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아이들이 잘 자라는 나라

 

 

은유 작가의 『있지만 없는 아이들』(창비 2021)은 눈앞에 ‘있지만’ 서류에 ‘없는’ ‘투명인간’의 삶을 사는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상히 들려준다. 국내에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0~30만명, 미등록 이주아동은 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체류자격을 갖지 못한 부모와 사는 아이들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의거해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는 학습권이 주어지지만, 만 18세가 되면 상황에 따라 언제든 추방될 수 있다. 이들에게 붙여진 ‘불법체류자’라는 단어는 사회적 차별을 언어적으로 선명하게 가시화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가족에게 국가는 “닿지 않는 행성”(23면)이며, 그들은 그 행성을 맴도는 ‘유령 같은’ 존재다. 25년째 미등록 상태로 아들과 한국에서 살고 있는 몽골 여성 인화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사는 것도 아니고 안 사는 것도 아니”(196면)게 된 삶이다.

참담한 현실을 묵묵히 기록하는 가운데 이 책이 주는 깊은 감동은 차별과 소외를 겪은 당사자의 체험이 동료 시민들의 힘과 합쳐져 어떻게 사회 속에서 발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가르치는 학생이 어느 날 이유 없이 학교에 나오지 않자 그를 찾아나서는 선생님이 있고, 친구가 왜 학교를 떠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마음을 합하는 친구들의 움직임이 있을 때 차별과 고통을 벗어나려는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널리 퍼질 수 있다. 부모의 체류자격이 상실된 상태에서 적발되었으나 1650명의 탄원서 제출로 체류자격을 얻은 페버와, 친구들의 지지와 피켓 시위, 국민청원의 과정을 통해 3년 만에 난민 인정을 받은 민혁의 이야기는 불합리한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연대와 노력의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국가 차원에서 미등록 장기체류 이주아동에 대한 자격 부여 제도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절실한 마음을 호소한다.

이주아동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고통의 상황은 다급한데 그것을 바꿀 법과 제도는 하염없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올해 법무부는 15년 이상 한국에 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체류자격을 심사받을 수 있는 시행방안을 발표했지만 정작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아동은 극소수이다. 아이들만 일시적으로 체류하게 한다고 해서 문제의 근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계를 꾸리고 세금을 내고 소비를 하며 살아가는 나라에서 부모 역시 아이들과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차별을 겪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운동성을 지니고 제도를 바꾸어나갈 수 있도록 연대하는 실천적 행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들의 목소리를 우리의 삶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보편적인 과제로 사유하는 일이다. 차별받는 소수자의 삶에는 한 사회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잠복해 있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착취는 내국인이 기피하는 일자리에 이주 인력을 도입해 노동력을 수급하는 자본주의체제의 수탈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는 건 한국 경제가 그만큼 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150~51면) 아니냐는 물음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라도 개별자들의 소외된 상황이 사회 공동의 문제로서 사유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공론장에서 꾸준히 논의되며 입법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이나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령 수정 문제는 소수자를 위한 예외적 법령이 아니라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공동의 현안이다. 차별금지법만 하더라도 2007년 법무부 발의를 시작으로 긴 시간 계류 및 폐기를 반복해오다가 최근 국회 입법청원을 통해 10만명 시민의 동의를 얻었다. 산업재해 사망사고의 30퍼센트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외면하는 중대재해처벌법도 수정이 시급하다.

그동안 촛불시민이 열어놓은 변혁의 상상력은 차별받고 소외된 타자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드러내는 데서 나아가 이 목소리가 우리의 보편적 삶의 욕구와 긴밀하게 연결됨을 확인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는 후보들의 여러 공약들을 보며 우리가 새삼 환기해야 할 것은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제대로 꾸릴 수 있는 나라의 모습을 생산적으로 토론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눈앞에 펼쳐진 정치적 상황들이 쉽지만은 않다. 각종 세대론, 여가부 폐지론, 성별갈등이라는 프레임으로 선정적 정치 이슈를 재생산하는 현실의 반동적 정치 흐름은 이러한 실질적 개혁과제들에 의도적으로 눈감는다. ‘정의로움’을 빌미 삼아 손쉬운 정체성 정치의 프레임에 안주하는 구태의연한 정치문법 역시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냉소와 불신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갈 세계를 제대로 만들겠다는 주인의식을 지니고 꼼꼼하게 나라 만들기의 공약을 점검하고 헤아려갈 때 더 나은 제도와 세상을 만드는 길 역시 열릴 수 있다.

