을 위해 생산자라는 위치를 활용할 수 있는 생산 지점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하는 종류의 사회주의 정치에 해당될 것이다.

당신이 ‘경계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사유가 단서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경계투쟁은 당신이 말하는 확장된 자본주의 개념의 맥락에서 계급투쟁이 취하게 될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한가?

 

프레이저 적어도 전통적인 맑시즘과 주류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 내에서는 역사적으로 계급투쟁을 협소한 의미, 즉 공장 임금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추출된 잉여가치의 분배와 그 비율을 둘러싼 생산 지점에서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물론 그 투쟁은 이어서 공장 문 너머로 확장되고 정치적 차원을 발전시켜 멀리 바깥에서도 그밖의 대의들을 감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산업적인 환경에서의 임금노동과 결부되는 계급투쟁의 이미지가 대체로 강력한 것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같은 계급투쟁 이미지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샹딸 무페(Chantal Mouffe)와 에르네스또 라끌라우(Ernesto Laclau)가 ‘계급본질주의’로 명명한 것에 대해 반대하게 되었다. 그런 논쟁에서 사람들은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사회의 유일한 투쟁이 아니며, 무엇이 사회에 대한 정의로운 비전을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독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계급본질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사회주의자와 맑스주의자들이 모든 형태의 억압과 불의를 호명하는 일을 독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역사적으로도 자본주의사회는 관습적으로 정의된 계급투쟁의 범위를 벗어나는 강제노동과 종속노동(dependent labour), 그밖의 다양한 형태의 억압이나 지배를 둘러싼 엄청난 논쟁이 존재한 공간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런 싸움에서는 항상 ‘계급투쟁은 한가지 매우 특정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비(非)계급투쟁을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은 계급투쟁과는 다른 무언가이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계급투쟁의 협소한 정의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이 대담의 초반부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논의했던 확장된 자본주의 개념은 계급투쟁을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해준다. 자본주의가 그저 경제가 아닌 것처럼, 계급은 생산 지점에서의 투쟁만은 아니다. 잉여가치가 착취당하는 임금노동자로부터 분리되어 축적되는 바로 그 특수한 현장을 위해 필요한 그 모든 배경조건을 아우르는 것이 자본주의임을 이해한다면, 사회적 재생산 역시 동등한 정도로 시스템의 핵심요소라는 것과 그 요소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양상을 파악하게 된다. 자연, 공공재, 규제 역량, 그리고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간주하는 법 형식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것들을 둘러싼 투쟁 역시 반자본주의투쟁, 적어도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요소를 둘러싼 투쟁이 되기에 충분하다.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표출된다면 그런 투쟁들 역시 계급투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은 역사적으로 계급투쟁의 일부였다. 그것이야말로 노동운동의 강력한 가족임금(family wage) 요구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가족임금 요구는 말 그대로 고용조건에 관한 투쟁이자 사회적 재생산과 가정생활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하지만 그 투쟁은 여성들 또는 결코 가족임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간주되는 부류의 노동계급에 항상 좋지만은 않은 방안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 따라 상황은 순식간에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계급과 계급투쟁을 보다 넓게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계급투쟁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고 말할 때 뜻하는 바를 주의 깊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반드시 싸워서 무너뜨려야 하는 거대하고 견고한 힘과 맞서기 위해 필요한 광범위한 세력연합을 도모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해 보이는 이런 투쟁들이 모두 계급투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선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함께이며, 동일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로를 따라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시각, 나아가 계급투쟁과 반자본주의투쟁에 대한 확장된 시각을 채택한다면, 그 다양한 투쟁들이 곧장 조화되지 않는 양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것은 정치적 작업이며, 실로 고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구상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 투쟁들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는지, 그리고 투쟁들을 구성하는 특정 방식들은 어떻게 (다른 방식이었다면 피할 수도 있었을) 불필요한 제로섬 게임 상황을 낳는 경향을 띠게 되는지 보여주는 지도를 만들어야만 한다.

경계투쟁을 설명할 때 나는 종종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관점을 소개한다. 경계투쟁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지만 폴라니는 (우리로선 그냥 경제로 불러도 무방한) ‘자기조정시장’(self-regulating market)과 사회 간의 경계투쟁 문제에 몰두했다. 이 접근방식에서 매력적이고 생산적인 점은 투쟁이 그저 잉여가치의 분배방식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투쟁은 무엇이 삶의 문법을 결정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즉, 어떤 공동체에서 자본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는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 실제로 누가 삶의 문법을 만드는 힘을 가지는지에 관한 심오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 질문들이 정치적 의제에서 은밀하게 제거되고, 우리 몰래 자본과 자본 축적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맡겨진다.

경계투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분배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삶의 문법이 조직되는 방식이라는 문제에 도달하려 애쓴다는 것을 뜻한다. 경계투쟁은 자연과 사회 간의, 그리고 공동체와 친족관계 등을 돌보는 것과 관련된 활동과 임금노동 간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지에 관한 실제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들은 결국 다음 질문들로 모아진다. 시장이 작동할 수 있는 합법적인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합법적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경계투쟁을 얘기할 때의 요점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런 질문들이 언제나 논쟁적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계투쟁이 계급투쟁의 대안은 아니지만, 계급투쟁은 때때로 경계투쟁의 형태를 띠며, 경계투쟁은 (상황이 잘 흘러가면) 때때로 계급투쟁의 형태를 띠기도 하는 것이다.

번역: 이정진(李廷進)/영문학 박사

 

* 이 글은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Jacobin)에 실린 “Nancy Fraser: ‘Cannibal Capitalism’ Is on Our Horizon”(2021.9.10.)을 옮긴 것이다. ⓒNancy Fraser 2021/한국어판 ⓒ창비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