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발명인가

식민주의의 특권화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김흥규 金興圭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문학과 역사적 인간』『한국 고전문학과 비평의 성찰』『한국 현대시를 찾아서』등이 있음. gardener@korea.ac.kr

 

 

1. 문제제기

 

본고는‘통일신라’라는 관념이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발명이라는 최근의 주장을 비판하고,‘삼한/삼국통일’담론이 7세기 말의 신라에서 형성되어 조선후기까지 여러차례 재편성과 전위(轉位) 과정을 거치면서 동적으로 존속해왔음을 해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근년의 탈민족주의 논의가 근대 및 식민주의를 특권화하고 역사이해를 부적절하게 단순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1

논의의 시발점은 황종연(黃鍾淵)·윤선태(尹善泰)가 협업적 구도 속에서 나란히 제출한 두편의 논문이다.2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라가 조선반도의 영토 지배라는 점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위상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일본인 동양사가들의 연구에서였”으며,3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라는 담론은 “일본 근대역사학의 도움으로 등장한” “근대의 발명품”이었고,4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그 자긍심과 달리 식민주의 담론의 차용에 의존해 비로소 민족통일의 위대한 과거를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 1854~1922)의 『초오센시』(朝鮮史, 1892)가 바로 이런 논의의 거점으로 제시되었다.5

사실이 그렇다면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발견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와 반대로서, 윤선태는 7세기 이래의 수많은 증거와 담론들을 무시하면서 그릇된 논증을 만들어냈고, 황종연은 이를 참조하여 민족주의적 관념과 상상의 피식민성을 논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다. 이것이 특정 사실에 관한 시비에 그친다면 나 같은 고전문학도가 굳이 참견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별적 논점의 차원을 넘어 전근대와 근대를 관통하는 한국사상사 이해에 맞물려 있으며, 식민지 근대성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대표권을 다투는 요즘의 한국 근현대사·문학연구 상황과도 직결된다. 그런 점에서 본고는 한국사의 특정 국면에 대한 논의와 함께 근간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담론 상황에 대한 범례적 문제제기를 지향한다.6

본고를 통해서 나는 민족을 상고시대 이래의 항구적 실재라고 보는 원초적 민족주의를 옹호하려 하지 않는다. 본고의 입장은 어떤 종류의 정체성도 사회적 구성 작용과 담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정체성 형성에 관여하는 담론들은 근대세계에서만 생산되지 않으며, 더구나 식민권력 등의 특권적 주체에 의해 독점된다고 정식화할 수 없다. 민족이라는 거대주체의 서사로 단선화된 역사인식을 비판한 것은 1990대 후반 이래의 포스트주의적 시각과 탈민족주의론이 가져온 값진 성과였고, 황종연이 이에 공헌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진전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근대와 식민주의를 또다른 거대주체로 특권화하여 역사의 복잡한 얽힘을 모두 그 밑에 몰아넣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국면에 이르렀다.

 

 

2. 『삼국사기』와 『초오센시』

 

윤선태와 황종연이 제출한‘식민주의 역사학에 의한 신라통일 발명’론의 주요 문제점은 다음 네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 하야시 타이스께의 영향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강운동기의 대다수 역사서들을 논의에서 제외했다. 둘째, 하야시 『초오센시』의 신라통일 서술을 과장 해석하고, 해당 대목에 『삼국사기』가 다량으로 차용된 것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했다. 셋째, 7세기 말 이래의 각종 자료와 역사서에 풍부하게 나타나는 삼국통일 담론을 외면했다. 넷째, 전근대 사서들을 살피지 않고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의 신라통일 요인론을 하야시의 차용이라 간주했다.

이 중에서 뒤의 두가지는 각각 3, 4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앞의 둘만을 먼저 논한다. 먼저 첫째의 문제. 윤선태는 자강운동기에 나온 한국사 교과서들의 개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서 논의를 전개했다.

 

〔국사교육의 시급성을 강조한, 1895년 3월의 내무아문 훈시 이후〕‘국민 만들기’구상의 일환으로 등장한 역사교과서가 바로 1902년 김택영의 『동사집략』, 그리고 현채의 『동국사략』(1906), 『중등교과 동국사략』(1908) 등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 역사교과서들은 김택영이나 현채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하야시 타이스께의 『조선사』(1892)를 거의 그대로 역술(譯述)한 것들이다.7

 