직장에서 안전하게 일하며 노동한 만큼 댓가를 받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지치면 쉴 수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은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삶이기도 하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원하는 대로 친구를 사귀고 학교를 다니고, 내가 나임을 인정받으며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는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더이상 느긋하게 생각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이번호 특집은 ‘촛불 5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촛불혁명이 만든 변화를 평가하고 이후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시도로 기획되었다. 촛불혁명의 현재와 촛불정부 2기의 과제를 모색하는 특집 대화는 이남주의 사회로 박정은 이정철 황규관이 참여해 현 정부가 이루어온 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북관계, 민주주의와 불평등, 기후위기, 노동과 기본소득 등을 둘러싼 개혁과제들을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와 토론이 요긴하다. 촛불혁명이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촛불의 동력을 새롭게 환기하면서 우리 각자가 도모할 실천적 노력을 촉구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어지는 신진욱의 글은 촛불 이후 ‘공정’ ‘정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역동이 두드러졌음을 주목하며, 공정 개념이 사용되어온 맥락을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그동안 공정과 정의의 개념은 기득권 집단의 수구적 담론 전략, 신자유주의 주체의 능력주의적 믿음,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훼손과 왜곡의 과정을 겪어왔기에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더 큰 정의로 공정을 다시 써야 한다고 이 글은 주장한다. 평등, 존엄, 인권, 연대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적극적 사유를 통해 우리 삶의 변화, 관계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설득이 간곡하게 펼쳐진다.

성재호는 현장의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촛불 이후 여러 좌절과 곤경을 겪어야 했던 언론개혁의 실상을 상세히 살핀다. 정부의 언론대책이 부딪친 한계를 주시하며, 현재 인터넷 사업자에 포섭된 공영방송 저널리즘의 심각한 문제를 짚는다. 언론개혁을 위해서는 근본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며, 시민의 참여와 결정이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제도적 변화가 모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번호에는 김용옥 박맹수 백낙청 세 석학이 모여 동학사상을 오늘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파격적이고 유례없는 좌담이 기획되어 더욱 뜻깊다. 동학 연구에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 『동경대전』(통나무 2021)의 출간을 계기로 동학이 대결했던 사상적인 유산과 그 현재적 의미를 다각도로 성찰한다. 동서고금의 사상사와 역사를 가로지르며 ‘개벽’이라는 주제어를 논하는 깊고 풍부한 대화의 향연은 근대 이해에 대한 정교한 논의를 바탕으로 동학과 서학, 동학과 원불교, 동학과 촛불혁명을 현재적으로 연결한다. 천주교 및 서양 문명과 치열한 대결을 수행하며 수평적인 민본주의를 사유하고 민중들의 해방에 앞장선 동학사상의 혁신적 면모가 지금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바탕이 된다는 시야의 확장이 힘있게 다가오며, 서구 논의에 치중된 고답적 사유를 단숨에 격파하는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 실천적 토론이 읽는 분들에게도 보람과 즐거움을 넉넉하게 선사하리라 생각한다. 참석자의 염원대로 동학사상의 세계사적 의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참신한 영감(靈感)으로 다가가고 풍부한 토론과 논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현장란에서는 최근 사회적 의제로 다시 떠오른 천안함 침몰사건과 그를 둘러싼 진상규명의 노력 과정을 주목했다. 이태호는 세월호와 천안함에 공통적으로 드리워진 분단체제와 안보국가의 폭력성을 고찰하며, 그동안 진행된 천안함사건의 쟁점을 차분히 살피면서 진상규명에 분투를 아끼지 않은 이들의 노고를 새긴다. 피해자의 고통을 치유하고 천안함사건에 대한 과학적인 문제제기와 합리적 해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론장이 열려야 함을 촉구한다.

