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한아
1982년 서울 출생. 2005년 제4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달의 바다』가 있음. hanah1419@hanmail.net
아프리카
내 주머니 속에는 아프리카가 들어 있다.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을 만져본다. 사장 할머니에게 혼이 났을 때, 몸이 아플 때, 언니들과 다투었을 때, 나쁜 손님을 겪었을 때. 나는 가게 뒷골목으로 빠져나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에 쪼그려앉는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끝자락을 만져본다. 뜨거운 햇살과 돌연변이 새들, 초원의 야생동물들이 나를 콕 콕, 찌른다. 그러면 웃음이 난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어려서부터 나는 동물을 좋아했다.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하마와 치타, 뱀 같은 동물에 특히 사족을 못 썼다. 인간과는 친해질 가망이 없는 것들, 손을 내밀면 덥석 물어버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쪽에 언제나 마음이 더 끌렸다. 그들이 그러는 게 사실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런 동물과 마주치게 되면 ‘이건 오해야’ 하면서 한발 더 다가서지 않고 돌아서서 못 본 척해줄 것이다. ‘나는 널 이해해.’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면서. 내가 보기엔 그런 게 진짜 존중이다.
내 주변에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언니들이 많았지만 오래가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어린 동물들이 적응하기에 가게생활은 너무 불규칙적이기 때문이다. 대개가 변덕스러운 주인의 생활패턴을 견디지 못하고 병에 걸리거나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상상 속으로만 생각한다. 부끄러움이 많은 동물 한마리가 몰래 내 방에 숨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늦은 밤에 몰려오는 피로나 외로움 같은 것도 제법 견뎌진다.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리면 눈을 뜨지 않고 속삭인다.
“잘 자.”
가게에서 제일 조용한 시간은 아침나절이다. 웬만해선 다들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장 할머니가 부엌과 거실을 들락거리는 게 전부다. 따로 배우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오면 저절로 알게 된다. 아침 시간에는 뭐든지 말갛게. 말소리도 행동도, 말갛게. 그것만은 서로가 지켜줘야 하는 부분이다. 밤새 손님을 겪은 언니들에겐 헐떡거림, 침, 그리고 이리저리 쓸린 몸뚱이만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지난밤을 희석시킬 고요가 필요하다.
아침잠이 없는 나는 혼자 유령처럼 가게를 떠돌아다니곤 한다. 방문을 열면 언니들이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언니들은 입을 벌리고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드러누워 있다. 낙천적인 아가씨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언니들의 발치에 엎드려서 만화책을 읽는다.
나는 인생에서 대부분의 책을 여기에 와서 읽었다. 어렸을 때 내가 자란 곳은 책 같은 것을 읽기에 문제가 많았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3, 4년쯤 후에 집을 떠나버렸다고 하니 그녀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달에 한두번 음식과 인형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것이라곤 내 숨소리뿐인 집이었다.
나는 혼자서 냉동음식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사팔뜨기가 될 정도로 현관문만 바라보던 날도 있었고, 온종일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날도 있었다. 내 기다림을 병에 담으면 수천번도 더 그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매번 아버지를 용서했다.
아버지는 내 존재를 보류의 상태로 둔 채 새 가정을 이루었고, 그후로는 나를 등장시킬 타이밍을 영영 놓쳐버렸다. 우리 관계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떠난 것은 열한살이 되던 해였다. 집을 나오던 날 나는 아버지의 등에 유릿조각을 박아넣었다. 등을 찔린 순간 아버지는 무척 놀랐지만, 곧 안심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쓰러진 아버지의 옷을 뒤져 지갑을 꺼내 나왔다. 아버지는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침착하게 신발을 신고, 멀리멀리 걸어갔다.
나는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남자애를 따라갔다. 그애는 나를 자기 무리에 소개했는데 한눈에 봐도 모두들 가진 게 없는 아이들이었다. 싸구려옷을 입고, 지저분한 얼굴에, 눈동자에만 힘이 들어간 그 아이들은 인상을 쓰듯 어색하게 웃으면서 나를 받아들였다.
무리와 떠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익혔다. 더이상 혼자 밥을 해먹는 일은 없었지만, 남자애들이 달라붙어 귀찮게 굴 때가 많았다. 임신한 여자애들은 가차없이 버려졌다. 나는 아랫배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다가 팡, 터지는 악몽을 꾸곤 했다.
이곳에 올 때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 그건 아주 옛날의 일처럼 희미해졌다. 나는 괴로웠던 기억은 잘 잊어버린다. 생각나는 건 낄낄대며 웃었던 일들, 신나게 소리를 질렀던 일들뿐이다. 이를테면 남자애들과 바이크를 타고 지구 한끝에서 한끝까지 날아다니던 밤,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고개를 젖혀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은 아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세상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지고 싶지는 않아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정오가 지나면 언니들은 방문을 열고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온다. 화장기 없이 커다란 파자마를 입은 언니들은 매일 보는 사이인데도 조금 쑥스러워하며 소파에 앉는다.
“커피 좀.”
미연 언니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커피를 주문한다. 옆에서 수진 언니도 비시식 웃으며 손을 든다. 나는 막내답게 날렵한 자세로 일어나서 물을 끓인다.
언니들은 속이 쓰리다고 난리를 피우면서도 눈을 뜨면 커피부터 찾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입 안에 머금고 눈을 감은 언니들의 얼굴은 꽤 어려 보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건 언니들의 나이에 딱 맞는 모습이다. 뽀얀 피부에 스물서너살 된 아가씨들의 모습. 둘러앉아서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나면 언니들의 눈동자도 차츰 생기를 띤다.<