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기호 李起昊

1972년 강원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장편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등이 있음.

antigiho@hanmail.net

 

 

장편연재 1

싸이먼 그레이

 

 

1. 개요

 

싸이먼 그레이(Simon Gray, 1981.4.24~2017.12.23)는 아일랜드 골웨이 카운티 클리프덴 태생으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대한민국 광주에 있는 광주외국어대학교 기초교양학부 소속 교수로 일했다. 2015년부터 한국어로 시와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으며, 2016년 6월 광주에서 발행하는 한 문예지에 짧은 산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7년 10월 광주외국어대학교에서 직권면직 처분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나들목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광주에 위치한 서안출판사에서 그의 유일한 한국어 저작인 『민물장어낚시』가 출간됐다.

 

 

2. 약력

 

· 1999년 아일랜드 클리프덴 커뮤니티 스쿨 졸업

· 2001년 아일랜드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 2007년 아일랜드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학과 대학원 졸업(문학박사)1

· 2008년 아일랜드 골웨이 국립대학교 영문학과 강사2

· 2012년 대한민국 광주국제외국어학교3 전임교원

· 2014년 대한민국 광주외국어대학교 기초교양학부 조교수 4

· 2016년 광주 빛고을타임즈5 객원논설위원

 

 

3. 가족관계

 

· 할아버지 제임스 그레이(1931~90)/할머니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1939~)6

· 아버지 패트릭 그레이(1962~)/어머니 에마 번(1961~)

 

 

4. 아일랜드에서의 삶

 

4-1. 출생

· 싸이먼 그레이의 부모인 패트릭 그레이(Patrick Gray)와 에마 번(Emma Byrne)에 대해선 별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이 같은 클리프덴7 출신이라는 것과 둘 다 스무살이 되기 이전 고향을 떠났다는 것, 그후 에마 번만 잠깐 다시 클리프덴으로 돌아와 살다가 8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더블린으로 떠났다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9 클리프덴에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패트릭 그레이의 친구 마이클 드바인(Michael Devine) 씨에 따르면 싸이먼 그레이의 아버지는 쾌활하고 농담을 좋아하며 정이 많은 소년이었다고 한다. 자신과 종종 쏠트호(Salt Lake)에 나가 홍치 낚시를 했으며, 관광객이 몰려오는 7월과 8월엔 인근 농장에서 빌려온 조랑말에 조잡한 마차를 연결해 스카이로드나 비치로드를 도는 아르바이트를 할 만큼 성실한 친구였다고 한다.10 하지만 마이클 드바인 씨 또한 열여덟살 이후 한번도 패트릭 그레이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11

 

· 에마 번은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클리프덴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상태. 코네마라 인근에 살던 에드워드 콜리 번(Edward Colley Byrne) 씨의 딸들 중 한명일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여담이지만 에드워드 콜리 번 씨 집엔 딸이 여섯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열여덟살이 되기 전에 가출했다고 전해진다.12

 

· 싸이먼 그레이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다소 냉소적인 평을 남기기도 했다.

 

—직물공장이나 작은 농장에서 염소를 돌보던 한 여자아이가 먼저 더블린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돈을 모아 런던이나 빈 혹은 빠리로 갈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열여덟살이었으니까, 세계는 이제 막 새로 산 운동화처럼 불편하고 딱딱하고 뒤꿈치가 아프지만 그래도 자꾸 뛰어보고 싶은, 낯설지만 가벼운 어떤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 신은 운동화도 이틀이면 길이 드는 법. 더블린이라고 해서 클리프덴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13 어쩌면 더 오래된 신발처럼 느껴졌겠지. 아마도 그녀는 더블린 시티가 아닌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이스트월(East Wall)이나 아버힐(Arbour Hill)에 있는 빈민가 낡은 주택 다락방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난로는커녕 욕실도 없었을 것이고, 집시들과 공용 화장실을 함께 썼을지도 모른다. 바닥에선 계속 못이 헐거워지는 소리가 들리고 창틀에선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공장 연기나 암모니아 냄새가 새어들었겠지. 더러운 매트리스와 다리가 짧은 나무의자 하나가 전부인 방. 그녀는 그곳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닥치는 대로 누군가의 가게를 청소해주거나 시간제로 어느 여자 교사의 갓난아이를 대신 돌봐주거나 그도 아니면 소매치기 조직 같은 곳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더러운 놈의 세상, 아마도 자주 혼잣말을 중얼거렸겠지. 클리프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더러운 놈의 세상, 그냥 퉤, 침을 한번 뱉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같은 또래들과 어울려 리피강(Liffey River) 주변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패트릭을 만났겠지.

