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인숙 金仁淑

1963년 서울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칼날과 사랑』 『유리 구두』 『그 여자의 자서전』 『안녕, 엘레나』, 장편소설 『핏줄』 『그늘, 깊은 곳』 『꽃의 기억』 『우연』 『봉지』 『소현』 『모든 빛깔들의 밤』 등이 있음. sunisok99@gmail.com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산불을 본 적이 있다. 지방 국도를 달리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길이 막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상습 정체구간이 아니었고 차가 막힐 이유가 없는 시간대였는데도 그랬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뻣뻣해진 목을 풀기 위해 반대편 차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뭔가 분명히 이상했는데,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들이 모두 룸미러로 뒤를 보며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대편 차선 역시 약간의 정체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고속도로급의 국도에서 뒤를 바라보며 달린다는 건, 제정신이 아닌 생각이었다.

그는 반대편 도로 운전자들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길게 뽑아 보았다.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길가로 나와 서 있는 것이 멀리 보였다. 사고를 구경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반대편 차선을 바라보았는데, 여전히 그쪽 운전자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뭘 봤길래 저럴까.

전방으로 갑자기 확 솟아오르는 불길이 보인 건 그때였다. 비명인지 감탄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터져나왔다. 불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났다. 마치 저기 어디쯤, 산 하나가 통째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그는 꿈을 꾸듯이 차에서 내려섰다. 흡사 정지되었던 화면이 바로 그때부터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불타는 냄새가 쏟아져오고, 그을음이 날아오고, 불타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고속도로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일제히 질러대는 소리가 들리고, 소방차 싸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는 감전이라도 된 듯 진저리를 쳤는데,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진동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멍한 시선으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전화기를 들고 내렸구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 액정에 뜬 전화번호가 회사 동료라는 걸 알았고, 그가 왜 아직도 회사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를 추궁하는 전화이리라는 걸 알았고, 산 하나가 통째로 불타든, 세상 전부가 불타든, 달라지지 않는 건 달라지지 않은 채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K와 같은 버스를 탄 게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아주 많이 늦기는 했지만 그는 어쨌든 회사로 돌아왔고, 차량을 반납했고, 그리고 회식 중이라는 부서원들을 찾아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이 곧바로 퇴근을 해도 됐지만, 그는 산불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는 본부장이 함께 있었다. 아마 우연한 합석이었던 듯한데, 간부는 간부답게 부서원들에게 소고기를 시켜주고, 시답잖은 농담과 격려를 하는 중이었다. 부서원들 중 누구도 그에게 왜 늦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 역시 무슨 말이든 끼어들 기회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먹고 마셨다. 본부장이 자리를 뜨기 직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요샌 왜 이렇게 불이 많이 나나 몰라,라고 중얼거렸는데 아마 포털 메인에 산불뉴스가 뜬 듯했다. 그는 그 산불을 자기가 봤다고, 물론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K와 같은 버스를 탔고, K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훅 갔다 오는 거야. 어디든.

 

K와 같은 버스를 탄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K는 최근에 이사를 했다는데, 새로 이사한 집이 그와 같은 동네에 있었다. 그들이 사는 동네, 서울의 북쪽에 있는 신도시로 가는 퇴근길의 버스는 늘 만원이었지만, 그날 그들은 운이 좋게도 둘 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잠깐 동안 폭등하는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과 좀처럼 오르지 않는 그들 동네의 아파트 가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는 곧바로 각자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흔들어 깨우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K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K의 눈이 붉었다. 그가 잠들어 있던 동안, 내리 울었던 사람처럼.

그런데 문제는 거기가 내가 의도한 곳이 아니고, 또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거기가 어딘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증명이 안 된다는 거지. 그래서 누구도 안 믿어준다는 거지.

그는 그냥 듣기만 했다.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누구도 안 믿어준다는 거지.

K는 같은 말을 한번 더 반복했다.

버스는 그때 실내등을 끈 채로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세상은 어둡고, 버스는 만원이고, 버스 천장의 고리에 매달린 사람들은 둥근 고리와 함께 둥글게 흔들리고, 그는 옅은 취기와 졸음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다시 자고 싶었지만, 그러나 예의를 다해 물었다.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데?

그냥 훅.

훅?

눈 깜짝할 사이에, 그냥 훅.

K는 이제 앞을 보고 있었다. 살짝 통로 쪽으로 고개를 틀고 있어서 옆모습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K의 귀가 쪽박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 귓가로 자라난 흰머리가 눈에 띄게 덥수룩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와 K는 동갑이었다.

그날, K는 대체 얼마나 취해 있었던 것일까. 편안한 회식자리가 아니었으니 누구도 취하도록 마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K에게서는 술 냄새보다는 숯 냄새, 그리고 숯에 탄 고기 냄새가 더 많이 풍겼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중간하게 취해 있거나 어중간하게 깨어 있었고, 만원인 직행버스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고기 냄새와 숯 냄새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K와 똑같았고, K는 그와 똑같았다.

사실은 말이지.

그는 K에게 말했다.

난 오늘 산불을 봤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순간이동을 하는 남자 앞에서 기껏해야 산불 구경 이야기라니. 게다가 산불이 ‘고작, 겨우, 기껏’이 되어버리다니. 그는 부끄러웠고, 까닭을 알 수 없게도 몹시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의 회사 근처에는 피규어를 파는 상점이 있었다. 피규어가 장난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것들에 붙어 있는 놀라운 가격표 때문이었다. 어떤 피규어는 그의 월급 전부를 털어야만 할 정도로 비쌌는데, 그런 걸 누가 사랴 했지만 ‘가게’가 아니라 ‘숍’에 가면 그 정도는 오히려 싼 축에 속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가게와 숍의 차이는 장난감과 피규어의 차이와 같았다.

그곳에서 K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가게 앞에서였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는데, K는 근처 치과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고, 그는 살짝 멋쩍은 표정으로, 아들이 곧 생일인데 애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뭐 이딴 게, 지랄맞게 비싸다고, 욕을 섞어 덧붙였다. K는 이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뺨에 대고 있는 한 손을 떼어내지도 않은 채로, 찡그린 얼굴로, K는 말없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어깨만 툭툭 두드렸다. 위로하듯이, 혹은 격려하듯이.

K에게서 순간이동 이야기를 들은 후, 그 장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 어디에든 갔다 올 수 있다는 K는,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K는, 정작 자신의 치통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 치통만 그렇겠나. 변비도 그렇고 배탈, 설사도 그렇겠지.

K와 다시 순간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었다. 다른 어떤 일반적이고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기회도 없었다. 같은 버스를 탈 일도 더는 없었는데, K가 자신의 집 앞에서 내리는 더 빠른 노선을 알아냈기 때문이고, 그걸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그였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같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그 점심을 간혹 한 테이블에서 먹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는 옆자리에 앉거나 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