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권여선 權汝宣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등이 있음.

puruntm@empas.com

 

 

 

실버들 천만사

 

 

1

 

채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반희는 발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왼쪽 둘째 발톱 끝이 탁한 우윳빛을 띠고 있었다. 노화 때문일 수도 있고 무좀 초기 증상일 수도 있었다. 체육관에서 반희는 운동화를 신고 일했고 샤워실과 탈의실을 청소할 때에도 슬리퍼를 신었다. 앞이 트인 슬리퍼라 문제였을까. 반희가 왼발을 가까이 당겨 들여다보다 멀리 놓고 보다 하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뭐 해? 채운이 물었다.

그냥 있어. 너는?

반희의 물음에 채운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분 안 좋아?

요즘 항상 기분이 별로야.

밖에 못 나가서 그런가보다. 다들 우울하다더라.

채운은 다시 잠자코 있었다. 반희 생각에 이건 그냥 안부전화가 아니라 할 말이 있어 건 전화 같았다. 반희는 채운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며 발톱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무좀이 맞나. 탈의실의 축축한 발깔개를 디뎠을 때 깔개가 머금고 있던 물기가 슬리퍼의 트인 부분으로 스며들고 습기 속 세균이 양말에 침투해서……

원래 이번주 토요일이…… 목이 잠긴 채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날이었어요.

반희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니, 무슨 이런 말이 있나 생각했다. 이번주 토요일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채운은 이미 지나간 날처럼 무슨 날이었어요,라고 했다. 그것도 평소에 잘 안 하는 존댓말로. 반희는 이번주 토요일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보았다. 채운의 생일도, 명운의 생일도, 병석의 생일도 아니었다. 채운이 알 리 없지만 그들 부부가 결혼한 날도 이혼한 날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게 무슨 날이든 반희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날일 것이다.

그런데 취소됐어.

아. 그제야 반희는 이해가 되었다.

생일이나 기념일처럼 정해진 날이 아니라 무엇을 하기로 예정한 날이었다가 취소가 되어 무슨 날이었던 것이 된 것이다. 요즘은 다 그랬다. 뭐든 취소되고 뭐든 문을 닫았다. 반희가 일하던 구립체육관도 무기한 휴관에 들어갔다. 휴관하기 전까지 체육관은 코로나19가 아닌 무좀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주민들로부터 체육관 이용 후에 발톱 무좀에 걸렸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19는 먼 위협이었고 발톱 무좀은 코앞의 적이었다. 관장의 특별지시가 떨어진 후 헬스팀장은 조회 때마다 질병관리본부의 용어를 모방해 밀접 접촉이 어떻고 감염 경로가 어떻고 떠들어댔고, 틈만 나면 청소미화원들을 붙들고 고충을 늘어놓았다. 여사님들, 우리가 뭐 진단 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감염자들을 무슨 수로 잡아내요? 무좀에 걸린 인간들이 버젓이 체육관에 와서 운동하고 샤워하고, 거기까진 좋아, 발을 아무 데나 비비고 그 발을 손으로 만지고 그 손을 수건에 닦고 그 손으로 드라이어 만지고 드라이어를 발톱에 대고 말리고, 이게 참 공동생활수칙을 위반해도 너무 심하게 위반한 건데 아무리 써 붙여놔도 안 지키기로 작정한 인간들은 안 지킨다고. 그런데 여사님들은 진짜 무좀균의 진원지가 뭐 같아요? 대여하는 수건이나 운동복은 별문제가 없는 걸로 나왔는데 탈의실 발깔개가 진짜 문제일까나? 그걸 당장 없애고 싶어도 그러면 또 손님들이 미끄러져 뇌진탕에 걸리네 어쩌네 하니까 내가 미치겠는데, 그걸 플라스틱 발깔개로 바꾸면……

그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엄만 모르지?

채운의 말에 반희는 정신을 차렸다. 아, 토요일.

모르지.

결혼식 날이었어요.

반희는 가슴이 턱 내려앉았다. 또 존댓말이었다. 채운의 나이 스물다섯, 비록 반희가 눈치채지 못했어도 채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둘이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다면 이번주 토요일에 채운이 결혼 못할 이유는 코로나19 외에는 없었다. 반희 자신도 병석과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문득 반희는 자신이 채운에게 어떤 존재일까, 무엇을 기대하거나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 생각했고 그런 생각과 동시에, 스스로를 달래려는 건지 뭉개려는 건지 모를 생각들, 채운이 결혼을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채운의 삶은 오로지 채운의 것일 뿐인데,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번주 토요일이 결혼식 날이었다는 말에 반희가 눈앞이 흐릿해질 만큼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발톱 모양도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 결혼식이었는지 안 물어봐?

누구? 반희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채운이 너니?

나? 미쳤어? 어떻게 내 결혼식 날을 엄마가 모를 수가 있어?