“패트릭? 패트릭 그레이? 너 여기 왜 있는 거야? 낚시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일부러 더 큰 목소리를 냈을 것이고,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그녀는 패트릭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았을 테니까, 패트릭 또한 자신의 처지를 금세 알아봤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테니까. 클리프덴에선 친하지도 않던 패트릭을 보고 그렇게 흥분할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녀는 그냥 부끄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나의 시작이었을 것이다.14

 

· 싸이먼 그레이의 할머니인 제럴딘 셰이스 그레이(Geraldine Shays Gray)는 자신의 손자에 대해서 ‘완벽한 아이’였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15

 

· 그해에 클리프덴에서 태어난 아이는 싸이먼 그레이 외에 아무도 없었다. 바로 전해인 1980년엔 두명이 태어났고, 1979년엔 세명이 출생신고를 마쳤다. 다섯명 모두 여자아이였다. 그 뒤 1982년부터 1984년 사이 클리프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싸이먼 그레이는 그것에 대해서 당시 아일랜드의 불안한 정국, 씬페인(Sinn Fein)당의 급부상과 그에 따른 잦은 테러, 영국과의 무역 불균형 심화와 실업률 증가, 지속적인 저성장 기조의 영향이라고 분석했지만, 하여간 꼭꼭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먹물 티를 내야 했니, 그보다는 그냥 그때 클리프덴에 젊은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합당해 보인다. 참고로 1985년 클리프덴에선 두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태어났는데, 바로 패트릭 그레이의 친구 마이클 드바인 씨가 그해 쌍둥이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드바인 씨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고 있다.

 

