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영하 周瑛河

2022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malaria78@gmail.com

 

 

 

아이오와

 

 

1

 

빌리를 먼저 만난 건 하은영이었다. 출장 겸 여름휴가로 갔던 아이오와의 한 펍에서였다. 샷도 칵테일도 놀랄 만큼 저렴해서 둘은 종류별로 돌아가며 실컷 마셨다. 벽에는 철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고 술잔과 테이블은 끈적거렸다. 두 사람은 밤이 깊을 때까지 함께 마시다가 다시 만날 약속을 정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질색했던 하은영을 생각하면 그곳은 아주 인기 없는 펍이었을 텐데, 거기가 어딘지 궁금해진 건 나중의 일이었고 훗날 아이오와에 다시 갔을 때도 찾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하은영과 빌리가 떠오를 때면 내가 모르는 그 펍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여러번 고쳐 그려보곤 한다. 내가 없으므로 온전해지는 둘만의 순간을. 장면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고, 더는 이들을 만날 수 없으므로 이 상상은 앞으로도 내게만 속해 있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이 작은 기쁨을 준다.

 

빌리는 그해 아이오와대학의 여름 창작세미나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온 젊은 시인으로 저렴한 버번을 잔뜩 사다가 자신의 숙소 주방에서 자주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무렵부터 그는 이름 대신 빌리 버번이라고 불렸다. 게다가 하루 열두번쯤 기분이 바뀐다는 그의 룸메이트가 아내의 방문으로 따로 머물 곳을 얻은 덕분에 빌리의 작은 주방은 밤의 허기에 시달리는 작가들로 더더욱 붐볐고, 하은영도 어느새 마지막까지 그 파티들에 남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빌리가 하은영에게 그 노트 이야기를 꺼낸 건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함께 설거지를 하다가 정말로 자기 노트를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하은영은 전에 빌리가 노트를 보여주겠다는 걸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하은영도 이번에는 진지하게, 정말로 뭐에 대한 내용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예전에도 말했듯이 옥수수밭에 대한 글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은영도 여전히 그게 흔해 빠진 메타포라고 생각했다. 지루한 냄새를 풍길 거라고. 하지만 결국 노트를 보여달라고 말했고, 그걸 읽고 난 며칠 뒤에는 내게도 메일을 보내와 아이오와로 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직은 거칠지만 모든 장면이 마음을 끌어요.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해지고요. 프로그램은 곧 끝나겠지만 빌리와 난 한달쯤 일할 공간을 빌릴 거예요. 어떤 옥수수밭 농가인데 빌리가 잘 아는 곳이라고 해요. 구선생도 잠시 와서 쉬는 건 어떨까요.

 

메일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은영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사람에도 작품에도 거리를 두는 타입이었다. 충동적으로 굴거나 흥분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해외에이전시 일을 시작한 뒤로는 더 엄격하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방만한 한달이라니. 사랑에라도 빠진 건가 생각해봤지만 그야말로 당시 하은영에게는 가장 벌어지지 않을 법한 일이었다.

나는 갈 수 없다고 답장했다. 몇가지 핑계를 대긴 했으나 무엇보다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지쳐 있던 때였다. 가까스로 첫 소설집을 낸 뒤로 긴긴 탈진이 찾아왔다. 쓰고 있는 장편은 몇년째 지지부진했다. 내 상태를 모를 리 없는 하은영이 이런 메일을 보내온 것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아이오와행 비행기표를 끊게 된 건 하은영이 재차 보내온 메일 한통 때문이었다. 하은영은 빌리의 노트에서 옮긴 긴 시 몇편을 보내왔다. 짐승을 죽이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도살자, 신을 똑바로 본 죄로 눈이 멀어버린 사제, 자기 꼬리를 베어 먹어야 살 수 있는 뱀 인간 같은 이상하고 어두운 인물들이 옥수수밭에 모여드는 내용이었다. 하은영의 말대로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는 글들이었지만, 그보다 내가 마음을 빼앗긴 건 메일 마지막에 첨부된 그 농가의 사진이었다.

지쳤기 때문일까. 기이할 정도로 빽빽한 옥수수밭에 둘러싸여 요새처럼 보이는 그 집을 보자 저기야말로 내가 도망쳐갈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하은영이 있을 테고, 또 눈먼 사제와 도살자와 뱀 인간을 만난들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아이오와로 향하는 길은 멀고 또 멀었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끌고 나오자 저만치 떨어진 주차구역에서 하은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 비행에 잔뜩 구겨진 내 몰골과 달리 하은영은 얼굴과 팔이 보기 좋게 탔고, 딱 봐도 농부를 꿈꾸는 도시인풍인 지나치게 반들거리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은영은 그 모자를 조수석에 앉은 내게 씌워주며 웰컴 선물이에요, 여행길은 어땠어요? 물었다. 나는 피곤했다는 짧은 대답만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은영은 별말 없이 웃었는데, 언제나 그랬듯 내가 최소한 삼단논법 정도는 구사하기를 기다려주는 듯했다.