1895년부터 1910년 4월까지 나온 약 20종의 한국사 교과서를8‘… 등’이라는 모호한 표현 아래 묻어두고 윤선태는 하야시의 『초오센시』가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신라통일의 발명’만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여타의 역사 교과서들에서도 신라의 통일이라는 내용은 하야시의 영향과 무관하게 자주 등장했다. 예컨대, 학부(學部)에서 편찬한 『조선역사』(1895)는 668년의 고구려 멸망 기사에 “이 뒤에 신라가 통일하니라”라고 덧붙였고,9 『동국역사』(현채 1899)는‘신라기(新羅紀)’서두의 문무왕 재위기간 설명 뒤에 “통일 전 7년은 삼국기를 보라”고 했다.10 『신정 동국역사』(1906)와 『대동역사략』(1906)은 본문 기사에서 문무왕 8년(668)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서술했다.11 이른바 신사체(新史體)로 씌어진 『초등 대한역사』(1908)는 조금 특이하게 문무왕 10년에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12 이밖에도 대다수의 편년체 교과서들은 통일기를 뜻하는‘신라기’를 그 이전의‘삼국기’와 분리함으로써 체제상으로 신라통일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윤선태는 이 모두를 논의에서 제외하고, 『초오센시』의 역술에 의한 저작은 3건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함으로써 이 시기의 역사 이해를 작위적으로 단순화했다.13

둘째로, 그는 『초오센시』를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원으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논증과 해석을 여러차례 감행했다. 그중에서 우선 주목할 두가지 논점은‘일통삼한(一統三韓)’의 의미와, 삼국통일 시점의 설정 문제다. 이에 관한 그의 주장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통일신라’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은 “하야시가 발명한 것이며, 『조선사』는 그 최초의 역사서”다. 신라 때의‘일통삼한’의식이 조선후기의 신라정통론으로 채택되고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나, “전통시대의 신라정통론과 하야시의 그것”(신라통일론)은 분명히 다르다.

②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들이 문무왕 8년(668, 고구려 멸망) 이후를‘신라기’로 독립시킨 체제에서 “분명히 신라통일의 의의를 크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야시의 견해는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시점에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전근대의 신라통일론과 다르면서 민족주의 사학의 내용과 같다.14

 

위의 두 입론은 우선 서로 충돌한다. ①의 주장은 하야시의 『초오센시』 이전에‘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관념 내지 담론이 없었다는 것인 데 비해, ②의 주장은 전근대의 신라통일론이 있었으나 통일 시점에 대한 인식에서 하야시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①의 입론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개념을 삽입했다. 일통삼한론(a)과 신라통일론(c) 사이에 신라정통론(b)을 끼워넣고, b와 c가 다르니 a와 c도 같지 않다는 논법이다. 하지만 그런 매개단위가 필요 없이,‘일통삼한’이라는 명제에 동사적 용법으로 쓰인‘일통(一統)’은 곧 통일이며,[15. 『漢韓大辭典』(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99)은‘一統’을 다음

  1. 이 글의 초고에 대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동료 학자들이 보내준 논평과 조언에 감사한다.
  2. 황종연 「신라의 발견: 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 황종연 엮음 『신라의 발견』(동국대출판부 2008), 13~51면; 윤선태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역사학의 성립」, 같은 책 53~80면.
  3. 황종연, 앞의 책 21면.
  4. 윤선태, 앞의 책 69, 78면.
  5. 하야시 타이스께의 『朝鮮史』를 같은 이름의 역사서나 일반명사와 구분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그 일본어 발음대로 『초오센시』라 표기한다.
  6. 이와 관련한 선행 논문으로 김흥규 「정치적 공동체의 상상과 기억: 단절적 근대주의를 넘어선 한국/동아시아 민족 담론을 위하여」, 『현대비평과 이론』 30호(한신문화사 2008년 가을) 참조.
  7. 윤선태, 앞의 글 57면.
  8. 이들은 대부분 『한국 개화기 교과서 총서』(아세아문화사 1977) 제11~20권에 수록되어 있다.
  9.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1권(아세아문화사 1977), 58면.
  10.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4권, 121면.
  11.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9권, 65면;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8권, 111면.
  12. 한국개화기교과서총서 14권, 385면.
  13. 이와 관련하여 윤선태는 두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째, 김택영의 『동사집략』은 총 570면이 넘는 규모로 고조선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편년체 순한문 역사서로서, 『초오센시』의 역술이 아니다. 『동사집략』의 단군 기사와 임나일본부설 등 일부에 하야시 또는 일본 사서를 수용한 곳이 있기는 하나(조동걸 『현대한국사학사』, 나남 1998, 92~94면 참조), 이 책을 『초오센시』의 역술이라 함은 실제 자료를 살피지 않았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둘째, 현채가 낸 두 책은 동일 저술의 선후 관계로서, 1906년의 초판에 1894년 이래의 역사를 추가하여 1908년의 증보판이 나온 것이다.
  14. 윤선태, 앞의 글 58~5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