· 싸이먼 그레이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그레이(James Gray)는 어린 시절 클리프덴 만 선착장에서 낚시를 하다가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다고 한다. 바다에 떨어진 낚싯대를 건질 마음으로 그랬는데, 그러다가 그만 선착장 콘크리트 중간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철근에 왼쪽 발목을 찔리고 말았다. 바로 치료를 받았으면 나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클리프덴엔 변변한 병원도 의사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 그레이 자신도 그의 부모도 그럴 의지가 없었다. 그의 나이 열한살 때의 일이다. 이후 그는 평생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절름발이 제임스’라고 불렀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로 인해 ‘절름발이 제임스’는 마을에서 제일 성실한 일꾼이 되었다고 한다. 멀쩡한 사람도 일자리가 없어서 그냥 집안의 골칫거리, 혹은 술꾼, 그도 아니면 자발적으로 미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처지였다.16 제임스 그레이는 어쩌다 한번 운 좋게 수산물 하역작업이나 염소농장 보수작업 일거리가 생기면 누구보다 일찍 나갔고, 가장 늦게까지 일터에 남아 있곤 했다. 남들 다 가는 펍(pub)에도 가지 않았고, 일이 없는 날엔 온종일 민물장어낚시에만 열중했다.17 그는 자신이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꾸린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이나 아일랜드나 그런 사람일수록 자식에게 더 꼰대 기질을 발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하늘의 이치인 듯. 그는 아들이나 손자에게나 가릴 것 없이 ‘내가 젊었을 땐 아침 식사라는 것은 구경도 못해봤다’ ‘사지도 멀쩡한 네가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니?’ 같은 말들을 버릇처럼 해댔다. ‘절름발이 제임스’는 싸이먼 그레이가 여섯살이 되던 해부터 민물장어낚시에 함께 데려가곤 했는데, 그에게 미끼로 쓸 미꾸라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그거라도 해서 밥벌이를 하라는 것이 제임스 그레이의 뜻이었다. 제임스 그레이는 평생 펍 근처엔 가지도 않았지만 1989년 가을 골웨이 국가건강검진센터에서 간암 진단을 받고 일년 남짓 투병생활을 하다가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참고로 싸이먼 그레이가 태어난 1981년은 바비 쌘즈18가 영국 마거릿 새처 내각에 저항하기 위해 교도소에서 66일간 단식투쟁 끝에 숨진 해이기도 하다. 마거릿 새처는 그가 죽은 후에도 눈 한번 깜빡 안 하고 ‘자살하는 건 그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사실이 싸이먼 그레이의 일생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또래 아일랜드 친구들이 그렇듯 영국에 대해 별다른 악감정을 지니진 않았다. 그냥 옆 나라일 뿐. 다만 싸이먼 그레이는 후에 바비 쌘즈를 다룬 영화를 애인과 함께 보다가 ‘생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봐, 네가 태어난 해에 어떤 사람은 스스로 굶어 죽었어.” 싸이먼 그레이는 바비 쌘즈보다 그 말을 하는 애인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88킬로그램이었다. 키는 174센티미터. 그는 처음엔 단순히 자신의 애인이 다이어트를 권한다고만 생각했다. 그 목소리에서 다른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은 그후로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라고 한다.

 

4-2. 유년시절

· 클리프덴 성당의 라이언 존슨(Ryan Johnson) 신부에 따르면 어린 시절 싸이먼 그레이는 말이 늦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였다고 한다. 여섯살 때까지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미꾸라지’ ‘미끼’ ‘빵’ ‘아멘’ ‘하느님’ ‘예수님’ ‘성모마리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것도 모두 게일어로.

 

· 싸이먼 그레이는 여섯살 때부터 클리프덴 공립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실질적으로 그에게 말과 글을 가르쳐준 사람은 라이언 존슨 신부라고, 라이언 존슨 신부는 주장한다. 라이언 존슨 신부는 일주일에 세번씩 성당에서 성경책을 펴놓고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19

 

· 라이언 존슨 신부는 싸이먼 그레이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다.

 

—싸이먼은 어렸을 때부터 좀 이상한 아이였어요. 상상해보십시오. 이제 겨우 여섯살, 일곱살 된 아이가 하루 종일 민물장어낚시만 하고 있는 거예요. 민물장어하고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애가 말이죠. 어느날은 밤을 새우면서까지 낚싯대만 바라보고 있었다니까요. 제가 싸이먼의 할아버지인 ‘절름발이 제임스’에게 항의하기도 했어요. 그건 명백한 아동학대입니다! 싸이먼을 일주일에 세번씩 성당에 나오라고 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어요. 한데… 싸이먼이 영 제 뜻을 받아주지 않더군요. 그 아인 저와 두시간, 세시간씩 마주 앉아 있어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가만히 제 눈만 바라보고 있었죠. 무슨 낚싯대를 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곤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제 낚시하러 가도 돼요?’ 뭐 그런 거였습니다. 제가 어린 싸이먼에게 묻기도 했죠. ‘너, 낚시가 그렇게 좋니? 그게 그렇게 재밌어?’ 그랬더니 싸이먼이 작은 목소리로 그러더군요. ‘민물장어는 낚싯대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대요.’ 제가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아이가 커서 무슨 위대한 낚시꾼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십시오? 문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다 여기 성당, 하느님의 집에서 저한테 처음 배운 영어 덕분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이 이미 다 예정해놓았던 것이죠.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