채운이 펄쩍 뛰는 바람에 반희는 기뻤고 대번에 여유를 찾았다.

음, 그럼 누굴까?

채운이 아니라면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설사 명운이라 해도.

아빠!

웃음이 터졌다. 이번주 토요일에 이병석이 결혼을 하려 했구나. 그런데 하필 이런 재난 탓에 취소가 되다니.

웃는 거야? 엄마는 이 상황이 웃겨?

그래, 엄마는 이 상황이 웃긴다.

이렇게 말하고 반희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뱉어놓은 말을 얼른 치우려고, 그래, 나는 이 상황이 웃긴다,라고 정정해 말했다. 채운은 또 침묵을 지켰다. 채운이 요즘 항상 기분이 별로라고 한 게 병석의 결혼 때문이었을까. 그러니 반희가 두번이나 웃긴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을까.

잠시 뒤 채운이 엄마, 하고 불렀고 반희가 응, 했다.

상황은 좀 안 좋아도…… 여행, 갈까?

여행은 무슨? 식도 못 올렸는데 여행은 더 무리지.

뭐라고?

나중에 상황 가라앉으면 천천히 식 올리고 가겠지.

아니, 아빠 말고 우리.

우리? 반희는 숨이 약간 가빠졌다. 우리 둘이 여행 가자고?

엄마도 쉬고 나도 쉬고 이런 날이 또 언제 오겠어? 한적한 데 가서 가만히 숨만 쉬다 오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글쎄…… 채운아…… 글쎄……

더듬거리는 반희와 달리 채운은 갑자기 말이 빨라졌다.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자기가 아는 펜션이 있다고, 차 몰고 갔다 차 몰고 오면 된다고, 거기서는 밥도 해 먹을 수 있어서 밖에 나올 일이 없다고, 거기 꼭꼭 숨어서 아무도 안 만나고 그 근처만 산책하고 그렇게 딱 하루만 지내다 오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했다.

딱 하루만?

응, 딱 하루. 그러니까 일박 이일.

생각해볼게.

전화를 끊고 반희는 여행에 대해서보다 자신이 전화로 한 말들을 먼저 돌아보았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건 아닌지, 아니면 너무 적게 하려고 애써서 채운을 서운하게 한 건 아닌지, 혹시 쓸데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반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점검을 하는 자신이 싫었고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채운에게는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못했다. 자꾸 살피게 되었다. 채운이 알지 모르지만, 반희가 자신을 ‘엄마’라고 칭하지 않고 채운을 ‘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그런 살핌의 일종이었다. 가끔 오늘처럼 실패하기는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2

 

차를 몰고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던 채운은 대로변에 서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뭐야, 엄마야?

이미 꺾은 터라 좁은 골목에서 차를 돌리기가 힘들었다. 채운은 옆 건물에 차를 붙여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엄마!

반희가 두리번거렸다.

엄마! 여기!

채운이 차에서 내리며 소리치자 그제야 반희가 알아보고 다가왔다. 양손에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있었다. 채운이 뒤 트렁크를 열고 반희가 들고 온 짐을 받아 넣었다.

뭐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나와 서 있어?

여기 길이 좁으니까. 거기 작은 봉지는 넣지 말고 나 줘.

작은 봉지에서 고소한 참기름 향이 났다.

길이 좁으면 뭐? 차 못 들어가는 길이야?

마주 오면 비키기 힘들 때 있어. 근데 이 차는 못 보던 차다.

렌트했어. 거기 펜션 들어가는 길이 좀 빡센 비포장이라서.

채운은 운전석에, 반희는 작은 봉지를 들고 조수석에 탔다. 채운은 반희가 안전벨트 매기를 기다렸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엄마, 출발하기 전에 우리 몇가지 약속을 하자.

반희는 묻지도 않고 순순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첫째, 여행 내내 폰 꺼놓기.

그거 좋다. 반희가 새끼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둘째, 서로 친구처럼 무슨 씨 무슨 씨 하고 이름 부르기.

채운씨 이렇게?

응. 나는 반희씨 이렇게.

그것도 좋다. 또 까딱.

엄마가 좋아할 줄 알았어. 아니 반희씨가…… 채운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셋째, 이게 마지막인데, 맛있는 거 많이 해 먹기.

좋다, 좋아. 두번 까딱 까딱.

내가 운전하니까 요리는 반희씨가 더 많이 해야 할 거야.

그러지 뭐.

새끼손가락을 풀고 채운이 차를 출발시켰다. 좁은 골목을 ㄷ자로 돌아나와 대로에 합류할 때 반희가 짐짓 예의 바르게 말했다.

차가 큰데도 운전을 잘하시네요, 채운씨.

이게 그야말로 눈물겨운 훈련의 결과입니다, 반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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