남상욱의 산문은 최근 입법화가 추진된 동물권 논의를 배경으로 팬데믹 시대의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고찰한다. 동물권 관련 저작들을 풍부하게 거론하며,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통해 상시 재난 상황 속에 직면한 동식물 종들에게 앞으로 어떤 정치적 활동이 필요한가를 섬세하게 타진한다.

문학평론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매혹을 주는 당대의 개성적인 문학작품을 선별하여 섬세한 작품 읽기와 깊이있는 비평적 조명을 시도한다. 먼저 한기욱의 글은 신경숙의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에 대한 밀도 높고 신실한 작품비평을 보여준다. 필자는 한국 근대의 격동기를 고유한 개인이자 전통적 농촌공동체의 가장으로 살아낸 아버지의 삶이 딸의 시선을 통해 서사화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읽어나간다. 기억의 서사를 개성적으로 활용하는 작가 고유의 창작방식에 주목하면서 사실적 서사들과 어우러진 정동적 장면들이 예술의 현재성을 획득하는 지점을 섬세하게 분별하고 작품이 이룬 문학적 성취를 균형적으로 가늠하는 점이 돋보인다. 더불어 노년의 삶과 돌봄의 문제, 인간과 동물의 관계, 생태 위기 등 다양한 시대적 주제와 연동된 풍부한 독서 맥락을 환기한 점도 의미가 깊다.

박소란은 타인의 감정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시적 주체에 대한 발견을 화두로 삼아 이연주 유병록 채길우 김은지 강성은의 시를 자유롭고 활달하게 해석한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응과 교통의 상상력이 배어 있는 시적 장면들을 살뜰하게 호명하면서 삶과 호흡하는 시의 소중한 역할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창비신인평론상을 수상한 김주원은 신해욱 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타자의 조명과 감각적인 사건의 포착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발명하는 시적 상상력을 세심하게 분석한다. 열림의 존재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간중심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시인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포착한 의욕적인 신예의 글로 흥미롭게 다가온다.

창작에서는 시란에 중견시인 강은교부터 신인시인상 수상자 남현지까지 12인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담았다. 최은미의 장편소설이 세번째 연재를 맞은 가운데 강화길 김려령 손보미의 공들인 신작 단편이 독자를 반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인 신인소설상 수상자 성혜령의 단편도 눈길을 끈다.

작가조명에서는 신철규 시인이 신작 시집 『혼자의 넓이』를 출간한 이문재 시인을 만났다. 생태적 담론과 인간문명에 대한 성찰적 사유를 꾸준히 개진해온 시인의 시세계를 자상히 헤아리면서도 예리한 논점을 담아 흥미로운 비평적 조명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초점에서는 황인찬 시인, 정지아 소설가, 박동억 문학평론가가 이 계절의 주목할 작품들을 선정하여 대화를 펼친다. 최은미 손원평 임국영 소설과 고영서 황성희 최지은 시집을 집중적으로 읽고 나누는 진솔한 논평과 감상이 흥미롭다. 또한 촌평란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의미있는 책들을 선별하여 의의를 가늠한 정성 어린 서평들을 만날 수 있다.

제39회 신동엽문학상은 이정훈 시인과 박상영 소설가 그리고 장은영 문학평론가가 각각 수상했다. 세분에게 진심으로 격려와 축하를 보내며 문학적 정진을 기대한다. 창비신인문학상을 통해 만나게 된 신인들에게도 기대를 전한다. 아울러 만해문학상의 최종심 대상작 목록과 심사평을 실었다. 겨울호에 수상작이 발표될 예정이니 꾸준한 관심을 부탁드린다.

끝으로 지난호부터 본지는 전량 FSC 인증 친환경 용지를 사용해 제작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드린다. 지구 환경을 보존하려는 실천이 많은 분들의 일상으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번 계절에도 한권의 책을 꾸릴 수 있도록 더위를 이기며 정성 들여 글을 쓰고 보내주신 필자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본지 역시 성심을 다해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며 변함없는 성원과 엄정한 조언을 부탁드린다.

백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