다행히 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어느정도 평정을 되찾았다. 무미건조한, 끝없는 옥수수밭 덕분이었다. 이곳을 다녀왔던 몇몇 동료들의 이야기처럼, 아무 느낌 없이 흘러가는 무수한 날들처럼, 그곳에는 옥수수가 있었고 옥수수가 있었고, 또 옥수수가 있었다. 밭들이 끊임없이 뒤로 밀려나는 동안 나는 여러번 차를 세우고 길가에 토했다. 그때마다 하은영이 운전석에서 걸어 나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사나운 한낮의 볕이 쭈그려 앉은 우리 등 위로 내리꽂혔다.

 

지금도 나는 그때 아이오와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와 하은영은 여전히 친구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귀국을 이틀 남겨두고 하은영은 말도 없이 그 농가를 떠나버렸다. 아침에 빌리와 내가 눈을 떴을 때 하은영은 없었고 침대 구석에 그녀가 아끼던 스카프만 둘둘 말려 처박혀 있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전날 작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평소의 하은영을 생각하면 그게 이유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은영이 급하게 비행기표를 바꿔 혼자 돌아갔다는 걸 알고 나서도, 어떤 이유에서건 더는 내 연락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정을 지킬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일했던 에이전시들에 연락했지만 누구도 하은영의 근황을 알지 못했다.

한참 뒤 나는 그녀가 제주도에서 머물다가 서귀포시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면 성장의 비밀』 『아침형 아내, 저녁형 남편』 『프랑스 빵처럼』 같은 그녀와는 조금도 접점이 없어 보이는 출간목록을 가진 곳이었다. 서점에 갈 때면 그 출판사 신간들을 종종 찾아 판권에서 이름을 확인했지만 한두해가 지나자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이후 몇해에 걸쳐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은영이 결혼했다는 것, 아이를 낳았다는 것, 진흙탕 같은 법정소송 끝에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빌리는 언젠가 옥수수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들어가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날 하은영과 내가 그 낡은 농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공기는 석양에서 번져 나온 붉은빛으로 가득했다. 무수한 옥수수 그림자들이 날카로운 죽창처럼 기우뚱 붉은 땅에 꽂혀 있었다.

막상 눈으로 본 농가는 평범했다. 농가치고 층고가 꽤 높다는 것 외에 특별할 게 없는 2층 목재건물로, 여러번 보수한 듯 자재마다 결과 색이 달랐고 바람이 불면 벗겨진 페인트칠이 비늘처럼 일었다. 내 시선은 곧 포치에 앉아 있는 빌리 버번에게로 가닿았다. 그는 우리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는데 나는 그의 외양도 걸음걸이도 어딘가 이 농가처럼 무색무취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밝은 금발과 눈동자 색 때문인지 마치 빛바랜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다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쾌활하고 악수를 건네는 손은 따뜻하고 두툼해서 그런 것들이 그에게 색채를 입혀주는 듯했다.

빌리는 느긋한 몸짓으로 내 짐을 받아 들었다. 주방으로 들어간 하은영은 벌써 프라이팬을 꺼내놓고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빌리가 계단에 올라서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 방은 2층이에요. 계단이 좀 가파르니 조심해요. 그는 짐가방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나무 난간을 친근하게 툭툭 두드렸다.

처음에는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여길 오갔어요. 결국 오토바이가 말썽을 부려서 며칠이나 발이 묶였어요. 바보 같았죠. 참, 은영이 말해줬나요? 이 농가를 먼저 발견한 건 내 삼촌이에요. 한때 시인이셨죠. 오래전에 나처럼 이곳 창작프로그램에 왔다가 이후에도 여기로 쉬러 오곤 했어요. 삼촌은 우연히 저 옥수수밭에 들어갔다가 자기 미래를 봤어요.

뭘 봤다고?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아까 오는 길에 하은영이 했던, 빌리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꽤 할 거라는 귀띔을 떠올렸다.

그럼 당신도 봤어요? 그 미래 말이에요. 내 물음에 빌리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봤죠. 여기 온 첫날에. 당신도 내 말 안 믿죠? 내가 애매한 미소로 답하자 그는 뭐가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빌리가 안내한 내 방은 넓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창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빌리가 커튼을 젖히자 순식간에 방 안으로 붉은 석양이 쏟아져 들어왔다. 층고 높은 건물의 2층에서 보는 옥수수밭 전경은 지상에서와는 또 달랐다. 저기 들어갔다가 못 빠져나오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방을 나갔지만 나는 그 말이 진실일 수 있다는 걸 본능으로 이해했다. 멀리 농가 뒤쪽으로는 먼지 날리는 노후한 도로가 놓여 있고, 그외 온 사방에는 옥수수들이 어떤 틈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치밀하게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름다운 동시에 어딘가 강박적이고 불쾌했다.

아래층에서 하은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창가에 서 있다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더운 공기 속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실력 발휘 좀 했는데 먼저 채갔네요. 내가 다가가자 하은영이 고갯짓으로 현관 너머 포치를 가리켰다. 탁자에 앉아 뜨거운 계란토스트를 맥주와 천천히 먹고 있는 빌리가 보였다.

어떤 펍에서 만났어요. 하은영이 가스레인지 불을 끄며 말했다. 조용히 혼자 한잔하러 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작년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에 보이길래 좀 망했다 싶었죠.

나는 하은영이 내민 컵을 받아들었다. 술잔이 뿌옜겠네요. 하은영이 웃었다. 맞아요. 탁자도 끈적끈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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